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SF소설읽기] 화재감시원 : 기둥 뒤에 사람 있어요

화재감시원 : 기둥 뒤에 사람 있어요



“전쟁나면 어쩌지? 너무 무섭다. ㅠㅠ” 

엄마가 카톡을 보내오셨다. 그 짧은 한줄이 오고 잠시후, 어느 대화창으론가 전달받으신 게 틀림없는 길고 장황한 줄글이 따라붙었다. 엄마의 첫문장에 ‘ㅠ’ 모음 두 개가 붙어있지 않았으면 사실 그냥 안 읽고 넘겼을 것이다. 잘 안 쓰시는 모음 이모티콘이라니, 이건 정말로 겁이 나셨다는 뜻이다. 


스크롤을 위로 올려 처음부터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현재 정부와 언론이 숨기고 있는 한반도의 일촉즉발 상황, 국제 정세에 대한 자세한 해석, 향후의 전망과 시사점이 사뭇 비장한 어조로 설파되어 있다. 우리 우방의 군사전력, 향후의 전쟁 수순, 현재 트럼프의 속내까지, 이 글을 쓴 사람은 각종 숫자를 비롯해 모든 걸 전지적으로 다 알고 있었고, 한 마디 한 마디 확신이 넘쳐흘렀다. 우리 대통령이 지금 감옥에 계신 걸 몰랐다면, 나는 글을 쓴 사람이 우리 군 통수권자라고 생각할 뻔했다. 


텍스트 맨 아래 들어있는 링크를 찍어보았다. 블로그가 나온다. 방금 본 글은 카톡 용의 요약 버전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원본은 훨씬 길고 풍성하고 화려했다. 두어 줄 짜리 문단 하나마다 두세 개씩 들어가 있는, 사이즈도 들쑥날쑥한, 그러나 대체로 대문짝만한, 트럼프와 김정은과 항공모함과 미사일과 전투기의 이미지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오락가락하는 폰트 사이즈와 시커먼 볼드체와 시뻘건 볼드체와 요사스러운 이탤릭 기울임과 한번에 두 개! 세 개!!씩 찍힌 느낌표!!!의 향연!!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포스트 가득한 트로피칼한 색감, 쏟아져내리는 요설의 우렁참이 마치 열대 정글 한복판의 이과수 폭포같았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분은 나와는 미감이 굉장히 다르신 분이다. 나는 (또 무슨 흉한 걸 보게 될지 몰라 두려워 하며) 머뭇머뭇 스크롤을 올려서 프로필 부분에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거기에는 썬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태극기를 든 등산복 차림의 남자 분이 뭔지 모를 번잡스러운 배경 앞에서 찍은 옆모습이 박혀 있었다(아… 사진 수평도 맞지 않았다. 나야말로 ㅠ모음을 두 개 쓰고 싶은 심정이 들기 시작했다). 소갯말에는, 종북좌파 척결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카톡과 유튜브로 진실을 유포하는 데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애국보수’ 라고 적혀있었다. 외교안보통이라던가, 분쟁지역 전문 종군기자라던가, 아니면 국군통수권자라던가, 이 ‘트로피칼 이과수폭포’에 신빙성을 더해줄 직함이 어디 없을까 두번 세번 읽으며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프로필 영역을 뚫어지게 노려봐도 그런 단어들이 갑자기 생겨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직함이 없다는 게 큰 단점은 아니다. 빼어난 통찰과 분석력에 빛나는 무명의 필부필부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객관적인 데이터의 측면에서 그 글을 평가하고 판단할 여력도 나는 없었다. 전쟁 우려에 관한 외신은 나도 몇 개 보았고, 지인들의 불안해하는 포스팅도 목도하던 참이었으니, 출처 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해서 몽땅 픽션일 거라고 매도해버리기도 애매했다. 그러므로 사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치더라도, 나는 그 글이 확실히 나쁜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저씨가 썬글라스를 끼고 태극기를 흔들어서도, 프로필 사진의 수평이 안 맞아서도, 해상도 낮고 사이즈만 큰 사진들로 물량공세를 해서도, 글자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볼드를 빵빵 먹이고 폰트를 흉측하게 키우고 이탤릭 효과를 줘서도, 굴림체를 써서도 아니었다. 설령 한석봉처럼 정갈한 정자체로 써내려갔었대도 그 글은 여전히 나쁜 글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장밋빛 승리와 숫자와 영광으로만 꿈꾸고 있을 뿐, 그에 영향받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추호도 신경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큰 표상, 큰 은유, 거대한 사건의 타이틀 뒤로 하나하나의 사람을 지워버리는 것. 그 무신경한 태도는 참으로 시험을 앞두고 기계적으로 외우던 역사도감의 연표를 연상시켰다. 연표에 서너 단어로 요약되어 들어간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 사건이 함축한 모든 것- 이를테면, 지난 해에 이어 이번 해에도 이어진 기근, 며칠을 굶다가 주워먹은 시든 배춧잎의 입안 깔깔해지는 맛, 군불도 땔 수 없어 뼈마디가 오그라붙는 것 같았던 추운 겨울밤, 침략군을 피해 숨어있던 토굴 속의 축축함, 발등을 기어가던 절지동물의 차갑고 소름끼치는 감촉, 살해당한 아버지의 새카맣게 때 낀 손끝,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무덤을 팔 때의 피로감, 마른 기침을 하다가 비로소 터져나온 숨죽인 통곡 같은 건 하나도 드러내지 않는다.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던 사람들 각자의 최선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는데, 그 필사적이고 절박했던 시간과 존재가 모조리 ‘628년, 당나라 중국 대통일’같은 텅 빈 한 마디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너무 오래되어 현실감조차 희미해진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와 목전의 미래를 향해있는 광경은 그로테스크했다. 나는 기분이 좀 나빠져서, 이따가 집에 가서 『화재감시원』을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니 윌리스는 이 아저씨와 딱 반대되는 태도로 내 귓전에 대고 호들갑스레 이렇게 말해줄 것이므로.


