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마션』 - 살아 돌아와줘서 고마워 / or 사람의 소용

『마션』 

- 살아 돌아와줘서 고마워 / or 사람의 소용 


마크 와트니, 엄격히 선발되어 치열하게 훈련받은 우주비행사. 식물학 및 기계공학의 학위가 있으며, 시카고 어딘가 있을 미국식 유머 학원 졸업생 명부에도 틀림없이 이름이 올라가 있을 것 같은 사람. 낙천주의자. 디스코혐오자. 70년대 TV드라마 강제시청자. 화성탐사 도중 모래폭풍에 날려 복부에 막대형 안테나가 꽂힌 채 홀로 남겨져버린, 아마도 태양계 생성 이래 유래가 없을 역대급 불운아. 이것은 아마도 본 중 가장 극단적인 재난 스토리일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최소한 멀쩡히 두 발로 선 채 호흡곤란으로 죽을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와트니는, 마실 물은커녕 공기마저도 호락호락 얻기 힘든 곳, 반경 5,460만 km 이내에 다른 생명체라고는 없는 곳에 덩그마니 남겨지는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소설 『마션』을 열며 와트니가 내뱉은 첫 마디를 어떻게 책망할 수 있을까. “좆됐다”.

 


응, 그렇네. 

우리는 동정적으로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다. 


영화로 먼저 본 작품을 소설로 읽을 때의 단점은 불필요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독서에 난입한다는 것이다. 콘텐츠 외적인 맥락이 너무 많이 흘러들어와,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감상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마션』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맷 데이먼이었다. 영화 때문에 나는 마크 와트니를 맷 데이먼의 얼굴로밖에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맷 데이먼이 해석하고 연기해낸 버전의 마크 와트니에게는 아무 유감이 없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마크 와트니의 모습에는 조난당하고 구출받기 전문 배우로서의 맷 데이먼의 필모그래피가 젖은 신문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랬다- 맷 데이먼은 유난히 자주 ‘구출’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개인적인 레벨의 구원이 아닌, 대대적인 물적, 인적 공세를 통해서.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아차린 미국의 어느 네티즌이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들이 맷 데이먼을 구하기 위해 들인 비용을 산출해낸 적이 있는데, 그 총합이 무려 $900,100,500,000'(약 1050조 1,200억 원)이라는 기사가 나기도 했었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인터스텔라』)에서 맷 데이먼이 연기한 역할은 『마션』의 와트니와 거의 판박이에 가깝기까지 했다. 거기에서도 외계행성에서 홀로 구조를 기다리는 우주비행사 역할로 나왔던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이 남자는 20년 전의 대작,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그’ 라이언 일병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맷 데이먼의 얼굴은, 국가가 나서고 대중이 응원하는 구출 속에서 20년간 뼈가 굵어온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만했다. ‘온 우주가 응원하는‘ 거대한 구조 작전의 반복적 수혜자. 



덕분에, 읽는 내내 머리 한켠에 어른거린 건 ‘한 사람을 구출한다는 것의 의미’였다. 

단 한 사람을 살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전쟁으로 수만 명이 죽어나가고, 가정폭력으로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에, 머나먼 화성에 덜렁 떨어진 미국인 하나를 구하기 위해 전 지구가 의기투합한다는 건 대체 뭘까. 그가 중요한 사람이어서? 그가 소용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는 장군도 고관대작도 아닌 아닌 그냥 일병 라이언이거나, 또는 평균 이상 영리하긴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천재라고까지 할 수도 없는 나사의 우주인이었다. 정말,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런 물음이 생각난다. ‘한 명의 천재와 백 명의 범상한 사람들. 그중 당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이제 한 명 또는 백 명, 둘 중 한쪽만을 살릴 수 있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릴 때부터 이런 류의 딜레마 문답을 접할 때마다 매번 처음인 양 치열하게 골머리를 앓았었다. 답은 그때그때 바뀌곤 했지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 인류 공영에 이바지(국민교육헌장)’ 한다는 신념에 영혼을 불사르던 어린 시절에는 그 천재(과학자)를 살려야 한다고 결론내릴 때가 많았고, 일종의 탐미주의자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탐닉하던 사춘기 시절에도 역시, 그 천재 (예술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교육의 탓이건 문화의 탓이건 아니면 그냥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였건 간에, 나는 정말 ‘소용’에 천착하는 인간이었다. 나는 소용의 절대가치를 믿었던 것 같다. 하나하나의 값을 견줄 수 있는 소용. 평범한 삶 백 개와도 맞바꿀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소용. 예술을 위한 소용, 과학을 위한 소용, ‘인류’를 진보시키는 위대한 소용. 

그런데 정말, 그건 다 뭘 위한 소용이었을까. 


