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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연애, 만인의 무정부주의 ① : 뉴욕과 엠마 골드만

by 북드라망 2017. 2. 24.

연애, 만인의 무정부주의 ① : 뉴욕과 엠마 골드만



연애 초기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모텔에 자주 갔었다. 남자친구나 나나 룸메이트와 집을 쪼개 쓰는 처지였다. 단 둘이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호텔을 가기에는 또 돈이 없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맨해튼에서 제일 값싼 모텔이 모여 있는 동네, 차이나타운뿐이었다. 그 비좁고 퀴퀴한 방에서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곳 로어 이스트 사이드는 맨해튼에서도 옛날부터 돈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전통적인 빈민촌이라는데, 우리가 영락없이 그들의 후예였다.


그래도 좋았다. 체온은 따뜻했고 마음은 평온했다. 아무리 돈이 없다지만 뉴욕에서 연애를 안 하면 뭘 한단 말인가? 대부분의 개척자는 뉴욕에 홀로 오는데, 홀로 살기엔 이 개인주의적 도시는 너무 크고 또 외롭다. 개인은 무력하지만 연애는 힘이 세다. 국적, 성별, 인종, 나이와 같은 편견의 카테고리를 거침없이 무너뜨린다. 나와 남자친구는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뉴욕 사람들의 버라이어티한 연애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한 편이었다. 성에 관대하다는 것은 관계에 관대하다는 것이고, 풍요로운 관계는 풍요로운 존재감으로 귀결된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찾아온 것이 아닐까. 이 도시가 몇 세기 동안 싸워서 쟁취해낸 ‘자유’는 이 낡은 차이나타운 모텔방 안에, 백인 여자와 흑인 여자가 길거리에서 사랑스럽게 맞잡은 손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영원히, 싱글의 도시


모텔에서 어설프게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길거리로 나가는 순간 정신은 현실로 돌아온다. 자유는 양날의 칼이다. 연애의 자유는 ‘연애로부터의 자유’라는 역설적인 문제를 늘 끌어들인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볼까. 이성애자의 연애는 혼전 임신이라는 족쇄를 전제로 한다. 몸은 충분히 성인임에도, 대다수의 청년들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노답 상태’다. 생리가 늦어지는데 혹시 임신은 아닐까. 혹시 피임에 실패했나. 불안은 유령처럼 연인들을 쫓아다니고, 아이를 낳은 후의 현실은 차이나타운 모텔만큼이나 퀴퀴해 보인다. 그러나 겁을 집어먹고 혼전 순결을 고수하기에는 지금 시대는 너무 멀리 왔다.


참 이상하다. 성(性)은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에너지인데, 왜 정작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탄생은 족쇄가 되는가. (그러면서 동성애자의 연애는 ‘반자연적’이라며 얼토당토않게 비난 받는다.) 자유연애란 몸의 리얼리티와 현실 사이의 간극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모래성과 같다. 조금만 발을 헛딛어도 와르르 무너진다. 자본주의 시대, 이 간극 앞에서 내 몸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은 하나다. 돈이다. 돈이 있어야 산모와 아이를 지킨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돈이 없어서 연애, 결혼, 육아를 포기한다는 ‘삼포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뉴욕의 풍경은 다르다. 여기 사람들은 당최 포기(?)라는 것을 모른다. 타자와 접속하고픈 욕망이 경제적 제약을 개의치 않을 만큼 강렬한 것이다. 일요일 아침마다 공동묘지에서 꽃을 주워서 오후에는 애인에게 그 꽃을 선물했다는 내 교수님처럼, 다들 돈은 없어도 각계전략을 활용해서 애인을 구한다. 결과는? 미혼 가정이 넘쳐난다. 싱글은 싱글 부모가 되고, 덜컥 아이를 갖게 된 젊은이들은 ‘싱글’이나 다름없는 경제력으로 가정을 꾸린다. 피임기구를 도서관에서 무료로 나눠주고, 지하철마다 “안전하게 놀라(Play Sure)”는 공익광고를 싣는 뉴욕시의 노력은 거꾸로 이 도시에 미혼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다. 내가 다니는 커뮤니티 칼리지만 해도 그렇다. 나이는 분명 내 또래인데, 다들 집에 애가 하나씩 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서 수업에 데려오는 미혼모,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때문에 조퇴하는 미혼부. 그것도 모자라서 싱글 부모끼리 또 새로 연애를 한다. 정말 놀라운 에너지다!