“기둥 뒤에 사.람.있.어.요.”

 

코니 윌리스의 소설은 대체로 경쾌하고 유머가 넘친다. 사실 책장을 훑다가 코니 윌리스의 책에 손을 뻗을 때의 기분은, IPTV를 훑다가 ‘코미디 영화’ 카테고리의 영화를 찍어 들어갈 때에 비견할 만 하다. 그것은 일종의 투항이며, ’저 안전벨트 맸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정신없는 슬랩스틱과 말 빠른 스탠드업 코미디의 쌍두마차여, 이제 나를 싣고 마음껏 달리소서. 이 몸은 혼이 쏙 빠질 준비가 다 되었나이다. 


『화재감시원』은 시간여행 SF 소설이다. 『둠즈데이북』,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는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근미래, 옥스포드대학 역사학부 사람들이 과거로 가서 겪는 좌충우돌을 주요 줄거리로 한다. 작품마다 주인공과 배경 시대가 모두 다른데, 내가 유독 [화재감시원]을 떠올렸던 것은 그 책의 주인공인 미래세계 대학생이 시간여행으로 방문한 곳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포화 한가운데 시커멓게 잠겨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바솔로뮤는 옥스퍼드 역사학부의 학부생이다. 4학년이 되어 역사학 현장실습 좌표를 배정받았는데 하필이면 1940년의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가라고 한다. 전쟁통의 런던이라니! 당시의 런던은 독일군의 공습이 일상다반사인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시간여행 감독기관에서도 그 시기의 그곳을 위험등급 8로, 세인트폴 대성당은 그중에서도 위험등급 10으로 분류해놓았다. 게다가 바솔로뮤는 4년의 학교생활 내내 사도 바울을 따라 여행다닐 준비를 해왔던 참이다. 컴퓨터에 어떤 오류가 생겼는지 몰라도 실습을 겨우 이틀 앞두고서 갑작스레 이러는 건 너무 부당한 일 아닌가? 그는 조정을 요구하지만 교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가라는대로 가던가, 실습 과목을 아예 포기하던가!

이제 바솔로뮤는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 화재감시원 자원봉사자를 가장하여 침투해 들어가, 실습종료 통지가 올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예습을 해보기는 커녕, 한 톨도 관심 가져본 적이  없는 뜬금없는 세상에. 


그러니 바솔로뮤가 1940년 9월 20일, 웨일스 시골뜨기처럼 차려입고 세인트폴 대성당 안으로 걸어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그토록 심드렁하고 부르퉁했던 걸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2000년 전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도 바울의 장대한 선교여행을 따라다니고 싶어서 4년을 꼬박 준비해온 사람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독일군 전투기가 공습을 퍼부어대는 2차대전 당시로 가서, 좁은 성당에 갇혀지내다가 굴러다니는 폭탄에 모래나 냅다 뿌리다가 오라고 하는데. 


여기서 폭탄에 모래를 뿌린다고 하는 건, ‘다 된 밥에 흙 뿌리기’같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폭탄에 모래를 뿌린다는 말이다. 세인트폴 대성당의 화재감시원은 유서 깊은 대성당이 불타지 않도록, 폭격으로 성당에 소이탄이 떨어지면 재빨리 가서 불을 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이들은 성당의 지하무덤에 기거하며 공습이 한창일 때 삽과 모래양동이를 들고 지붕 위로 기어오른다. 그들은 대단히 숭고한 사명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단히 용감한 사람들도 아니고, 군인이거나 특별한 생존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다. 누구는 성격이 나쁘고 누구는 소심하고 누구는 멍청하며, 역사에 남을 위인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그냥, 공습 당시의 런던을 삶의 터전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웨일즈 출신의 어리숙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라는 위장된 신분으로 그 틈바구니에 끼어 제 몫을 다 하려 애쓰는 동안, 미래청년 바솔로뮤는 서서히 깨달아가게 된다. ’1940년, 런던대공습’이라는 연표의 표식 아래 도대체 무엇이 지워져 있었는지를.


