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할 클레멘트, 『중력의 임무』 - 이질성과 함께 가기

할 클레멘트, 『중력의 임무』  

- 이질성과 함께 가기 



수년 전의 일이다. 부모님과 함께 가까운 동남아시아로 삼박 사일의 패키지 여행을 떠났다. 멀지 않은 나라였지만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사진으로나 보던 풍광은 실제로도 아름다웠고, 음식은 맛있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더운 날씨 속에 개발도상국다운 투박함이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나는 그 나라의 이런저런 면모들이 그것대로 좋았다. 낯선 고장으로의 첫 여행이라는 건 언제나 그랬다. 막연한 호감으로 다가가, 상상하고 짐작하기만 하던 진면목들을 가볍게나마 엿보고, 좀 더 깊어진 이해와 친밀감을 얻어 돌아오는 것. 여태까지의 다른 여행들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제 내 생에 직접적인 관계가 생겨난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자주 찾게 될 수도 있었다. 그 여행이 그렇게 불쾌하게 기억되지만 않았더라면. 



임땡땡 씨는 우리 패키지 팀의 인솔자였다. 일 때문에 그 나라에 집을 두고 3년째 살고 있다는 그는 중키에 몸이 마른, 얇은 안경 너머 부리부리한 눈을 가늘게 뜨고 다니는 40대 초반의 한국인 남성이었다. 패키지 여행의 특성상 막무가내로 이상한 고집을 피우거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임땡땡 씨는 누구에게나 참을성 있게 귀를 기울이고 임기응변으로 대처도 잘 했다. 좀 닳은 듯한 노련한 일솜씨에는 권태로움이 배어있었다. 또 그는 상당한 달변이어서, 전세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추임새를 곁들여 감칠 맛 나게 설명을 시작하면 어느새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내 여행을 망친 주범이었다. 


전세버스의 운전사와 보조 가이드는 현지 사람들이었다. 둘 다 체구가 작고 까무잡잡했고, 동그란 눈을 짜부라뜨리며 선하게 웃었다. 좀 더 통통하고 나이가 있는 편인 운전사는 간단한 우리말 인사말을 할 줄 알았고, 어리고 싹싹한 보조 가이드는 한국어를 상당히 잘했다. 그런데 임땡땡 씨가 그 사람들을 대할 때의 태도는 한국인 고객들을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은 상사가 부하직원을 대하는 태도조차 아니었다. 그는 무조건 반말을 하고, 걸핏하면 무시하고, 험악하게 타박을 주고, 함부로 굴었다. 오랜 시간 당해왔던 탓인지 두 사람은 무덤덤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좌불안석이 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정말 끔찍한 순간은 면대면으로 그들을 막 대할 때가 아니었다. 한국말에 능숙한 최소한 한 명의 현지인이 송두리째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땡땡 씨는 가이드를 할 때마다 그 나라 문화를 욕하고, 그 나라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 나라의 역사를 폄하했다. 삼박사일의 여행기간 내내.   


‘이 나라 사람들은 미개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열등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수준이 낮아서.’ 

‘이 나라 사람들은 작고 못생겨서.’

‘이 나라 사람들은 비열하고 천박해서.’ 


결국,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전제는 그거였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잘난 우리 같지 않아서.’ 


그는 터무니없는 민족적 우월감을 통해 사람들과 공감대를 이루려고 하고 있었다. 현지생활 3년차의 생생한 경험담을 빙자한 그의 우월적 민족관은 무구하던 관광객들의 마음에 독을 탔다. 호감 어렸던 호기심은 막연한 멸시 속에 희석되어 가고, 치우침 없이 중립적이던 관찰에는 기우뚱한 편견이 얹어졌다. 임땡땡 씨는 끊임없이 이런 것들을 주워섬겼다. 저들이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박정희, 우리의 새마을운동, 우리의 근면함, 우리의 유능함, 우리의 탁월함. 흐뭇함에 젖어 점점 더 턱을 높이 치켜드는 어르신들에 둘러싸인 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볼륨을 크게 올려 그 못된 장광설을 차단하는 것밖에 없었다.



소설 『중력의 임무』 를 읽는 동안 나는 왜 그때 그 여행을 떠올렸을까. 이 이야기 속 인물들간 구도가 임땡땡 씨와 현지인 가이드가 맺은 협력 관계를 연상시켰기 때문일까. 하나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토착종족과 외래종족이 힘을 합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상통하는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두 풍경이 안겨주는 인상은 더 이상 차이나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그건 물론 야자수나 해먹이나 알록달록한 전통복식의 유무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중력의 임무』 는 외계의 먼 행성 메스클린에서 두 종족이 함께 하나의 까다로운 과업을 완수해내는 과정을 그린다. 한쪽은 외래 종족인 인간이고, 다른 쪽은 토착 원주민인 메스클린 인이다. 배경인 메스클린은 분당 20도 이상 자전하여 하루 길이가 17.75분밖에 되지 않는 행성으로, 일반적인 구형이 아니라 가운데가 살짝 솟은 납작한 팬케이크처럼 생겼다. 적도 지방의 중력은 지구의 3배밖에 되지 않지만, 극지방에 이르면 700배에 이른다. 바로 그 극지방에, 인간 우주탐사단이 보낸 무인 로켓이 불시착하고 만 것이 사태의 시초였다. 귀중한 탐사정보가 잔뜩 실려 있었기 때문에, 탐사단은 그 로켓으로 자료를 회수하러 가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 행성의 중력이었다. 과학기술력 덕분에 메스클린의 적도 지방 정도에서는 힘겹게라도 체류하는 게 가능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극지방 여행은 어불성설이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건 그 무시무시한 중력을 견딜 수 있게끔 진화한 메스클린 원주민 종족뿐이다. 외진 ‘가장자리’ 지역까지 항해해 왔다가 인간과 우연히 접촉하게 된 무역선 선장 발리넌이 모종의 거래를 통해 그 과업에 동참한다.   