물론 이들이 이런 삶에 만족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안전하게’ 연애한다고 해서 이 싱글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한 번은 피임에 실패해서 사후피임약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부작용으로 우울증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나나 남자친구나 빈털터리 상태에서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울증이 덮치자 깊은 회의가 들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이십대 여자다. 그런데 왜 이런 모멸을 겪어야 하는가.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데 말이다. 현실에서 내 자궁은 아이라는 ‘돈 먹는 기계’를 탄생시킬지도 모르는 위험 구역에 불과했다. 그 순간 자존감이 땅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때보다 더 강렬하게 페미니스트였던 적이 없다. 세계 만국의 청년에게 이보다 더 회의적으로 공감했던 적이 없다. 이 자존감은 남자친구가 나를 ‘책임져준다고’ 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불안과 우울함에 대해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애인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싱글’이다.


그래서 뉴욕은 언제나, 싱글의 도시다. 내 몸에 대해서 오직 나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애도, 결혼도, 피임도, 임신도 진정 ‘자유로운’ 탈출구는 아니다. 무엇이 자유인가. 피임을 해서 내가 원하는 상대와 원하는 만큼 성관계를 갖는 것인가. 무엇이 사랑인가. 육아를 책임감 있게 하는 상대를 고르는 것인가. 만약 이 혼란을 똑바로 직시하고 직접 겪어내는 것이 ‘자유’라면, 이 자유의 무게는 도대체 얼마인가.


나만 이런 질문을 해온 것은 아닐 것이다. 질문을 던지고, 질문에 답하고, 질문과 대답 사이의 일치하지 않는 간극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끝까지 사랑은 포기하지 않았던 ‘싱글 여성’이 있었다.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보편화되기도 전에 피임, 육아, 돈, 사랑, 정치에 대하여 미국 정부도 깜짝 놀랄 의견을 주창했다. 130년 전에 치맛자락 휘날리며 뉴욕의 로어 이스트 사이드를 휘젓고 다녔던 ‘센 언니.’ 엠마 골드만이다.



‘여자,’ 사생활 해방 전선에 뛰어들다


엠마 골드만의 프로필은 보기만 해도 ‘세다.’ 직업은 아나키스트. 특기는 노동자 파업 현장에서 연설하기. 생계는 불온 잡지 발행하기. <뉴욕 열전>을 쓴 이와사부로 코소는 그녀를 “여걸”이라고 칭했고,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완강한 혁명가”[각주:1]라고 불렀다. 엠마의 연인인 알렉산더 버크만이 철강왕 프릭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던 1892년, 각종 신문은 엠마를 “테러리스트”로 소개했다. 반면 운동권 후배들은 그녀를 두고두고 영웅시했다. 


하지만 엠마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녀의 가장 평범한 정체성에 녹아있다. 엠마 골드만, 그녀는 여자였다. 남성의 시선에 갇힌 얌전한 여성도 아니었고, 여성성을 제거한 채 남성을 흉내 낸 마초 여성도 아니었다. 생물학적 관점으로뿐만 아니라 사상으로도, 성(性) 관계로도, 라이프스타일로도 엠마는 지구상 유일무이한 ‘여자’였다. 어떤 남자보다 더 양기 넘치게 싸우면서도 엠마는 각 활동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표출했다.