코니 윌리스의 인물들은 대체로 선량하고, 평범하면서도 각자 개성이 뚜렷하다. 까칠하지만 잔정이 깊은 바솔로뮤, 얌전하지만 생활력강한 에놀라, 거칠지만 촉이 좋은 랭비. 빛나는 수퍼 히어로 대신 저마다 단점이 있는 내 친구같고 이웃같은 인물들이 우르르 나와 좌충우돌을 벌이기 때문에 일견 작고 호들갑스러운 소동 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기실 작가가 이 시리즈를 관통시키고 있는 주제의식은 그렇게 한없이 가볍기만 한 것이 아니다. 흑사병이 돌던 중세, 평온하던 빅토리아 시대, 그리고 20세기 전쟁 당시의 인간 군상 속으로 주인공들을 깊숙이 침투시켜서 말을 시키고, 장난을 걸고, 소동에 휩쓸리게 하면서 반복적으로 증명해내는 건, 인간의 역사가 도감의 연표에서 보듯 깨끗하고 무미건조하게 정돈된 데이터가 아니라, 살아 숨쉬고 다투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희생을 무릅쓰던- 그러니까 내 친구 혹은 당신 친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구체적인 삶들의 구성체라는 사실이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로 돌아온 바솔로뮤가 시험지를 받았을 때, 문항에 적혀있는 건 온통 숫자놀음들이었다. 세인트폴 성당에 떨어진 소이탄의 개수. 낙하산 폭탄의 개수. 고성능 폭탄의 개수. 1940년에 있었던 부상자의 수는? 폭격, 유산탄, 기타등등의 원인별로 쓰시오. 


“기타 등등이라고요?” 석회조각이 우르르 떨어지며 금방이라도 내 위로 지하묘지의 지붕이 무너지려 했는데, 기타등등이라고? “기타등등이라니요? 랭비는 온몸을 던져 소이탄을 껐습니다. 에놀라가 앓던 감기는 점차 상태가 악화되었습니다. 고양이는….” 

....

“교수님에게는 당시에 살던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통계학적 관점에서 보면 중요하지. 하지만 개개인으로는 역사의 진행 방향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어.”

“당연히 관계가 있어!” 내가 소리쳤다. “역사는 이따위 숫자 놀음이 아니라고!” 


역사건 전쟁이건 그 안의 개인들을 지우지 말라고 강변하는 저 장면이야말로 비장하고 결연한 숫자들로 포장된 텅빈 거대담론에 멀미가 날 때 딱 알맞은 응급처방이다. 미시적인 레벨의 삶들이야말로 진짜 역사라는 무거운 진심을, 경쾌하고 태평한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쓱 건네는 이야기는 확실히 위로가 되어주었다. 바솔로뮤의 실습성적이 1등급, 최우수로 판정되는 결말 덕분에 더더욱.  


다시 저 이과수폭포같은 글로 돌아가본다. 전쟁의 참혹과 공포를 애써 지우며 남 일 보듯 강박적으로 승리의 전망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는 썬글라스 아저씨. 그런 글에 유난히 크게 동요되는 우리 엄마같은 사람들. 나아가, 시청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던 일군의 노인들. 종종 그들은 내 이해의 범위 바깥에서 맴을 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역사책의 숫자와 무미건조한 기술로만 아는 어떤 사건들을 그들은 경험으로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앞선 세월을 통과하는 동안 그 몸들을 투과하고 쌓여왔을 ‘미시적인 레벨의 삶’이 있다. 고작 서너 세대밖에 차이나지 않는 이들이 일그러진 질곡을 거치며 익힐 수밖에 없었던 다른 생존의 법칙들조차 상상해주지 못한다면, 코니 윌리스의 역사관을 향한 내 열띤 동의는 얼마나 공허하고 우스워지는가. 


그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신 글을 찬찬히 봤는데 확인되는 출처가 없으니 덮어놓고 믿지 않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전쟁으로써 통일되기를 바라는 사람의 슬픈 기도문 같은 것이라고. 너무 무서워하지 마시라고. 별달리 도움을 드릴 순 없었지만, ‘안심해’라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었다. 그래, 어쩌면 그 글이 모두 사실이었을 수도 있다. 무서울 이유가 충분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을 때 심약한 엄마, 울먹이는 딸, 소스라친 고양이들은 서로의 무서움을 달래는 법을 하나씩 새로 익혀나가게 되겠지. 어쨌거나 우리는 결국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삶으로 살아갈 것이다. 지붕 위 폭격의 섬광 속에서 묵묵히 불을 끄던 사람들처럼.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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