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아빠’는 처음이라...

‘아빠’는 처음이라



2008년 아내와 결혼했다. 첫 결혼이라 아무것도 모른 채 어리바리하게 지나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난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결혼을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여자친구에게 결혼은 참 좋은 것이라 말하며 꼬시고 있었다. 지리산 종주 중 벽소령대피소에서의 프로포즈부터 시작해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 성당에서의 결혼식을 위한 혼인교리, 집 구하기, 살림장만하기, 결혼식 성당 찾기 등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 아내와 나는 결혼했고 함께 살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내가 섭섭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결혼이 사랑의 결과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한다면 그냥 같이 재미있게 살면 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살피며 사랑을 나누고 살아가는 일에 결혼제도는 방해만 될 뿐이다. 아마도 겁이 많은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살기 위해서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일련의 ‘표준화’된 결혼과정을 거치며 결혼을 통해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것이 결코 두 사람만의 관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이라는 역할도 처음이었지만, ‘아빠’ 또한 마찬가지로 처음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버지 혹은 아빠라는 이름이 붙은 가부장적 남성의 역할이 존재한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바깥일을 해야만 하는 남성.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여우같은 마누라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나는 오히려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하기 싫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벌이가 좋던 아내가 ‘날 먹여살려주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아들이 태어난 후 표준화된 ‘아빠’의 모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아빠’와 ‘나’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표준화의 기억 1 - ‘스드메’를 아시나요?

  

2008년 여름 무렵 결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아둔 돈도 별로 없어 간소하게 식을 치르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결혼식’은 이미 표준화된 상품이 되어 있었고, 우리는 거기에 비용을 지불하고 소비하고 있었다. ‘스드메’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내가 결혼하던 2008년경 식을 올리려고 알아보면 웨딩업체들이 맥도날드의 무슨 세트메뉴처럼 스튜디오촬영+드레스+메이크업이 결합된 상품을 신나게 팔고 있었다. 상담을 받고 나면 최면에 걸린 듯 세 가지 모두를 꼭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맥도날드에 가서 불고기버거보다는 빅맥세트에 치즈를 추가해서 주문하고 싶은 기분처럼 ‘스드메’세트의 기본상품보다는 판매자들이 추천하는 그들에게 수익이 많은 중상급세트 메뉴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식이 아니라 소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다양한 형태의 결혼식들이 등장했지만(아니다 스몰웨딩도 하나의 소비 트렌드 또는 웨딩업체의 수익 높은 신상품일 수도 있다) 당시 아내와 나는 청담동의 웨딩업체들을 돌아다니며 가성비 높은 상품을 찾아내 성공적인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혼식뿐만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되어 오던 결혼과 관련된 관습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결혼의 모습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와 내가 서로 하지 말자고 이야기 했던 함, 예단, 예물 등을 모두 하고 있었다. 결혼 준비로 바쁘던 중 아내가 조심스럽게 “결혼하면 화장품세트도 받고, 다이아몬드 반지 목걸이 세트도 받고 그런다고 친구들이 알려주네”라고 말했다. 운전 중이었는데 바로 차를 멈추고 준엄한(?) 목소리로 “결혼이 그런 물질적인 걸로 평가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 따위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누구야?”라며 화를 냈다. 정말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아내에게는 결혼이 물질적인 것이 되어선 안된다고 가르치듯 말하고, 함, 예단 등등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내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춘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사실 당시 너무 가난해서 둘이 모은 돈을 합쳐봐야 서울 외곽에 전셋집 하나 얻을 수 없었다. 은행에서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부터 먼저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에게 보탬을 받는 여유는 기대할 수 없었고, 대출을 받아 겨우 서울 외곽에 13평 전셋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소위 ‘결혼’이라면 ‘이런 것들은 해야 하지 않니?’ 라는 요구에 주체적으로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끌려다녔다. 당시 결혼기념으로 샀던 비싼 시계는 이제 장롱속에서 잠자고 있다. 

  

우리 둘만이 아니었다. 항상 도움을 주시던 고모님께서는 집안의 맏며느리에게 예물을 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다이아몬드 보석세트를 마련해 주셨다. 결혼할 때 다이아몬드를 안 맞추면 사랑하는 조카가 평생 아내에게 구박받는다는 말씀과 함께. 고모님의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당시는 그냥 돈으로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께서는 며느리로부터 반상기, 이불세트 등등을 예단으로 받고 싶어 하셨다. 사실 이건 나중에 안 일이다. 이건 정말 아니라 생각해 처음부터 예단 등등을 단호하게 안하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고, 어머니도 수긍하셨는데 속마음은 아니었다. 2년 후 동생 결혼을 준비하던 중 어머니는 제수씨에게 “큰아이 때는 형편이 안 되어서 예단을 못 받았는데, 이번에는 하고 싶다”라는 의향을 밝히셨고 결국 여러 가지 예단을 받으셨다. 고부 갈등의 촉매제가 되는 이 사건은 아내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더 자세히 해부해 보도록 하겠다. 