엠마가 뉴욕에 온 것은 1889년, 20살 때였다. 엠마는 연고 없이 무작정 뉴욕에 와서는 아나키스트 솔로타로프를 찾기 위해 뉴욕 길거리를 헤맸다. 솔로타로프를 잘 알았느냐고? 아니었다. 뉴욕 주 뉴헤이븐에 살 때 그의 아나키즘 강의를 한 번 들은 게 다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엠마는 결국 솔로타로프를 길거리에서 찾아내고 아나키스트 커뮤니티에 성공적으로 가입한다. 그 후 엠마의 인생은 뉴욕에 단단히 뿌리내린다. 평생 친구이자 애인인 버크만을 만나고, 철학 사상과 문화와 언어를 무섭게 흡수했으며, 당시 아나키스트의 거장이었던 모스트에게 웅변술을 익혀 내로라하는 활동가로 거듭난다. 미국 전역으로 순회강연을 떠날 때나 <어머니 대지> 잡지를 출판할 때나, 뉴욕은 엠마의 부동의 아지트였다.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



도대체 무엇이 엠마를 뉴욕까지 오게 했을까? 그 당시 엠마는 지식이 일천하고 영어도 못하는 이민자 아가씨에 불과했다. 당연히 아나키즘이 무엇인지 공부할 기회도 없었다. 엠마의 자서전 <나의 삶을 살다(Living My Life)>를 보면 그녀가 어떻게 정치에 열정을 갖게 되었는지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바로 1886년 시카고에서 터진 헤이마켓 사태다. 여덟 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여덟 시간 노동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평화시위를 하던 중에 폭탄 테러에 휘말렸고, 테러의 주범으로 몰려서 결국 사형을 당하거나 투옥되었다. 17살의 엠마는 이 사건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했고, 이 고귀한 사람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설사 이런 계기가 없었더라도 엠마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헤이마켓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엠마는 벌써 고귀한 이상에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엠마를 의식화시킨 것은 바로 가족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태어났을 때부터 싸워야 했던 억압이었다. 폭력과 지나친 노동은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이외에는 존재 이유가 없다며 일갈하는 아버지를 견딜 수 없었다.


엠마의 첫 번째 봉기는 “오직 사랑만을 위해 결혼하겠다고 결연하게”[각주:2] 결심한 것이었다. 이것이 엠마가 미국에 오기로 결심한 최초의 동기였다. “미국에 가면 연애를 하고 연인을 만나고, 어쩌면 베라 파블로브나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각주:3] 그러나 “신세계 미국에서의 생활이 도망쳐온 세계에서의 생활과 그리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53쪽

을 때, 자유의 땅에서 자유연애로 선택한 남편이 성적 불구자인데다가 여느 다른 러시아 남자들처럼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자유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감수했던 헤이마켓의 아나키스트들처럼 엠마 또한 “자기 가족처럼 무기력한 삶을”[각주:4] 스스로 끊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설사 그것이 여자에게 ‘죽음’을 의미하더라도 말이다.


나의 집은 감옥이 되었다.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나는 붙잡혔고, 다시 아버지가 만든 사슬을 찼다. 페쩨르부르그에서 미국으로, 로체스터에서 결혼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는 반복되었다. 마지막이자 궁극의 시도는 로체스터에서 뉴욕으로 떠날 때였다.[각주:5]


집이라는 감옥을 떠났다. 이제는 엠마가 존경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제목을 따라 행동할 때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감옥이 아닌 ‘진짜 집’을 지어야 한다. 엠마는 이제부터 뉴욕을 무대 삼아서 다양한 ‘사생활’을 실험할 예정이었다.


물론 이 실험을 하는 동안 엠마는 자기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아나키스트였고, 따라서 아나키즘의 대의와 연결되지 않은 사생활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보다 정치적 포부가 부족해 보이는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남자나 낚으러 모임에 온다”[각주:6]는 모스트의 비아냥거림이 무색하도록, 엠마는 나날이 지성적으로, 투쟁적으로 변모했다.


