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 경험하는 것, 살아내는 것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 경험하는 것, 살아내는 것 



빌리 필그림은 가난한 이발사의 외아들이었다. 키가 크고 허약했으며 코카콜라 병과 같은 체형을 타고 났다. 한 마디로 그는 웃기게 생긴 아이였고, 자라나서는 역시 웃기게 생긴 청년이 되었다. 그는 검안학교에 다니던 중 징집되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철모와 전투화를 지급받기도 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종전 후 돌아와 검안학교 설립자의 초고도비만 딸과 결혼했고,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장인과 마찬가지로 검안사가 되었고, 사업이 잘 되어 부자가 되었다.



여기까진 비교적 평탄한 삶이었다. 남들 눈에 빌리 필그림 인생의 분기점은 마흔여섯 살에 당한 비행기 사고였을 것이다. 이 사고로 그는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다른 승객들이 모두 목숨을 잃은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 문제는 이후로 그가 자신이 ‘시간에서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기 시작한 데 있다. 거기에다가 그는 자기가 수 년 전, 5차원을 사는 외계인 트랄파마도어 인에게 납치된 적이 있다는 고백까지 덧붙였다. 이제 사람들은 빌리가 사고로 뇌를 다치는 바람에 이른 나이에 노망이 났다고 수군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한에서는.

빌리 필그림이 ‘시간에서 풀려났다’는 건 시시때때로 육체를 둔 채 의식만으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의미였다. 정신이 홀연히 이 순간을 떠나, 다른 시간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가, 그 순간의 자기로서 자기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비행기 사고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그는 선을 그었다. 트랄파마도어 인의 납치와도 무관한 일이다, 젊을 때부터 쭉 그래왔다고 그는 주장했다. 처음 증상이 나타난 건 제2차세계대전 참전 당시, 부대에서 낙오되어 겁에 질린 채 전장을 헤매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그는 숱하게 그만 포기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의욕 없이 우두커니 숲속에 멈춰서 있을 때, 처음으로 그 일이 일어났다. 그의 의식이 홀연히 인생 전체를 통과하고는, 죽음과 탄생의 순간을 차례로 방문했다가 삶 속으로 이동해갔다. 그리하여 그가 처음으로 다시 살아낸 ‘경험’은, 어려서 수영장 물에 빠졌던 사건이었다. 물 아래 깊이 가라앉아,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기포 속에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걸 음악처럼 느끼면서, 어린 빌리는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구조의 손길이 너무 싫었다.

빌리의 첫 시간여행-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던 어린 시절로의 회귀 장면은 나 또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나 역시 물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아빠와 호수에서 작은 보트를 탔다. 어린 눈에는 엄청나게 크고 넓은 호수였지만, 어쩌면 그저 작은 연못이었을 지도 모른다. 키도 작고 눈도 작고 뇌도 작아서, 세상이 갑절로 더 커보이던 시절이니까.



하여튼.
선체에 부딪치며 찰랑이는 카키색 물 위에는 벌레와 작은 티끌과 그 밖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이상한 것들이 떠 있었고, 저 만치 떨어진 호숫가에서는 엄마와 다른 어른들이 나무 그늘 돗자리에 앉아 가끔씩 이 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는 노질이 서툴렀다. 나는 보트가 흔들릴 때마다 못내 겁이 났다. 삐걱삐걱 맴을 돌던 보트가 다시 호숫가로 되돌아가자, 아빠 친구가 나를 내려주려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두 팔을 뻗었다. 아빠가 일어서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서서는, 겨드랑이를 받쳐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보트가 출렁했다. 나는 놀라 세차게 발버둥을 쳤다. 항상 부드럽고 온화한 아빠가 당황하여 뭐라고 거칠게 언성을 높였다. 나를 먼저 놓친 사람이 아빠였는지, 아빠 친구였는지. 미끄덩 하는가 싶더니, 거센 기포가 뿌그르르 꿀렁꿀렁 소리를 내며 내 주위를 에워싸고 하얗게 위로 피어오른다. 다음 순간 나는 홀로 외로이, 카키색의 무겁고 둔중한 세상에 어리둥절한 채로 꼿꼿이 떠 있었다. 조그만 티끌들과, 더러워 보이는 미심쩍은 덩어리들이 기포에 밀려 물씬 물러났다가 느리고 괴상한 움직임으로 뒤죽박죽 맴을 돌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코로, 입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자 그제야, 공포가 새카맣게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몸을 뒤채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꼬로로록 새로운 기포가 피어올랐다. 내 목소리가 멀고 느리고 아득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구조의 손길이 너무 싫었던 그 장면은 빌리의 선천적 의지박약을 보여주는 장면일까? 아니다. 그것은 어린 빌리가 짧은 인생 처음으로 익사의 위험에 직면한 순간이 아니라, 청년 빌리가 시간여행을 통해 옛 사건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해 경험하는 순간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는 그 순간을 ‘재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구해주러 오는 것이 너무 싫었던 그 마음은 어느 빌리의 마음이었을까. 어린 빌리의 놀란 마음이었을까, 삶에 이미 지쳐버린 청년 빌리의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주제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가볍고 초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빌리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것은 그에게 시간여행이라는 이상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간여행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빌리 인생의 비극은 그가 생사의 의지를 잃어버린 데 있다. 종전 후 그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들은 유년기 기억이 병증의 원인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전쟁터에서 겪은 일들은 거론되지 않았다. 아마도 당대 젊은이들에게는 참전의 경험이 일반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처럼 취급했던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흔히 겪은 일이라고 해서, 그 공포와 부조리의 체험이 덜 고통스러워 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평탄하고 굴곡 없는 삶을 산 것처럼 간주하지만, 아니었다. 그 끔찍했던 전쟁통, 마땅히 살아야 할 사람들이 허무히 죽어나가고, 차라리 죽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는 가운데, 빌리는 생과 사 어느 쪽으로도 조타를 돌리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생의 어느 시간대에서도 어느 한 가지 바꾸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은. 빌리는 늘 무대공포증을 겪었다. ‘다음에는 자기 인생에서 어떤 역을 연기해야 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저 대본에 충실한 배우처럼 굴었다. 이 삶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저 위임받은 배역이나 된다는 듯이. 시간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결국 그는 평생에 걸쳐 자기 인생을 연기한 셈이다. 전심으로 자기 생을 살아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닌가. 

