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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태양 아래 걷다』 - 걷기,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의 몸뚱이를 옮겨놓는 활동

by 북드라망 2017. 7. 12.

『태양 아래 걷다』 

- 걷기,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의 몸뚱이를 옮겨놓는 활동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 크기는 지구의 49분의 1. 한 바퀴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 29.5일. 볕을 받아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15일간의 길고 뜨거운 낮이 지나면, 혹독히 추운 14일간의 긴긴 밤이 시작되는 곳. 

대기가 없어 아무런 침식도 풍화도 일어나지 않는 땅. 누군가는 그 표면에서 사람의 얼굴을, 누군가는 방아 찧는 토끼 한 마리를 보지만, 그 모두가 사실은 45억년 무수한 운석 충돌의 역사가 차곡차곡 성실하게 기록된 흔적인 곳. 

지구의 위성이라지만, 큰 질량비 때문에 차라리 형제 행성이라 보아도 무방한 지경인 곳. 여기로부터 대략 38만 4400km 너머에 있는 곳. 어쩌면 닮았지만, 아주 작은 변수에도 취약한 인간같은 생물에게는, 생존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곳. 



“거대한 폐허.”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 트리시가 주변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던 말이다. 그 곳, 달은 절망의 감각 이외의 어떤 것도 일깨우기 힘든 무채색 황량한 풍경만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태양 아래 걷다』의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태양광으로 생명유지기능이 작동하는 우주복이 있다면, 달에서 조난당한 사람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식량은 충분하다. 태양광이 있는 한, 물도, 산소도, 온도조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태양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언제나 해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일 터. 


구조대는 한 달 후에나 도착한다. 해는 계속해서 서쪽으로 지고 있다. 불시착 시점으로부터 사흘 뒤에는 지평선 너머 꼴딱 넘어갈 참이다. 그 뒤로는 긴 밤이 시작될 것이다. 문학적인 장치나 은유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여기서의 구도는 너무나 노골적이다. 문자 그대로 생명의 원천인 태양은 뉘엿뉘엿 저물어 간다. 태양이 부재하는 밤에는 생명유지장치가 작동할 수 없다. 즉 죽음은 쉼 없이 생을 뒤쫓고 있다.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태양이 비추는 생의 영토 안으로 산 몸을 끊임없이 다시 옮겨 넣어야 한다.  



주인공인 트리샤는 상황을 명료하게 판단하고 즉각 실행에 들어간다. 태양을 따라 걷기로 한 것이다. 서쪽을 향해, 태양과 보조를 맞추며, 달의 자전주기 한 바퀴동안 내내. ‘밤’에 따라잡히지 않으면서,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아, 한 달 후 조난지점에서 조우할 수 있기 위한 기나긴 마라톤의 시작이다. 


지구에서 우주복을 만들 때에는 아마도 수 백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할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상상해본 갖가지 돌발 변수들 가운데 수백 킬로미터 장거리 마라톤 경주가 포함되지 않았을 건 분명하다. 중력이 6분의 1인 달의 환경은 걷거나 뛰기 지구에서보다 유리한 조건이지만, 설령 먼 훗날 언젠가 월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 온다고 해도, 커다랗고 넓적한 태양광판이 등뒤에 날개모양으로 접붙은 미쉐린 타이어맨 모양의 우주복 수트가 참가기념 셔츠로 배부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월면의 미개척지는 마라톤에 적합한 곳이 아닐 뿐더러, 우주복은 장거리 달리기/걷기에 알맞은 복장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트리샤 이전에 이미 우주복 차림으로 달 위에서 피치 못할 마라톤을 해야 했던 다른 사람들을 또 알고 있다. 하인라인의 1948년작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의 두 주인공, 킵과 피위는 악당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달 기지까지 66 킬로미터 거리를 어기적대는 불편한 우주복 차림으로 자박자박 힘겹게 걸어갔었다.


걷기- A 지점으로터 B 지점으로, 지면을 딛는 두 다리의 반동을 번갈아 이용하면서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의 몸뚱이를 옮겨놓는 활동. 사실 걷기는 언제나 나를 매료시키는 행위였다. 내가 끝내 극복하지 못한 어린 날의 착각 중 하나가, 걷기라는 게 신비롭고 경이로운 ‘현상’이라는 믿음이다. 한 다리에서 다른 다리로 체중을 옮겨 디디는 걸 한없이 반복하기만 하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가닿아 있을 수 있다니, 이건 흡사 마법이 아닌가! 우리 우주의 물리법칙과 우리 신체의 매커니즘상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걸 알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그게 정말 그렇게 당연한 일인가 생각한다. (‘걷기라는 건 슬로우모션으로 돌린 축지법이잖아?’) 딱 보폭만큼, 딱 걸음 수만큼, 딱 내가 낸 속도만큼만, 정직하게 성과가 나는 것도 재미있다. 꼼수도 잔꾀도 통하지 않는, 백 번을 천 번을 물어도 그저, 1 더하기 1은 2인뎁쇼, 라고 대답하는 돌쇠처럼 아주 본질적으로 우직한, 땅과 나 사이의 일대일 상호작용. 



