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친절한 강의 중용』의 친절한 고전 안내자! 우응순 인터뷰

『친절한 강의 중용』의 친절한 고전 안내자!

우응순 인터뷰





<인터뷰 전문>

1. 『중용』이, ‘사서삼경’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썼는지, 어떤 위상을 가진 책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사서’ 중에서도 가장 마이너한 느낌마저 듭니다. (단도진입적으로) 『중용』은 어떤 책인가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위대한 고전’이죠, 단, 우리가 아직까지 거기(『중용』)에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저는 『중용』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썼다고 전해집니다. 근래에 발굴되고 있는 문헌 자료를 보면 거의 확실합니다. 자사는 태어나서 네 살까지 할아버지인 공자에게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공자의 학맥은 증자로 이어집니다. 자사는 증삼의 제자고요. 공자는 아들과 아들과 같았던 제자, 아내까지 모두 먼저 죽었기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자사는 『중용』 안에서 공자의 말씀을 많이 인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인용하는 부분을 보면 『논어』, 증자가 쓴 『대학』인데, 『중용』에는 이 두 저작의 중요한 부분들이 수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중용』의 주제가 『맹자』로 확산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중요한 책인 것이죠.


2. 이 책 『친절한 강의 중용』은 선생님의 강의 입말이 살아 있어서인지 강의 현장에 함께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쭉 읽다 보면 중용 해석은 물론이고, 한문 문형, 게다가 『논어』나 『맹자』처럼 다른 사서의 책과 통하는 이야기까지 넘나들어 『중용』 배우는 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고전 원문 강의를 수십 년간 해오신 걸로 아는데요, 강의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 어떤 점인지 궁금합니다.


강의를 여러분들이 들어주셔서 항상 고마운 마음이에요. 그런데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이 항상, 한자로 쓰인 텍스트라는, 그러니까 ‘원문’을 제가 강의 한다는 것을 일종의 ‘장벽’처럼 느끼시곤 합니다. 제가 강의를 할 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일단 강의에서 다루는 텍스트들이 2천년 전에 쓰여진 책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텍스트에 나오는 용어와 표현들이 그때 당시에는 어떤 의미였는가 하는 점을, 동시대의 텍스트를 통해서 설명해 드립니다. 그래서 『친절한 강의 중용』을 보시면 『맹자』, 『논어』 같은 텍스트들이 정신없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당대의 ‘의미망’을 통과해서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신영복 선생님이 『담론』에도 쓰셨지만, ‘손때 묻은 그릇’과 같은 것이죠. 오래된 하나의 ‘틀’과 같은 겁니다. 그 ‘틀’을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 좀 더 ‘나 답게’, ‘현명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죠. 그 점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단 강의를 할 때 저는 제가 가장 즐거워요. 그러니까 제가 느끼는 그 즐거움이 학인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라고요. 저는 그래서 강의를 할 때, 부드럽게, 잘 ‘꾀는’ 그런 강의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3. 흔히 ‘중용을 지켜라’라는 말을, 이를테면 ‘편들지 말라’는 식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중용’은 그런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중용’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중용』이라는 책이 다루는 주제에 관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중용’이라는 표현을 대체로, 양쪽의 극단을 피한 가운데, 그러니까 ‘중간’이요. ‘중도파’라거나, ‘중간지대’같은 말들을 씁니다. 그러나 『중용』에서 문제 삼는 것은 ‘절대적인 옳음’과 ‘절대적인 그름’과 같은 ‘시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여러 가지 선(善)의 실천에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각각의 선택지의 타당성은 어떻게 확보될까요? 『중용』은 ‘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봅니다. 15세기에 살 때에 옳은 것과 21세기에 살 때에 옳은 것은 다르지요. 정도전의 길과 신채호의 길, 그리고 우리의 길이 다른 겁니다. 『중용』은 그것은 ‘시중’(時中)이라고 표현합니다. ‘적절성’, 당대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한 당대의 적절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저울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그래서 『중용』은 당대의 적절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지, 절대적인, 혹은 초역사적인 시비의 문제를 다루는 텍스트는 아닙니다. 『중용』에서 가장 배격하는 것은 오히려 중간, 중도 같은 어정쩡한 입장입니다. 양시, 양비론과는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4. 『중용』은 ‘유교의 경전’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 책 강의 중에 유교에 대한 어떤 편견을 몇 번 언급하시며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부분이 있는데요, 사실, 특히나 한국 사회에는 아직 ‘유교’나 ‘유학’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도 『중용』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조선 왕조가 쇠락하고 근대가 열리는 시기에, 특히 식민지가 된 제3세계 대부분의 지식인이나,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이 된 이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실패했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전통’을 부정하는 흐름이 생기게 된 것이죠. 예를 들면 춘원 이광수 같은 사람이죠. 우리에게는 물려받을 전통이 없다, 다 부정하자는 식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고아’로 새출발을 하게 된 것이죠. 그것은 그때의 ‘시대정신’이었다고 봅니다. 일단, 부정을 해야 새출발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를 거친지 백 년이 넘었어요. 이제는 ‘모두 버리고 가자’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게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가 버린 것 중에서 상당히 쓸모 있는 것들이 많죠. 그것을 다시 챙기기 위해서는 역시 고전(古典)을 읽어야 하는 것이고요. 더불어 조금 힘들지만, ‘원문’(原文)으로 읽는 것이 좋고요. 해설서만 읽으면, 다른 사람이 읽어 준 책, 그래서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동양의 고전들과 새롭게 접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 간다면, ‘무조건 버린다’는 식의 태도는 상당히 바뀌지 않을까 싶고요. 


