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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뉴요커, 우주의 ‘그로테스크한’ 농담 : 스티븐 제이 굴드와 뉴욕

by 북드라망 2016. 12. 23.

뉴요커, 우주의 ‘그로테스크한’ 농담

: 스티븐 제이 굴드와 뉴욕



수소와 헬륨의 농담


지난달이었다. 천문학과 전용 랩(lab) 구석에 숨어서, 최순실 비선사태를 터뜨리는 네이버 기사면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갑자기 로즈 교수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우주의 98%는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헉, 딴 짓 하던 걸 들켰나? 얼른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다행히 로즈 교수는 나를 지나치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수소와 헬륨은 만물의 부모다. 빅뱅 이후 처음 만들어진 게 뭔지 아나? 수소와 헬륨이야. 수소와 헬륨은 서로 융합하면서 우주의 모든 물질을 만들어냈지. 지구를 먹여 살리는 태양도 결국 수소덩어리가 헬륨덩어리로 변신하면서 생기는 에너지다. 우주가 궁금한가? 네 몸의 30%를 차지하고 있는 수소에게 물어봐.”



그 순간, 내 의식은 지구 반대편에서 지구 대기권 밖으로 점프했다. 인간의 기원은 별 게 아니다. (물 컵 속 물에 잔뜩 녹아있는) 수소와 (코믹한 목소리 변조에 활용되는 헬륨 가스의) 헬륨이다. 그런데 왜 어떤 수소와 헬륨은 달라이 라마가 되고, 또 어떤 수소와 헬륨은 최순실이나 박근혜가 되는 걸까? 여기에는 무슨 우연이 개입한 걸까? 우주의 드라마를 관람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것처럼 어이없는 농담이 없으리라. 그날 밤, 독실한 티베트 불교신자인 남자친구에게 새로이 받은 지적 자극에 대해 말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 진지한 얼굴로 제안했다. “진심으로 이 문제에 답을 구하고 싶다면 출가를 하는 게 좋겠어. 네가 비구니가 된다고 해도 섭섭해 하지 않을게.”



지상 최고(最高)의 도시, 우주 최고(最苦)의 역설


이건 또 무슨 귀신 볍씨 까먹는 소리인가. 내 엉뚱한 관심을 인류의 오래된 영적 탐구와 병치시키다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예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방법과 태도는 다를지언정 출발하는 마음은 같다. 광활한 우주와 하찮은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사소한 트집 때문에 지지고 볶고 머리 쥐어뜯는 인간사가 이 무한한 물질세계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슬프게도, 남자친구처럼 내 ‘드립’을 진지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몇 명 없다. 이런 질문은 일상에서는 농담으로 취급당한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수소와 헬륨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나? 그런데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바쁘다는 뉴욕에서 처음으로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 흙이라고는 없고 오직 인간으로만 가득 찬 맨해튼 한복판이야말로, 노바디(Nobody)가 된 기분으로 자연의 드라마와 교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제국주의 500년 동안 세계를 휩쓸었던 유럽 근대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몇 천 년의 문화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는 무상함이었다. 뉴욕을 최고의 ‘모던 도시’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무장해제의 힘이다. 누구나 뉴욕에 도착하는 순간,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던 문화나 생활방식이 갑자기 존재 이유를 잃는 경험을 한다. 뉴욕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법칙이 없다. 모두들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살고, 스스로에 대해 걸었던 필연적인 기대는 의미가 사라지며, 관습적인 인간관계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신의 무장해제가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한낱 인간,’ 호모 사피엔스 종(種)에 속한 내 몸이다. 호흡, 박동, 땀, 눈물, 체취다. 이 생물학적 토대 위에서 뉴요커는 자유를 외친다. 인종차별을 당하면 분노하고, 홈리스에게 관대하며, 인습에서 벗어난 모험과 사랑을 한다. 누구나 공평하게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발한다. 모두가 ‘한낱 인간’이라지만, 현실이 모두에게 똑같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내 이민자 2세 친구들 중 일부는 자신이 “뉴욕에 갇혔다”고 말한다. 왜일까? 뉴욕에 온 것은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의 선택은 그 다음 선택을 제한하고, 또 다시 제한하며, 그렇게 삶이 흘러간다. (그 제한이란 대체로 생존 노동, 학비 걱정, 싱글맘/싱글대디, 가족 부양 등등이 되겠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미친 듯이 빠르게 돌아가는 뉴욕의 자본 회로에서 탈주하기 힘들다.) 그들에게 가장 괴로운 것은 뉴욕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는 이방인이다. 나(이방인)의 존재는 내 친구들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들도 원래는 뉴욕 바깥에서 왔으며, 그들의 뉴욕 인생은 우연에서 태어난 산물이었다는 것을.


