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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장자』, 마이너리티의 향연

경계 없는 사유 : 만물은 모두 똑 같다[萬物齊同] ⓶​

by 북드라망 2017. 6. 15.

경계 없는 사유 : 만물은 모두 똑 같다[萬物齊同] ⓶​

- 만물, 우연이 만든 기적!


 

1. 만물을 누가 만들었을까? 

 

『장자』에서 가장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랩소디. 「제물편」에서 스승 남곽자기가 제자 안성자유에게 낭랑하게 읊조리듯, 노래하듯 들려주는 창조의 이야기.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우주 만물의 생성에 대해 새삼 곱씹어보게 된다. 우주를 빚어낸 주재자, 창조주는 있는가? 없는가? 없다면 누가 우주를 생성했는가?

 

남곽자기는 자기 안의 모든 지식을 비우고 느닷없이 하늘과 대지의 파동을 주시하며 제자 안성자유에게 묻는다. 하늘의 피리 소리[천뢰], 땅의 피리 소리[지뢰], 사람의 피리 소리[인뢰]를 들어보았느냐고. 형체는 없지만 분명히 귀로 감지되는 파동, 즉 소리로 우주 만물 창조의 순간을 말하는 방식은 참으로 절묘하다. 스승은 제자에게 땅의 피리 소리와 사람의 피리 소리는 들었어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는 인뢰는 들었어도 지뢰는 듣지 못했을 것이며 지뢰는 들었어도 아직 천뢰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대답했다. "대지가 숨을 내쉬면 그것을 일러 바람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낸다. 너만 홀로 윙윙 울리는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험하고 높은 산림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 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기둥 받치는 가로 지른 나무 같고, 나무 그릇 같고, 절구통 같고, 깊은 웅덩이 같은 것, 얕은 웅덩이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바람 소리는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나는 소리, 나직이 꾸짖는 소리, 숨을 가늘게 들이키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은 데서 나오는 듯한 소리, 새가 재잘거리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내지. 앞에서 가볍게 우우하는 소리를 내면, 뒤따라서 무겁게 우우하는 소리를 내고, 산들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하지. 그러다가 바람이 멎으면 그 모든 구멍은 다시 고요해진다. 너도 저 나무들이 휘청휘청 구부러지거나 살랑살랑 흔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았겠지."


바람은 대지가 내뿜은 숨이다. 그 숨들이 바람이 되어, 대지의 온갖 구멍과 마주친다. 그러면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대지가 구멍에 숨을 불어넣어 소리가 생겨난다. 아마도 이것이 땅의 피리 소리일 것이다. 이것에서 유추하면 사람의 피리 소리는 사람이 피리 구멍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 나오는 소리이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소리도 가볍다. 바람이 거세면 소리는 크다. 바람에 따라 소리가 달라질 뿐만이 아니다. 구멍의 크기와 모양과 깊이에 따라서도 소리는 다르다. 남곽자기는 각양각색 구멍의 모양과 함께 각기 다르게 뿜어져 나오는 소리의 백태를 정성스럽게 열거한다. 바람의 세기와 구멍의 크기·모양에 따라 소리는 천태만상! 어느 소리도 같은 것은 없다.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자는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하늘의 피리 소리는 무엇인가? 제자는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스승도 말하지 않았다. 다시 질문한다.

 

자유가 말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란 결국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군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대나무 퉁소에서 나는 소리인데,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대답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남곽자기는 바람은 바람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하며, 구멍은 구멍이 소리를 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소리를 만든 건 누구일까? 스승은 소리를 만드는 주재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아마도 하늘의 피리 소리는 하늘에서 나는 피리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피리 소리든, 땅의 피리 소리든 그 소리를 만든 주체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소리를 만든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인가? 스승은 말해주지 않으니 우리가 유추해볼 일이다.

 

「제물론」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창조의 주체를 찬찬히 추론해보자.

 

곁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대가 걸어가다가 지금은 그대가 멈췄으며 조금 전에는 그대가 앉아 있다가 지금은 그대가 일어서 있으니, 어찌 그다지도 일정한 지조가 없는가?"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무언가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도 또 무언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와 같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어떻게 그런 줄 알며 어떻게 그렇지 않은 줄 알겠는가?" 