그럼에도 엠마의 노선은 다른 남성 아나키스트와는 달랐다. 엠마에게 세상의 억압에 뜨겁게 분노하고 냉철히 성찰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가족의 부조리였다. 엠마는 사적 관계의 억압이 공권력의 탄압만큼이나 무자비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엠마의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사생활의 해방을 향했다. 성욕은 인간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을 경제적·정신적으로 구속하는 매개다. 그런데 사생활이라는 개념은 이 모든 부조리를 감춰버린다. 그래서 엠마는 선언했다.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 사적 관계와 공적 관계를 모두 일관된 원칙으로 살아가려는 투쟁”이 “아나키즘의 기본원리”[각주:7]라고. 따라서 진정한 아나키스트라면 ‘구속 없는 연애’부터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자유로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 곧 자유라는 말이 어림없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두뇌를 살 수 있지만, 아무리 돈이 많은 인간도 사랑을 사지는 못한다. 다른 이의 육신을 복종시킬 수 있지만, 아무리 힘이 센 인간도 사랑을 복종시키지는 못한다. 나라 전체를 정복할 수 있지만, 어떤 무기로도 사랑을 정복하지는 못한다. 다른 이의 정신에 족쇄를 채워 구속할 수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그렇다, 사랑은 자유다. 사랑은 그 자체로 신중하고 풍부하며 완벽하다.[각주:8]



n개의 사랑, n개의 부자유


어떤 아나키스트들은 사생활에 대한 엠마의 주장을 ‘여자 짓’이라며 얕보았다. 그러나 엠마는 자신의 여성성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았다. 사실 엠마의 동료들은 ‘여자 짓’ 덕을 많이 보았다. 엠마는 운동자금이 떨어질 때마다 재봉사, 마사지사, 조산사, 간호사, 심지어 (불발에 그치긴 했지만) 창녀로 취직해서 돈을 벌어왔다. 자신의 집을 24시간 오픈해서 가족을 대체하는 생활 공동체도 실천했다. 열 시간의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펍에 들려서 아나키스트들과 실컷 토론한 후, 집에 돌아오면 어중이떠중이 손님을 먹이고 재우는 게 엠마의 일상이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인 것을 알았을 때는 이 세상에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했고, 조카를 평생 가까이에 두고 살뜰히 돌보았다. 대의에 목숨 걸고, 걸핏하면 폭력을 부르짖으며, 예술을 부르주아의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남성 동지들에게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라며 대놓고 반박하기도 했다.

  엠마의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은 연애에서 화룡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연애의 화신이었다. 여성의 성욕을 긍정했을 뿐만 아니라 ‘필’이 꽂히면 여러 남자와 만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당시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질투는 부르주아나 갖는 추잡한 감정으로 인식되었는데, 엠마 덕분에 많은 남자들이 이 질투의 시험대에 올랐다. 대스승 모스트마저도 엠마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가정, 아이, 평범한 여성이 제공하는 보살핌과 관심”[각주:9]을 엠마에게서 얻을 수 없다며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아, 남자의 사랑이란 얼마나 쪼잔한가.


물론 엠마의 인생을 신화화해서는 안 된다. 엠마는 수많은 남자를 거느렸던 고고한 여왕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유연애를 주창한 최초의 사람이지만, 마찬가지로 자유연애의 패배를 맛본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파격적인 아나키즘 사상으로 무장하긴 했지만, 엠마는 연애를 하면서 보통 사람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사랑에 환상을 불어넣었고, 그 환상이 깨지면 타인을 비난하거나 스스로를 속였다. 혹은 애인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도 했다. 평생 남보다 연애를 몇 배로 열심히 했으니, 그 실패의 여파도 몇 배는 더 컸다.