물론 두 작품의 월면질주는 서로 성격이 다르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속 달 기지로의 도주 장면이 어드벤처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데 비해 [태양 아래 걷다] 속 트리샤의 기나긴 여정은 치열한 과학 질의응답의 소설적 해제에 가깝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에서 인물들의 절박함이 ‘걷기’라는 개인적인 활동 안에 응축되는 게 걷기 애호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제 이 이야기들에서, 걷기는 그들을 삶 속으로 반복해 재배치 하는 행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반발력으로 그 몸을 추동시켜주는 땅은 세계를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입을 벌리고 밀려오는 죽음으로부터, 성큼, 한 번에 한 걸음씩, 멀리, 또 멀리 들어가게 재우치는 세상과의 관계맺음. 하지만 그 행군의 고통과 피로가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육체적 한계가 그들을 고꾸라뜨렸을 때, 천근만근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를 안전한 곳으로 끝내 견인해 낸 최후의 동력은 각자가 마음에 품은 사람들에 대한 각별하고 애틋한 책임감이었다. 

킵과 피위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불굴의 수퍼히어로였어서가 아니라 나의 포기가 나 하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애꿎은 상대방의 죽음이 덤핑으로 딸려오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으로 고통스러운 여정을 견뎌낸다. 

 혼자 걸어야 했던 트리시의 경우는 좀 더 독특하다. 그만 걷고 싶을 때, 좀 더 쉬고 싶을 때, 그냥 다 놓고 싶을 때마다 일어나라고, 정신차리라고, 죽음에 따라잡히지 말라고 달래고 닦달하며 한 걸음이라도 더 전진하게 했던 건, 환각으로 나타난 그녀의 죽은 언니였다.    

『태양 아래 걷다』의 작가 제프리 A. 랜디스는 실제 나사에서 일하는 우주과학자로, 엄밀한 과학 지식을 토대로 하는 하드SF를 쓴다. 이 작품에 주어진 모든 조건과 설정들은 철저히 현실에 입각해 있고, 해 아래 있기 위해 끝없이 걷는다는 설정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작가의 과학자로서의 성실성을 믿고, 논리와 이론으로 완벽하게 추론하고 계산해낸 과학적 토대 위에 이 소설을 지어올렸다고 믿는다. 사실, 그런 믿음이 없이는 책장을 잘 넘길 수도 없을 것이다. “달의 중력이 지구 중력의 6분의 1인 거 맞아?”, “달 자전 주기가 29.5일인 거 맞아?”, “밤이 14일이나 되는 거 맞아?”,... 이런 식이어서야 순조로운 독서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언니의 유령’의 출현은 생뚱맞다기보다 뭉클한 구석이 있다. 최후의 최후까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하드SF의 견지에서 확인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설령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실체를 이미 잃었고, 혼자만의 환각 속에 떠오른 관념에 지나지 않았을 지라도. 


킵/피위/트리샤는 모두 살기 위해 걷는다. 뒤로부터 엄습해오는 밤(또는 악당)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한 필사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타자에 대한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살아남는다. 최후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건 홀로 죽지 못하는 자의 책임, 또는 홀로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었다.

이 단편을 다시 읽은 다음 날, 나는 긴 산책을 나갔다. 킵과 피위와 트리시를 생각하며,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둘레길을 따라 오래도록 걸었다. 물론 미개척의 월면보행에 비할 수는 없을 테지만, 이른 오전의 산길은 거칠고 적막하고 외로웠다. 규칙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산책 후 해야 할 할 일들을 생각했다. 세상과 맺은 관계들, 사람들과 맺은 관계들, 우리가 주고 받은 수많은 책임들. 내 생의 어떤 힘든 고비들에서 나를 붙들어맸던 것도 결국은 사람들이었다. 빚이면서 동시에 선물이 되는 타자들. 나는 어느 수풀가에선가 걸음을 멈추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다시 묶었다. 갈 길이 멀지만 마음은 가뿐했다. 어기적대는 우주복에 딱딱한 부츠 차림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작가를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저를 괴롭혔던 문제는 대체 트리시가 잠을 어떻게 잤냐 하는 거였습니다. 3일- 그러니까 72시간 뒤에서 밤이 쫓아오고 있는 가운데,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잠자는 시간을 얼마나, 어떻게 배분해 넣을 수 있었느냐는 거죠. 본문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달에서는 자는 시간 열 시간 쯤을 빼면 한 시간에 15마일이나 20마일을 걷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 마음에 신성모독적인 불신이 차올랐던 순간이죠. 죽음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속도를 늦췄다가 그만 태양에 앞지르기 당하면 만사 끝장날 판국에, 어떤 멘탈이 하루에 열 시간씩이나 꼬박꼬박 챙겨서 잘 수가 있다는 거지요? 대한민국의 고3은 365일을 남겨놓고도 잠을 반 토막으로 줄인단 말입니다. 충동적으로 노트와 펜을 끌어당겨 20대의 적정 수면시간, 30일 완주를 기준으로 깨어있는 동안 달성해야 하는 최소 보행속도 같은 걸 계산해보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랜디스 님이 다 알아서 하셨겠지요. 그분은 나사(NASA) 과학자이고, 발표된 지 25년이나 지난 작품이니만큼, 오류가 있었다면 이미 전에 다 수정되었을 게 분명해요. 마이너한 이슈에 집착하지 말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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