모던modern_어쩌면 감옥

밀란 쿤델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토마시가 왜 하필이면 테레자가 자신의 연인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대목이 있다. “그로테스크한 여섯 우연에서 태어난 그 여자.”[각주:1] 이것이 바로 뉴요커가 뉴욕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리라. “자연은 우리의 욕망과 열망, 꿈과 희망에 무관심”[각주:2]한 것처럼, 욕망의 도가니인 뉴욕도 내 꿈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의 존재는 이 도시에서 철저하게 스쳐가는 우연이다. 이렇게 존재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인데 삶은 참아야 하는 무거움이다. 이것을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우주적 역설’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칠까?


우리는 쉽게 도시-자연의 이분법에 현혹된다. 도시는 인간의 룰이 지배하는 곳이며, 우주에서 태양을 살리는 것이 수소더라도 뉴욕에서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뉴욕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뉴요커의 삶을 울고 웃고 가슴 아픈 휴먼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자연의 우연성이다. 수소가 내가 되고 내가 뉴욕이 되는 우주의 우연적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 푹 빠졌던 뉴요커 과학자가 있다. “그로테스크한 우연”이 개인에게는 희극 혹은 비극이 되지만, 생명 전체에게는 경이라면서 긍정했던 사람. 바로 스티븐 제이 굴드다.



“나는 상륙했다(I Have Landed)”—여섯 번의 우연 끝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에세이집 제목은 『나는 도착했다』(I Have Landed)이다. 이 에세이의 서문에 그는 이 제목이 어디서 오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가 영문법 책에 쓴 문장이다. 헝가리에서 어머니(굴드의 증조할머니)와 두 남매와 함께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는 앨리스 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14살이었다.  “나는 상륙했다(I have landed). 1901년 9월 11일.”[각주:3]


좀 이상한 문장이다. 상륙했다는 행위는 딱 한 번 일어나기 때문에 일반과거형을 썼어야 한다(I landed). 저 문장은 도착이라는 사건이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게 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파파 조(굴드가 외할아버지를 부르던 애칭)가 14살에 뉴욕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사십 년 후에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사람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스티븐 제이 굴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독자는 <나는 도착했다>라는 에세이조차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 년도 더 넘은 이 ‘도착 사건’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피와 글을 타고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굴드는 가족력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 지속성과 우연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지속성에 통렬함을 느낀다. 가족의 무언의 약속에 대해 우리가 얻은 하찮은 깨달음이 더욱 거대한 생명의 길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며, 단어나 눈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깊다는 의미로 [이 느낌이] ‘옳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왜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곁가지의 가장(家長)이 이 곁가지가 새 땅에 도착한 지 되는 100년째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잠시 멈출 때조차, 이러한 생명의 시선은 멈추지 않으며 심지어 더 앞으로 나아간다.”[각주:4]


굴드는 생명의 지속성을 야구에서 연속으로 성공해야 하는 “스트라이크 승율”[각주:5]에 비유한다. 매 세대마다 스트라이크를 쳐내야 그 다음 세대가 가능하다. 개체의 생존은 종(種)의 우수함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야구 선수라도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승율을 유지하려면 매번 패배할 확률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우연이 개입한다. 우연은 그저 그런 타자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고, 에이스를 패배시키기도 한다. “이 문제적인 세상에서 부서지지 않는 지속성”[각주:6]을 짊어지고 가문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나’는 도대체 몇 번의 우연의 호의를 받은 것인가? 가족력을 들을 때의 감동은 여기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패러디해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 여섯 가지 “그로테스크한 우연”을 세어보자. 우연 하나. 하필이면 파파 조가 헝가리에서 뉴욕 항구에 상륙한다. 우연 둘. 하필이면 파파 조가 의류 사업에 성공하여 집안이 안정된다. 우연 셋. 하필이면 뉴욕에 자연사 박물관이 있어서 외손자 스티븐이 다섯 살의 나이에 고생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우연 넷. 하필이면 그때 시기가 1960년대여서 대학생 스티븐은 미국 역사상 최대 시민 운동에 흠뻑 빠진다. 우연 다섯. 하필이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연재할 기회를 얻어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우연 여섯. 하필이면 악성 종막 복피종이라는 불치병에 걸려서 8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는 20여년을 더 살았다. 이렇게 굴드가 상륙했다(Gould has landed). 그리고 마지막 에세이에 외할아버지의 말을 빌려 스스로 상륙했다고 쓴 지 일 년 후, 그는 세상을 떠난다.