  



결국, 진보적인 척 하면서 살고 있었던 나는 결혼도 진보적으로 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철저하게 표준화된 ‘소비’의 틀 안에서, 철저하게 관습화된 ‘가부장제’의 틀 안에서 결혼했다. ‘아빠’가 되기 위한 전 단계인 ‘남편’이 되는 과정은 머릿속으로는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철저하게 정해진 틀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습의 연속이었다. 



벗어나 보자 - 40대가 되면 세계 일주 여행을

  

아파트 복도와 현관 쪽에 두 명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 베란다 쪽으로 미닫이 문을 열면 나오는 거실 겸 큰 방. 그 사이에 작은 주방과 욕실. 입주한지 20여 년이 된 낡은 아파트였지만 다행히 살 집을 찾았고, 복작거리는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결혼 초반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매일 밤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 집에서 함께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더 좋았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주로 머물렀던 거실 겸 방에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걸어놓았다. 목표는 ‘자유롭게 벗어나기’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매일 세계지도를 보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카페의 세계일주 카페에도 가입해 웹상으로 세계를 돌아다녔다. 지금은 세 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는 게 힘들어 여행을 못 다니겠다고 하는 아내는 당시만 해도 혼자서 1달 넘게 인도 여행을 다녀온 고수였다. 둘 다 배낭여행식으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신혼여행도 보름 정도의 일정으로 터키를 돌아다녔다. 야간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2-3만원 정도의 저렴한 숙소에서 자면서도 재미있었다. 매일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아이는 낳아서 뭐하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용산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이 암울한 땅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건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 아니냐며, 그냥 지금 하는 일 하면서 돈 좀 모아서, 세계일주나 다녀오자. 그래 40살이 되면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떠나자. 지구에 태어나서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구 곳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매일 밤 술을 먹으며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살다가 40대가 되는 시점에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했다. 결정은 했지만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비겁하고 겁 많음이 어디 가겠는가? 아이는 언제 생기냐는 양가 부모님의 질문에 아이를 안 낳고 살다가 세계여행을 가겠다는 이야기는 확실하게 하지 못하고, 헤헤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벌써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미래를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황스럽게도 그가 왔다.

  

나름 피임을 잘 해오고 있었다. 준비가 부족했던 건 딱 한 번이었다. 피임도구가 없어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아이는 그렇게 쉽게 생기지 않아. 삼신할매가 점지해 줘야 해. 걱정 마”라고 이야기했지만, 쉽게 아이가 생겨버렸다. 아이고 삼신할매여. 계획에 없는 아이가 생긴 이후로 아내와 내가 술먹으며 떠들던 ‘자유로운’ 삶의 방향은 폐기되어야 했다. 임신테스터로 확인한 후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진(?) 받은 후 어떠한 감정의 흐름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내는 분명 아직도 그때의 감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신체에 변화가 생긴 아내보다는 나의 충격과 공포가 덜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산과 육아에 대해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에게 대부분의 부담과 책임이 지워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내는 이때부터 깊은 우울의 터널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내는 나와 같은 일을 했었다. 당시 나는 여러 학원을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며 일하고 있었고, 아내는 그 중 한 학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내는 재미를 찾아볼 수 없는 나와는 달리 학생들을 정말로 즐겁게 해주며,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는,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이었다. 범생이처럼 재미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시간 내내 나도 잘 모르는 현학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와는 달랐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강사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소위 말하는, 집에서 애 키우며 살림만 할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육아와 가사노동의 가치가 금전적으로 폄하되어 환산되고, 돈을 벌러 나가는 일만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아내는 자아의 상실로 우울함의 극단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핵가족이 일반화 된 요즈음은 육아와 가사노동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다. 아내는 오롯이 혼자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아야만 했다.

  

때마침 나는 대형학원에 전임강사 자리를 얻게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할 때보다 시간을 자율적으로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새롭게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1년에 두 번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강의평가에서 일정 점수 이하를 받으면 그만두어야 하는 살벌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긴장감에 아내를 살피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의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내 할 일만 충실하게 하면 될 일이었는데. 혼자서 패배감을 느끼며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출산과 육아는 아내의 몫, 경제 활동은 나의 몫으로 구분되었다 생각하고 돈버는 사람으로의 삶에 충실했다. 