5. 선생님께서 『중용』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시는 구절 하나와, 독자들이 꼭 익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구절 하나씩을 꼽아주세요. 


아, 한 구절을 뽑으라니 정말 어렵네요.(웃음) 우선, 첫 문장…음…한 문장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일단, 첫 문장을 말씀드릴게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사람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여기서 성(性)은 ‘도덕성’이에요. 무언가, 선한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죠.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백지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로 가는 것이고요. 성(性)이라는 걸 현재적인 의미로 생각해 보면,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을 『중용』에서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도’(道)는 ‘나다운’, ‘나를 배려하는’ 이러한 삶이 주변으로 확산,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중용』에서 가장 고민하는 것은 ‘나’와 공동체의 관계입니다. 이 공동체 속에 내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회나, 국가 같이 더 큰 단계로 가면 ‘교’(敎)라는 개념이 됩니다. 그런데 보통 ‘교’(敎) 자를 ‘가르칠 교’나 ‘교화하다’는 뜻으로만 보지만, 여기(『중용』)에서는 일정한 규범이나 시스템이 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용』의 후반부로 가면 이 개념이 성실할 성(誠)자가 됩니다.(『중용』의 핵심어들은 다 한 글자로 되어 있죠.) 그런데 우리가 또 자연의 일정한 리듬, 춘하추동 같은 이런 것들이 있는데, 중용에서는 사람의 삶에도 그런 식의 리듬이 있다고 보는 것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각 시기마다 해야 할 것이 있는 것이죠. 그것에 맞춰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 매뉴얼이 『중용』에 설정되어 있어요. 


영화 <공자> 중에서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일생을 ‘나다운 삶’을 추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머리가 좋은 것보다 중요한 게 있죠. 『중용』에서는 ‘삼달덕’(三達德)을 꼽는데요. 첫번째는 ‘공부’ 그러니까 학(學)을 통해서 현명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걸 지(智)라고 표현하죠. 또 하나는 어질 인(仁)자에요. 『중용』에서 말하는 인(仁)이라는 것은, 자신의 가치나 선한 의지를 주변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지(智)와 인(仁)이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일생 동안 해 나가려면 뭐가 있어야겠습니까? 바로 용기죠. 그래서 용(勇)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꾸준히 해나가는 힘, 에너지인 것이죠. 『중용』에서 말하는 삼달덕에는 바로 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이에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삼달덕 중에서도 용(勇)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대부분 『중용』에서는 성(性)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곤 하는데, 저는 우리의 실천적인 삶 속에서는 용(勇)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제가 강의 때도 강조하는 바는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마음을 거기에 두고 지속적으로 밀고 가는 실천’입니다. 이게 되려면 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주변을 향해서도 ‘설득력’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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