이 우연의 우연을 거듭해서 무엇이 나타났는가? 영웅? 이렇게 결론을 내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 전기가 될 것이다. 앞서 나열한 우연들은 필연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곱 번의 우연이 이 세상에 전달한 것은 ‘평범한 뉴요커’였다. 한 평생 뉴욕 양키즈 팬으로 살았고, 음악을 좋아해 종종 합창단 콘서트를 들으러 갔던 배 나온 아저씨. 굴드는 “아이는 남자의 아버지”[각주:7]라면서 뉴욕에 뿌리를 내린 어린 시절이 자기 평생을 지배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물론, ‘평범한 뉴요커’라는 타이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25년 동안 『내셔널 지오그래피』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대중 과학 에세이를 썼고, 진화론계의 황태자 리처드 도킨스에 전면 대항하는 새로운 진화 이론을 세웠던 사람을 두고서 어찌 평범하다 하겠는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마스터했고 그 바쁜 와중에 인문학 영역까지 부지런히 섭렵한 사람이 어찌 그냥 배만 나온 아저씨이겠는가. 굴드는 굴드 가(家)의 “왜소하고 별 볼 일 없는 곁가지” 끝에서 피어난 아주 탐스럽고 명민한 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람에게 ‘뉴욕의 전무후무한 과학자’처럼 낯 간지러운 타이틀을 내어줄 수가 없다. <뉴욕과 지성> 시리즈를 연재할 때는 각 작가가 뉴욕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 캐릭터를 포착하려고 한다. 그런데 굴드의 에세이를 읽으면 이런 느낌이 강력하게 받는다. 나를 그 ‘어떤 사람’으로도 소개하지 말라! 굴드는 자신의 일상을 곧잘 과학 에세이의 소재로 써먹지만, 정작 그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부여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 줄거리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는다. 마치 “인류는 경향을 찾는 동물”[각주:8]이라는 사실을 매번 기억하면서, 자기 인생에서도 사실과 꾸며낸 경향을 혼동할까봐 조심하는 것만 같다. 참으로 자연학자다운 태도 아닌가. 자의식을 덜어내고 스스로를 자연이 쏜 ‘우연의 화살’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 없이, 뉴욕의 다른 이웃들처럼 ‘어쩌다보니 이 도시에 상륙한 뉴요커’로 남아있고자 한 것이다.


우연을 뼛속까지 끌어안는 그의 태도가 결국 그를 죽음에서 구한다. 40대에 악성 종막 복피종에 걸리고 자신에게 남은 삶이 ‘통계적으로’ 8개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이것을 농담으로 여긴다. “평균값과 중간값은 추상이다.”[각주:9] 8개월이 평균 생존기간이라면, 살아있는 세계에서는 8개월이 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이후까지 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연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모른다. 이런 불멸의 긍정성 덕분이었을까? 그는 8개월을 꿋꿋이 넘기고 60대까지 굳건하게 살았다.



마하타나와 원더풀 라이프


굴드는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뉴요커이며,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리는 왜소하고 돌발적인 진화의 곁가지”[각주:10]에 늘 관심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순수 과학 이론 자체보다는, 인간이 과학을 통해서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역사를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다는 것이다.


결코 텅 비어있지 않은 세계

굴드가 자연을 바라볼 때 강조하는 키워드는 다양성과 우연성이다. 굴드가 뉴욕 출신이니, 뉴욕의 다인종/다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자연의 다양성을 찬양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과관계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굴드는 뉴욕의 다양성이 얼마나 피상적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마담 자넷’이라는 에세이에서 어설프게 내세워진 다양성을 훌륭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돌려서 말한다.) 그에 반면, 자연의 다양성에 비하면 뉴요커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뉴욕의 다양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연은 인간이 인식할 수조차 없는 스케일로 30억 년 동안 생명의 다양성을 하나로 품어 왔다. 우연성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창발과 멸종을 반복해왔던 자연의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생은 굴곡도, 다이내믹한 변화도 거의 없다. 그로테스크한 우연이라는 타이틀을 따기에는 너무나 자격미달이다.