  

사실 아내의 임신 중에는 크게 나와의 사이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임신 중에도 계속 일을 하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파주에서 결혼이민자들과의 활동도 하고 있었다. 겨울에 먹고 싶어 하는 딸기를 못 사주고 새콤달콤 캔디로 대체한 일은 두고두고 욕을 먹고 있지만 여러 사회적 활동을 하던 시기라 크게 상실감에 시달리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고,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되자 아침에 준비해서 출근하면 그만인 나와는 달리 아내는 홀로 남겨져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매일을 보내야 했다. 아내가 정말 과격하게 ‘엄마’라는 임무에 내던져진 것과는 다르게, 나는 ‘아빠’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잠깐 안아주고, 기저귀 갈고, 목욕시키는 일만 하면 ‘훌륭한’ 남편이자 아빠가 될 수 있었다. 



표준화의 기억 2 - 육아서와 소비 천국 육아박람회

  

나중에 아이가 이 글을 본다면 ‘계획하지 않고’ 낳았다고 섭섭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단, 예쁘게 방긋 웃고 있을 때만) 절로 미소가 나올 만큼 행복을 준다. 부성애란 이런 것인가? 내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돈을 열심히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훌륭한 인물로 키워야겠다고 다짐하며 책으로 육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삐뽀삐뽀119』라는 성경과 같은 반열의 책이 있다. 아마 지금도 판을 거듭하며 육아라는 새로운 세계의 허허벌판에 서 있는 부모들에게 길잡이를 해 주고 있을 것이다. 틈날 때마다 책을 읽었고, 성문종합영어도 완벽하게 한 번 못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두 번 이상을 통독했다. 아이의 성장단계별 행동 및 질병, 대처방법, 훈육법등이 초등학교 시절 동아전과처럼 총망라되어 있었다. 책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수유, 수면, 표준 발육치에 대한 점검등. 당시에는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책에 나온 대로 아이가 몇 시간 간격으로 넙죽넙죽 모유를 받아먹고, 트림을 시키고 나면 잠들고, 책의 그래프처럼 키가 크고 몸무게가 자란다면, 이건 뭐 옛날 다마고치 캐릭터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너무 쉽지 않은가? 사실 아이의 특성을 모르고 나와 아내가 정말 책에 나온 대로 아이를 잘 키운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모유 시기를 지나 이유식을 할 때였는데, 책에서 가르쳐 준대로 유기농 재료들을 사다 잘게 다져서 죽을 만들어주니 너무 잘 먹는 것이었다. ‘아! 우리의 이런 노력이 아이에게 통해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잘 먹는 구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냥 아이는 먹는 것을 원래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육아서마다 말하는 것도 다 다르다. 서양사람들은 아이들을 어린시절부터 따로 재우고 단호하게 육아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미국인이 쓴 『베이비 위스퍼』라는 책은 아마도 아이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라고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육아서들이 더 단호한 육아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어쩌란 말이냐? 육아서대로 해도 안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수면. 정말 징하게도 잠을 안잤다. 육아서의 지침에 따라 애착인형 만들어주고, 매일 정해진 규칙대로 잠자리에 들고 등등을 해봤지만 별 수 없었다. 9살인 지금도 아이는 잠들기 싫어한다. 그의 타고난 특성이다. 아마도 밀린 잠은 사춘기나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자겠지. 

  