“이번 구조 작전의 비용과 관련해 특별히 정해놓은 상한선이 있습니까? 일부에서 적정 상한선이 어느 정도인지 의문을 제기하더군요.”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닙니다. 지금 한 인간의 목숨이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금전으로 환산하고 싶다면 마크 와트니의 임무 연장이 갖는 가치도 고려해야겠죠. 그의 임무와 생존투쟁이 연장되면 우리는 화성에 대해 아레스 프로그램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니까요.” (p300, 제 15장)


나사 홍보팀에서 공식적으로 말한 구조작전의 소용은 이와 같이 설명되지만, 책속의 기자들은 물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저게 그저 공치사일 뿐이라는 걸. 매끄럽게 말이 되는 이유를 제공해주는 것일 뿐, 사람들이 정말 마크 와트니가 얻어올 화성에 관한 전문 지식에 신경쓰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겨우 나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략) 그렇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내가 진보와 과학, 그리고 우리가 수 세기 동안 꿈꾼 행성 간 교류의 미래를 표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p597)  


와트니도 그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이렇게 피력한다. 이러한 설명은 일견 좀 단순하고 순진해보인다. 앞바다에서 재난 당한 수백 명의 국민조차 구하지 않는 국가, 피해자를 외면하고 오히려 탄압하는 ‘평범한 이웃들’을 목격한 기억이 있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이유가 대략 76%의 인구에 한해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점 어느 특정 정당의 지지율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고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다. (이것도 어느 특정 정당의 지지율에 근거한 판단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인간이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보험회사의 지급액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금전으로 환산하면 사람 목숨 값, 사실 생각만큼 엄청나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조차 이미 죽은 연후의 책정 아닌가. 아직 산 사람에 관한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환산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조차 천인공노할 패륜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확실히 인간의 소용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소용’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와트니의 설명대로, 우리는 타인을 도우려는 본능 때문에 그들을 구한다. 그렇지만 그런 본능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와트니가 훈련기간을 회상하는 씬에서 나는 그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이 훈련을 위해 우리는 무려 3일 동안 MAV 시뮬레이터에 갇혀 있었다. 원래 23분간 비행하도록 설계된 사승선 안에서 여섯 명이 3일을 버틴 것이다. 꽤 비좁았다. 여기서 ‘꽤 비좁았다’는 말은 ‘서로를 죽이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들과 다시 한 번 그 비좁은 캡슐 안에 갇힐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다. (p178, 일지기록 93 화성일째)


긴 화성 체류 시간동안 와트니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서로를 죽이고 싶었던 순간조차 그리워할 정도로 그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저, 사람을. 그가 촌스럽다고 끔찍해 하면서도 70년대 TV 드라마 시리즈를 계속해서 반복해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죽이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외로운 화성살이에서 사람을 느낄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해 굳이 소용의 층위에서 풀이하자면, 타인의 소용은 존재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다시 소용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살아있어 줌 그 자체가 소용이라는 이야기. 그리하여 우리는 아주 먼 곳의 생면부지의 누군가, 팔레스타인의 꼬마, 화재 난 런던 빌딩의 할머니, 배가 침몰한 뒤 구명정과 함께 행방불명된 선원들, 먼 적지에 남겨진 일개 새파란 일병과, 제 똥으로 감자나 키워먹는 능청스럽고 경박한 화성의 미국인까지, 모두가 살아 우리 곁으로 돌아가길 기도하며, 종국에는 기묘한 인사를 위화감 없이 보내게 되는 것이다. “살아 돌아와줘서 고마워.”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의 이 유쾌한 소설이 가진 묘미는, 마치 넓게 펼쳐진 사분면 위를 돌아다니며 난이도가 중구난방인 퀘스트를 수행해나가는 것과 같은 재미입니다. 아주 지능적이고 이공계스러운 버전의 방 탈출 게임이랄까요. 와트니에게는 계속해서 해결해야할 과제가 주어지고, 하나하나가 절체절명의 중요성을 갖습니다. 지극히 한정적인 자원, 제약이 많은 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다름 아닌 그의 머리죠. 화학, 식물학, 기계공학, 프로그래밍 기술과 상식적인 레벨의 식품영양학까지, 그가 다루는 지식은 아주 광범위하지만 대개가 비교적 기초적인 수준입니다.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해 하나하나의 퀘스트를 돌파해나가는 그의 문제해결능력은 옛날 미드 속 임기응변의 달인 맥가이버가 울고 갈 정도에요. 


이를테면 일반적인 소설에서라면 주인공이 물을 구하기 위해 먼 데 떨어져있는 보급품이라도 찾으러 길을 떠났을 순간에, 와트니는 물의 분자식을 떠올리고 기지에 머물며 뚝딱뚝딱 산소와 수소를 결합해 물을 ‘만들어’내는 식이죠. “나에게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있으니, 이로써 수소를 만들어 물을 생성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 소설의 어떤 대목들은 아주 미시적인 재고관리에 관한 지침서로 읽기도 했습니다. 가진 것을 어떤 수준의 세부까지 파악할지 판단하라. 막막할 땐 가만히 해상도를 높여라! 그러니까, 가진 게 별로 없을 것 같은 상황이라도, 엄밀하게 따져들어가보면 별 걸 다 보유할 확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고 한다면, 글쎄, 제가 너무 많이 나간 걸까요? :P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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