고도의 중력 때문에, 이 행성의 모든 낙하하는 물체는 끔찍한 파괴력을 갖는다. 그 때문에 이곳의 거주자들은 ‘높이’에 대해, 몸 위로 물체가 드리워지는 것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공유한다. 그들은 수직의 공간을 모른다. ‘솟는다’는 건 위험한 것이며, 높이를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는 애초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문명에서도 도시를 건설하지만, 거기에는 5cm 이상 올라가는 건축물이 없다. 즉 메스클린 인의 세계는 거의 2차원적으로 납작하다. 이를테면 그들 자신의 신체처럼. 




그렇다. 그들의 신체는 지상 5cm 이상의 높이로 솟지 않는다. 그 높이 이상을 보지도 못한다. 책등에 인쇄된 작은 전갈 그림에 이미 힌트가 담겨있다. 메스클린 인은 딱딱한 키틴질 껍질로 둘러싸인 납작한 애벌레의 외양을 하고 있는 종족이다. 길이 약 40센티미터, 몸통 지름 5센티미터, 수많은 다리와 앞으로 내민 집게발을 지니고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기어 다니는 존재. 말하자면 그들은 ‘벌레’다. 지능과 언어와 문명을 가진 발 많은 벌레.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외양, 한참 뒤떨어진 문명, 인류가 별과 별 사이를 항행하는 우주선을 만들고 멀리 더 멀리 탐사단을 보낼 동안, 그들은 과학도 모르고 사물의 작동 원리도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행성조차 제대로 다 탐색하지 못한 상태다. 여행가이드 임땡땡 씨가 탐사단의 일원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메스클린 인들이 ‘미개하고’, ‘열등하고’, ‘수준이 낮다’고 규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 비해 얼마나 우월한지에 관하여 입으로 똥을..., 아니, 논문을 써댔겠지. 


『중력의 임무』  속 지구인들이 임땡땡 씨와 천양지차로 달랐던 건 바로 그런 태도였다. 외래 문명과 메스클린 문명의 발달 수준 차이는 너무나 확연해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vs 동남아 그 나라의 구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못생기고 잘생긴 걸 논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생김새도 서로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사단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임땡땡 씨 같지 않다. 그들의 언동과 행동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건 멸시와 무시와 무례가 아닌, 정중하고 사려 깊은 존중이다. 즉 이 관계에서 우열의 구도는 없다. 선명한 이질성의 대비가 있을 뿐. 


그것이 인성의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 탐사단 사람들이 인격자 순으로 선발되지도 않았으려니와, 동남아 패키지여행팀도 인성 나쁜 순으로 구성된 게 아니다. 임땡땡 씨는 차치하더라도, 그 우월감 젖은 발언들에 흥겹게 동조하던 패키지여행팀 어르신들이 하나같이 고약한 심성을 타고 났을 리는 없지 않은가. 판이하게 다른 외계의 문명과 접촉하고 동등하게 협력하는 경험이 풍부한 탐사단 사람들은, 아마도 임땡땡 씨와 패키지여행팀 어르신들이 잘 모르는 중요한 것을 학습해냈을 것이다. 전혀 다른 환경, 다른 역사, 다른 여건 속에서 다른 경험을 쌓으며 나름의 최선으로 살아온 타자를 한 톨 티끌같은 지구의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용한 일인지를. 


이질성을 인정하고 전제하는 태도가, 동일한 성격의 협업에 대해서도 얼마나 다른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먼 이계의 별을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세밀한 전개도처럼 찬찬히 짚어준다. 물론 나름의 이유와 합리성을 띤 자기만의 기준을 내려놓고서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유념하기라도 하면 적어도 임땡땡 씨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순 있겠지. 




『중력의 임무』 는 ‘고전’으로 꼽히는 하드SF 소설입니다. 1954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낡은 느낌은 많지 않아요. 작가 후기를 읽어보면, 저자인 할 클레멘트가 철저한 과학적 고증을 통해 물샐 틈 없이 논리 구조를 쌓아올리는 것을 마치 독자와의 퍼즐놀이인 양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농후합니다. 게다가 소설 여기저기에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다운-할 클레멘트는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쳤다고 해요- 친절하고 세세한 과학적 설명이 다양한 분야를 커버하며 흩뿌려져 있어서, 『소설로 읽는 서양철학』  류 교육서의 어설픈 과학 버전을 읽느니 이 책을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지요. 화학, 천문학, 물리학, 기상학, 생물학 등등. 


진입장벽이 높다는 평이 많습니다. 하드SF 특유의 지적 부담감뿐 아니라 도입부 100여 페이지의 불친절한 특성이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딱 펼쳤다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기 딱 좋은 거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화를 중반 이후 보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이 든달까요. 여기는 어딘지, 쟤는 누구인지, 얘랑 쟤는 어떤 관계인지, 이건 지금 무슨 상황이고 이 맥락에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건 무슨 뜻인지, 독자는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마구 헤매고 있는데 소설은 그런 당혹감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내 알 바 아니라는 양 무심히 앞으로 쭉쭉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할 클레멘트의 후기대로 ‘퍼즐 맞추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도 일단 떨어져있는 조각들을 가만가만 모으다 보면 어느 순간 알아볼 만한 그림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리고 그 그림을 딛고 펼쳐지는 즐거움은 쉬 포기하기 아까울 정도로 커요. 그러니 모쪼록 더 많은 사람들이 초반의 어리둥절함을 잘 견뎌내길 바랄 뿐입니다. 


글_윰(SF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