곁 그림자 그러니까 그림자의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따지는 장면이다. 곁 그림자는 자기 마음대로 걷고 멈출 수가 없다. 곁 그림자는 자기의 본체라 믿고 있는 그림자가 자기 멋대로 걷고 멈추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는 말한다. 나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나를 가고 멈추게 하는 건, 내가 의지하는 무엇 때문인지 아니면 나처럼 그 본체도 무엇에 의지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자의 말을 들으니, 장자의 우주만물 생성론의 전모가 이해된다. 결국 곁 그림자도, 그림자도, 걷고 멈추는 건 자신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다. 곁 그림자가 생긴 원인은 그림자와 해의 마주침 때문이고, 그림자가 생긴 원인은 본체와 해의 마주침 때문이다. 그러니 곁 그림자와 그림자 모두 걷고 멈추는 건 자신과 그 무엇의 마주침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 존재가, 혹은 신이 그렇게 한 게 아니다.

 




이제 사람의 피리 소리와 땅의 피리 소리가 만들어진 근원, 곧 하늘의 피리 소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피리 소리는 숨과 구멍 외부에 있는 어떤 초월자나 신이 아니다. 『장자』에서 천(天)은 상제와 같은 주재자가 아니라 인위에 반대되는 자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결국 소리는 누군가가 예정한 게 아니라 숨과 구멍이 마주쳐서 생겨난 우연의 사물이다. 즉 소리 나게 하는 운동 그 자체가 하늘의 피리 소리이다. 대지의 바람과 나무 구멍의 우발적 마주침, 피리와 사람 숨의 마주침이 소리를 만든 것이다. 나무의 구멍 모양과 크기에 따라, 바람의 세기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그러니 소리 난 원인은 여러 모양의 구멍 그 자체에, 바람 자체에, 혹은 피리 자체에 사람의 숨 자체에 있지 않다. 진재를 굳이 가려내라고 하면 마주침 혹은 부딪힘이다. 그림자를 움직이고 멈추게 하는 것은 본체도 아니요, 그림자도 아니다. 본체와 태양의 우발적 부딪침이 그렇게 만들었다. 본체와 빛의 우연한 만남이 그림자를 가게도 멈추게도 한다. 사물들의 운동 그 자체가 소리와 그림자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 우발적 부딪침이 우연의 소리를 생성했다.

 

그렇다면 참 주재자를 정리해보자. 참 주재자는 우발적 운동이다. 제3의 초월자가 아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참 주재자는 없지만 무엇을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참주재는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참 주재자는 사물들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사물 내부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사물들 내부에 있으면서 사물들 사이에 있는 것. 결국 절대자라 할 만한 참 주재자는 장자에 의하면 느껴지지만 형체는 없는[有情而無形] 작용 그 자체, 변화 그 자체이며 이른바 참 주재자란 자연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연 그대로가 바로 참주재요, 변화의 흐름 그 자체가 참 주재자이다.

 

 

2. 만물제동의 기원 ‘무(無)’

 

장자는 이 우주를 만든 것은 운동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시원은 어떻게 되는가? 장자는 이 우주상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진공 상태. 그런데 장자는 이 진공상태도 무한이라고 본다. 있음이 없었던 때가 있었으며 그 없음조차 없었던 때가 있었고 없음의 없음도 없던 때가 있었다고 말한다.

 

시작이라는 것이 있으면, 시작이 시작되기 이전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시작이 시작되기 이전마저 시작되기 이전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없음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또 없음이 시작되기 이전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고, 없음이 시작되기 이전마저 시작되기 이전이라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없음이 있다고 하는데, 있음과 없음 가운데 정말로 어떤 것이 있고 어떤 것이 없는지 모르겠다.

 