나는 빌리를 통해 되살아난 오래된 기억을 두고 앉아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되살리는 것, 이것도 나름의 시간여행이구나. 그런데 빌리는 과연 정말로, 그 순간들을 ‘다시’ 그대로 경험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아직 시간여행으로 방문한 적 없는, 최초의 경험들조차, 앞뒤 정황에 대한 앎에 의해 오염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험이란 당면한 순간에 대한 즉각적인, 불가항력의, 통제할 수 없는, 각기의 생물학적 반응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가올 감각을 알지 못한다는 것, 주어질 자극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의 아주 중요한 조건이다. 터질 듯한 심장 박동이 점점이 연결된 시간을, 원한다고 똑같이 되살려 살아낼 수는 없다. 갑작스러운 총성의 데시벨에 소스라쳐 터져나오는 비명은 이성으로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뚱맞은 순간에 훅 찌르고 들어왔던 라일락의 향기를, 계산적으로 반복해봤자 같은 효과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삶은 살아내는 것이지 연기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나는 빌리 필그림의 인생이 슬프다.




물에 빠졌을 때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눈앞에 가득 차던 카키색의 심상, 차고 부드럽던 물의 감촉, 익숙한 세상이 수면을 경계로 까꿍 사라져버린 순간의 충격, 입안으로 밀려들던 맛, 온도, 햇살의 눈부심, 와그르르 뿌르르르 뽀로로록 하던 기묘한 소란함의 총체. 


생각해보았습니다- 빌리처럼 시간여행을 하여, 지금 되돌아가 그 일을 다시 겪는다면, 나는 다르게 반응하게 될까? 그러니까 빌리처럼 지금의 내 영혼이 그때 그 몸뚱이로 들어가 다시 그 순간을 살아낸다면 말이죠. 이를테면, 발버둥을 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물에 안 빠졌어야 했을까? 아니, 정말 안 빠질 수 있었을까? 그 사건을 아예 안 일어나게 하면 좋을까? 저는 그때 물에 빠졌던 경험 때문에 한동안 물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딜 가도 항상 물가에서만 놀게 되었고, 그리하여 모래나 돌멩이로 성을 쌓는 데에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공포가 생산적으로 작동하여, 여하한 경우라도 살아남기 위해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동기가 되어주었죠. 덕분에 지금의 저는 수영을 제법 잘 하게 되었고, 보트를 타는 것은 물론 깊이 자맥질 하는 것도 겁내지 않아요. 뒤돌아보면 인생에 일어난 그런 사건들 하나하나가 레고블럭 같고 또 찰흙반죽 같습니다. 그들이 오밀조밀하게 조합되거나 충돌하거나 합체되면서, 지금의 저를 ‘나’로 지어 올렸죠. 이는 몸의 기능이나 기술의 획득에만 국한되진 않을 거예요. 감정을 펼치고 거두어들이는 감각, 불가항의 공포와 트라우마, 끈기와 신뢰와 공감의 능력까지 모두 망라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빌리는 사건들을 통한 직조와 형성의 과정을 모두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였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모든 경험들의 총체로서의 나를 최선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는 영원회귀의 정신으로 ‘운명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칠 수밖에 없게 되는 걸까요.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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