실제로 마하타나는 맨해튼보다 훨씬 더 위대한 땅이었다. 15세기에 백인들이 상륙하기 전까지 뉴욕에 살았던 레나페이(Lenape) 인디언은 이 섬을 마하타나고 불렀다. “만일 맨해튼이 원래 모습대로 오늘날 존재했다면, 이곳은 국립공원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 국립공원의 왕관을 쓴 영광이 되었을 것이다. 맨해튼은 에이커 당 옐로스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생태적 커뮤니티를 갖추었고, 그레이트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보다 더 많은 종류의 새들이 살았다.”[각주:11]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하타나에서 맨해튼으로의 변화는 ‘신대륙 발견’이 아니라 ‘쇠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다양성 위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을 이해할 때에야 인간의 특이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 종의 특이성을 이해할 때에야, 우리는 인간 사이의 다양성도 인간 생의 무상함도 정말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연과 문화의 영역을 완전히 동급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굴드는 <풀하우스>에서 생명의 진화와 문화의 진화가 다른 궤적을 그린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인류의 문화적 변천은 생물의 진화와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 진행된다. 그것은 진보라고 불러도 좋은 어떤 것을 향한 조종된 경향의 존재를 생각해도 좋은 과정이다.”[각주:12] 그러나 우리는 늘 양쪽에 다 발을 걸치고 있다. 그러니 그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고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가 펼쳐졌던 마하나타 섬에 느지막이 들어온 세입자로서, 자연에게 영감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쯤은 괜찮을 것이다.



생존이라는 뻘짓, 그리고…….


로즈 교수는 수업 첫 시간에 말했다. 천문학이 뭔가? 우주를 다루는 학문이다. 우주란 뭔가? 세계다. 아니, 니네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걸 포함하고도 남는 더 큰 세계다. 그 우주는 과연 어디 있을까? 바로 너희 속에 있다. 우주가 모든 것이라면, 너희도 우주인 거지.


우주가 정말 내 몸 따위에 있을까? 학교 숙제에 쫓기고, 마감일에 쫓기고, 때로는 먹고 설거지하는 것도 귀찮아하며 살고 있는데? 우주가 모든 것이라면 일상 역시 우주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취하는 절박한 몸짓은 우주의 입장에서는 물질-복합체가 벌이는 ‘뻘짓’ 중 하나일 것이다. 고로, 뉴욕에 산다고 해서 자연과 격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자연의 ‘이미지’에서 멀어졌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운동’에 속해 있다. 그러니 자연에게 질문을 던지자. 의미 없이 존재하게 된 것의 의미와 지구에서 수십 억 명 중 한 명으로 살게 된 것의 의미를. 다음 호에서는 뉴요커 굴드를 따라서 이 탐사를 자세히 떠나보고자 한다!


글_김해완

  1. 밀란 쿤데라, 이재룡 역,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3 386쪽 [본문으로]
  2.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김동광 역, <과학과 휴머니즘>, 현암사, 8쪽, 2016 [본문으로]
  3. Stephen Jay Gould, 인용자 역, (Kindle), ‘I Have Landed,’ Location 26 [본문으로]
  4. Stephen Jay Gould, (Kindle), ‘I Have Landed,’ Location 298~302 [본문으로]
  5. Stephen Jay Gould, (Kindle), ‘The Streak of Streaks,’ page 471 [본문으로]
  6. 같은 책, 같은 쪽 [본문으로]
  7. 같은 책, ‘Prorogue,’ 12쪽 [본문으로]
  8. 스티븐 제이 굴드, 이명희 역, <풀하우스>, 싸이언스북스, 114쪽, 2010년 [본문으로]
  9. Stephen Jay Gould, (Kindle), ‘The Median Isn’t the Message’ page 476 [본문으로]
  10. Stephen Jay Gould, (Kindle), ‘Prologue,’ page 13 [본문으로]
  11. Eric W. Sanderson, , Abrams Books, Location 69, 2009 [본문으로]
  12. 스티븐 제이 굴드, 이명희 역, <풀하우스>, 싸이언스북스, 306쪽, 2010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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