육아서를 꼼꼼하게 읽고 도움을 받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육아서에 대한 집착을 낳았다. 아내와 나처럼 주변에 함께할 사람이 없이 아이를 키우는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육아서가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새롭게 아내와 나의 삶에 등장한 존재가 있다. 서로 낯설다. 낯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이를 ‘키운다’는 일은 결국 한 존재를 어떠한 지향점을 향해 가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 서로 낯선 부보와 자식이 상대를 파악하고 삶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도 ‘해야 한다’는 당위로 아이에게 나의 리듬을 맞추라고 강요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이유를 묻지 말고 당연히 안되는 것이라 단호하게 금지한다. 나도 잘 못하는 일이지만 공동체적 가치, 타인에 대한 존중,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등이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 가치다. 어찌하겠는가 아이도 부모의 이런 생각의 리듬을 알아가야지. 언젠가 부모의 이런 리듬에 반항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또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우리사회에서 아이를 정말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윗세대가 가진 경험과의 단절 속에서 결국은 소비문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내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내는 어린이 그림책 전집을 200만원어치 구매했다. 헉! 좁은 집에 동화책 300여권이 굴러다녔다. 전집을 사주는 건 좋지 않다. 아이가 직접 책을 고르도록 해야겠지 않겠냐 등의 핀잔은 아내의 분노를 불러왔고, 왕창 부부싸움을 했다. 하지만, 전집을 거부했을 뿐이지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면 책을 사줘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육아 소비의 끝판왕은 육아 박람회라 하겠다. 박람회장에 가 보면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출산부터 육아까지’라는 박람회의 표어처럼 성장시기별로 아이에게 필요한 의/식/교육/완구에 이르기까지 관련한 상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거의 모든 유아동 상품들이 나와 있기 때문에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겠다는 결연한 소비의지가 생긴다. 이것만 사면 아이가 교육적인 기능을 누리며 놀이하고 ‘정상적’ 발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이 무언가를 소비한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일까? 소비를 하고 싶은 내 만족이 아닐까? 초보 아빠가 되고 나서 내 역할을 하는 방법은 소비였다. 표준화된 아빠의 삶을 살기 위해선 열심히 돈을 벌어 소비를 통해 아이를 훌륭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했다. 



대안학교 출신의 명문대 학생

  

실제로는 표준화된 ‘소비 육아’를 하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또 진보적인 척 하고 있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가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가 ‘대안학교를 다녀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간다면 참 좋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대뜸 ‘하나만 똑바로 하자!’라며 일침을 놓았다. 맞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난 김칫국을 먹고 있었다. 아이의 존재를 만나기도 전에 그의 길을 정해버렸다. 심지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의식 있고 진보적인 아빠’로 보여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명문대에도 합격하는 만능인을 뱃속의 아이에게 기대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교육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한 후 ‘중산층 이상 자녀에게 울타리 쳐주기’라고 대안학교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어떤 학교에 가던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내가 학교 수업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 있을까? 사실 학교는 친구들이랑 밥 먹고 놀기 위해 다녔고, 공부는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대안학교를 보내야겠다는 나의 생각은 또 하나의 소비였고, 대안학교를 문화자본을 지닌 사람들의 상징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나왔다. 아내의 일침에 뜨끔하며 다시 한 번 내 생각을 되돌아보고 반성했다. 그래, 정말 대안적 삶을 살든가, 아니면 체제에 순응적으로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만 하자. 그리고 그 선택의 주체도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앞으로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삶을 마주치고 그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려 하지 말고, 그가 만들어가는 삶의 방향을 존중하고, 고민이 있을 때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앞으로는 어떤 아빠?

  

이제 아빠로 9년차가 되었다. 초보 아빠라고는 할 수 없는 경륜(?)을 갖추었지만, 아빠는 매 순간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고정된 아빠의 틀이란 없다. 나와 아이 그리고 아내의 구체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아이가 6살 때까지는 돈버는 아빠의 역할에 충실했다. 누구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돈 벌어 돈 쓰는 것이 좋아서 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한이 몰려왔다. 이대로 더 하다가는 정말 없어보이게도 ‘내가 처자식을 먹여살리느라 청춘을 다 바쳤다’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금전적 보상 이외에는 보람이 없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은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라며 처자식을 버리고 한 달여간 혼자 여행도 다녀왔다. 하지만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진 아빠와 남편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다가와 야구를 하러 가자고 하면 함께 신나게 논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잠 잘 때는 엄마를 찾지만 신체적으로 놀고 싶을 때는 나를 찾는다. 나는 그 역할에 내 신체가 가능한 한에서 부응해주면 된다. 좀 더 나아가 공동육아로 다니던 어린이집에서는 재정이사를 담당했고, 지금 방과후 공동육아에는 적극 참여하지 못하지만 가끔 간식을 만들고, 일일 선생님으로 한 번 참여하기도 했다. 딱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아빠의 역할인 것 같다. 아이에게 목표와 로드맵을 설정해주고, 학원 계획을 짜서 효율적으로 학습을 시키는 등의 일은 내가 감당할 수 없다. 아들에게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의 표본이 되는 아빠는 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감당할 수 없다. 나도 나의 삶이 있다. 4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내가 행복해야 아들과 아내도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하기 이전에 난 나의 행복과 삶을 먼저 찾으려 한다. 말초적 쾌락을 주는 술담배와 무분별한 소비이외에 의미를 부여할 일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내려질 수는 없겠지만, 계속 고민을 해 나가고 답의 윤곽을 찾는다면 변화무쌍한 모습의 유연한 ‘아빠’와 ‘남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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