진공상태는 소리도 형체도 없기 때문에 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입자를 가속기에 넣고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돌리면 더 작은 입자들로 쪼개지는 게 아니라 파동으로만 남는다고 한다. 있음에서 없음. 장자는 그럴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현대 물리학은 그 없음의 세계를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없음도 상태가 다르다고 한다. 소리 없고, 형체 없는 파동의 세계. 그 파동도 한결같지 않고 매우 다를 것이기 때문에 없음 즉 진공 상태도 무한인 것이다. 결국 장자에 의하면 만물은 무에서 나왔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과는 다른 차원이다 불교의 공은 자성이 없음, 자기동일성이 없음, 존재와 현상을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실체가 없음. 즉 하나의 상이 없다는 뜻이다. 장자는 태초에 아무것도 없다가. 이 없음으로부터 만물이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대상으로서의 1과 그것을 표현한 말로써 2가 되고, 그 2와 본래 분리되기 전의 1과 합쳐서 3이 된다. 이처럼 계속 뻗어 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나? 그러므로 무에서 유로 나아갈 때도 3이 되는데, 하물며 유에서 유로 나아갈 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옛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사물이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최고다. 완벽해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그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그것들이 처음부터 나뉜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처음부터 옳고 그름이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태초에 무만이 있었고 유도 없었으며 이름도 없었다. 여기에서 하나가 생겼는데 그 하나는 있어도 아직 형체가 없었다. 물이 하나를 얻어 생기는 그것을 덕이라고 일컫는다. 움직이고 흘러 만물을 생기게 하고 그렇게 만물이 이루어진 뒤 생명과 조리가 있게 되니, 그것을 형체라고 한다. 형체 속에 정신을 보유하여 각기 고유한 법칙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장자는 태초는 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에서 하나가 생겼고, 이 하나에서 음양 이기(二氣)가 생기고, 이 음양의 두 기운이 부딪쳐서 만물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것이 장자의 우주 만물의 생성론이자 존재론이다. 천지 만물이라는 존재자들은 누가 만들지 않았다. 기들의 우발적 부딪침, 그들의 지속적인 운동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 것이다. 이 우주는 다수의 힘이 부딪치고 관계 맺으며, 그 힘들이 다수의 힘을 산출하는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에 있다. 무조건적이고 무한히 반복되는 운동이 바로 만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만물은 운동의 결과이다. 누가 누구를 만들지 않았다. 운동의 원인이 있지 않고, 운동을 통한 결과가 존재로 드러날 뿐이다. 이 우주는 끊임없이 생성 중이다. 생멸의 부단한 반복.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생성과 소멸만이 있다. 소멸하는 존재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멸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부딪침에 의해 새로운 다수의 힘으로 생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형과 성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형과 심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부단하게 변해가는 과정에 있다.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에 따르면 존재는 계속 변화 중이어야 한다. 하나의 완성된 몸, 하나의 완성된 마음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변화를 쇠멸로만 볼 수 없다. 어찌 보면 부단한 생성의 과정인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존재는 매 순간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이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분명 다르다. 매 순간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태어나고 성장하고 병들고 늙고 소멸하는 것은 표면적 변화이지만, 우주적 차원에서라면 새롭게 생성 중인 것이다.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면, 살고 죽는 이 과정 자체가 매우 역동적인 흐름처럼 느껴진다. 원본이 스러진다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 과정으로 보는 순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새삼 살맛이 나지 않는가?

 

우주의 기원이 무라고 사유하면, 사물에 관한 시선도 달라진다. 만물은 어떤 의도도 없이 무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났을 뿐이다. 예정되지 않았으므로 사실 사물들 사이의 그 많은 차이는 단지 다름일 뿐 서열이나 위계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물들 사이에 질서는 없는 것이다. 무-질서, 무-차별. 그래서 장자는 태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다음엔 사물이 생겨났으나 구별은 없었고, 사물이 서로 다르다는 구별은 있었지만 옳고 그름으로 사물을 나누지는 않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만물은 하나다. 혹은 만물은 같다. 만물의 성질과 형태가 동일하거나, 만물이 동일자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각 존재는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없음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둘로 나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만물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다. 만물은 누가 그렇게 만들려고 의도해서 형성된 존재들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만들어진[自然] 존재들이다. 우연의 부딪침으로 시작되어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만물들 각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는 결과로서의 자연의 필연성이다. 주재자의 의도된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에서 시작되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자연적 필연성. 만물의 생성과정을 보면 만물 사이에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만물은 제동(齊同)이다. 만물은 물리적 형태상 분명 서로 다르다. 그 다름은 실존 상의 다름이지 위계 상, 서열상의 구별이나 경계를 짓는 기준은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와 만물은 하나다.

 

 

이 세상에 가을 짐승의 털끝보다 큰 것은 없고, 태산은 오히려 작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장수한 자는 없고, 팽조는 일찍 죽은 자가 된다. 천지의 유구함이 나와 함께 살아 있고, 만물의 다양함도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동물의 털은 가을에 더 가늘어진다. 그런데 크다니 역설에 불과한 것일까? 요절한 아이가 장수한 것이고 800년을 산 팽조는 일찍 죽은 자라니 이것도 역설에 불과할까? 우주의 기원에서 보자면 만물은 모두 제각각의 형질로 생성되었다. 무한의 수로 갈라져서 무한의 모양새로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그들 사이를 경계 짓기 어렵다. 존재의 생성이 이럴진대 어떤 것을 더 하찮고 더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런 식의 모순 어법으로 그 경계를 깨고 만물이 하나임을 말했다. 만물 전체를 볼 때 가을 털보다 더 가는 건 무한이다. 요절한 어린아이보다 더 일찍 죽는 존재도 무한이다. 팽조보다 더 오래 사는 존재도 무한이다. 그러니 누구를 가늘다, 크다, 요절했다, 오래 살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사물 각각을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런 기준으로 차별한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은 똑같다. 사물들은 무-차별 상태로 제멋대로 살아갈 뿐이다. 

 

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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