엠마의 첫 번째 남자는 알렉산더 버크만이었다. 엠마는 버크만과 함께라면 사생활(연애)과 공생활(혁명)을 일치시키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엠마는 버크만이 감옥에 있었던 14년 동안 수발을 들었고, 위대한 혁명가에게 사랑받는 여성이라는 환상을 통해 자존감을 키웠다. 그러나 버크만이 출옥하자마자 환상은 깨졌다. 세월은 흘렀고 사랑의 열정은 식었다. 두 번째 남자는 버크만의 친구, 페쟈였다. 그는 선하고 섬세한 예술가였다. 엠마는 아나키즘 운동이 지나치게 남성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페쟈의 감수성에 투영시켰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대한 페쟈의 열정이 식자마자 곧바로 둘은 멀어졌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페쟈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를 받아 쓰긴 했지만 말이다. 세 번째 남자친구는 에드 브래디라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엠마에게 유럽의 문화를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에드는 엠마가 유럽 유학에 가 있는 동안 돈을 저축해서 신혼집을 사놓을 정도로 순정파였다. 그러나 뉴욕에 돌아온 엠마는 에드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며 차버린다.


가장 문제적 애인은 벤 리트먼이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창녀와 뜨내기일꾼들의 성병을 고쳐주는 의사로, 엠마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반했고, 리트먼은 엠마의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엠마를 미국 전역의 스타 아나키스트 강연자로 만든다. 그러나 리트먼은 사적인 관계에서 몹시 난잡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엠마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 엠마를 곤란하게 했다. 엠마는 처음으로 격렬한 질투에 빠져서 관계의 주도권을 잃고 벤의 페이스에 끌려 다니게 된다. 이 둘의 징한 인연은 십 년이나 이어진다. (벤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에서 더욱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아나키즘 깃발



‘정부’ 바깥에서 사랑하라


엠마의 맹점은 이것이었다. 여러 남자를 사랑하고 다양한 사랑을 실험해볼 용기는 있었지만, 그 욕망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를 통찰할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사랑은 쾌락과 번뇌를 동시에 선사한다. 젊은 엠마는 마음껏 사랑할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사랑으로부터의 자유’가 왜 필요한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엠마는 사생활의 해방을 실천한 아나키스트였다. 하지만 인과 관계는 거꾸로 일지도 모른다.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아나키스트였기에, 그녀는 이 격렬한 욕망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엠마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싱글’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다. 아나키즘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정부주의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정확한 어원은 ‘아나키,’ 즉 지도자가 없는 상태의 무질서 상태다. 지도자가 없을 때 비로소 개인의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된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꼭 정부(Government)만이 아니더라도 내 인생을 통치(Govern)하려 드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스템의 부조리한 압력일 수도 있고, 가족 관계에 숨어 있는 인습일 수도 있으며, 감정적 집착과 폭력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엠마는 답 없는 연애에서 헤맬 때조차 연애가 자신을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돈을 벌었고, 공부를 했고, 잡지를 발행했고, 파업에 나섰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고 컨트롤하려고 드는 ‘정부’는 과연 무엇인지 탐색에 나섰다. 


엠마는 한 강의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해서 말했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사랑이라는 것도 보잘 것 없”으니, “저마다 바라는 사랑을 가로막는 주변 환경을 바꾸라”[각주:10]

고. 연애(戀愛), 사모하고 아끼는 마음. 엠마의 말처럼 상대방을 진정 아끼는 방법은 우리의 사랑을 번뇌로 변질시키는 요인을 찾아내고 투쟁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좀 더 ‘자유로운’ 사랑의 환경을 가꿔주는 것은 아닐까. 엠마가 온갖 성공과 실패를 겪으면서 연마한 연애의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계속 이야기해보자!


글_김해완

  1. 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1>, 유강은 역, 이후, 2010, 467쪽 [본문으로]
  2. Emma Goldman, , Penguin Classics, 2006, p.11 [본문으로]
  3.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51쪽 [본문으로]
  4.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49쪽 [본문으로]
  5. Emma Goldman, , Penguin Classics, 2006, p.45 [본문으로]
  6. Emma Goldman, , Penguin Classics, 2006, p.25 [본문으로]
  7.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86쪽 [본문으로]
  8.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73쪽 [본문으로]
  9. Emma Goldman, , Penguin Classics, 2006, p.53 [본문으로]
  10. 재인용, 캔데이스 포크, <엠마 골드만 : 사랑 자유 그리고 불멸의 아나키스트>,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8, 17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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