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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누가 이 아이들을 키우는가?

by 북드라망 2018. 12. 28.

누가 이 아이들을 키우는가?



논이 있는 아파트


나는 집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려주고 끝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살 집을 처음 그리고, 지어지는 마지막 과정까지 함께 한다. 그 사이 좋든 싫든 그들의 삶에 일부분 관여하게 된다. 하다 보니 느낀 점은 어떤 집에서 사느냐에 따라서 삶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혼 후 아내의 학교 근처에 복도식 아파트를 얻었다. 요즘엔 복도식 아파트가 거의 없다. 사생활에 방해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옆집 이웃을 만나기는 쉽지만 어쩌면 그 이유로 비교적 집값이 저렴하다. 신혼이고 아이도 없던 터라 이웃은 다소 형식적으로 대했다. 


첫째를 가질 즈음 코아식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한 엘리베이터에 보통 두 세대인 흔히 보는 아파트 구조이다. 그런데 그곳은 신기하게도 아파트 바로 뒤에 논이 있었다. 겨울이면 논바닥에 물을 얼려 무료 썰매장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다만 근처 골프장에서 뿌린 농약으로 그 논의 쌀은 안 좋을 거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주변에 경기도박물관, 어린이박물관, 백남준아트센터, 지앤아트스페이스, 한국민속촌 등도 있어 맘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가까운 이웃이 생긴 점이 좋았다.




전에 살던 곳보다 학교에서 멀어졌지만, 아내와 같은 학교 선생님들 세 가족이 함께 이사를 하면서 이웃이 되었다. 그것도 우연히 같은 동에. 더군다나 한 가족은 우리 위층에 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자주 모이게 되었다. 옆집 아이가 갓난아기 때부터 자라는 것도 보았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세 가족 중에 제일 먼저 태어난 그 아이는 어느 덧 12살이 되었고 이제 우리 옆집에 살고 있다.

난 그때 사회초년생이었고 주말도 없이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 육아는 오롯이 아내의 몫인 소위 독박육아였다. 첫째를 모유 수유하던 아내에게, 그리고 야근을 야식처럼 먹던 나에게도 세 이웃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 않았을까. 


식탁을 바꿨다고 해서 구경 가고, 치즈가 있다고 해서 와인을 사 들고 가고, 다들 식구가 적다보니 음식 나눠 먹는 건 일상이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그 동네에는 아련한 향수가 남아 있다. 최근에 다시 가보니 그사이 개발소문만 무성하고 아직 논은 그대로였다. 



아빠는 놀이터를 배회한다


아내의 복직으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다. 같은 동에 살던 위아래 이웃들 없이 나의 육아가 시작되었다. 엄마들은 그나마 동네 커뮤니티라도 있지, 아빠들은 놀이터에서도 혼자다. 그래서 아빠들의 육아도 어떤 의미에서 독박육아인 셈이다. 첫째와 함께 다른 아이랑 놀아주다가도 엄마가 오면 괜히 머쓱해지고 긴장된다. 지금은 문탁네트워크에 드나든 덕분에 아줌마들이 더 편해졌지만, 그때는 놀이터에서 만난 엄마들이 낯설었다. 상대방도 그랬는지 ‘어머, 아이가 몇 살이에요?’라고 시작되는 대화는 거의 없었다. 


최근 한 잡지사 기획으로 육아선배로서 아빠들의 육아토크에 초대된 적이 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아빠들은 엄마들의 커뮤니티를 배회하고 있었다. 다만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누구는 알뜰신잡 같은 정보를 얻었고, 누구는 다른 엄마들의 공감을 필요로 했다. 아마도 아빠들은 전혀 안 볼 듯한 그 베이비 잡지에서 아빠들의 육아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첫째는 혼자 노는 데 집중력이 높은 편이다. 특히 뭐 먹으면서 혼자 책보는 걸 취미로 한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아빠랑 혼자 놀던 습관 때문은 아닌지, 그것이 아빠육아의 단점이었던 건 아닌지 종종 생각해 본다. 

다행히 이즈음부터 아내의 인연으로 시작해서 문탁을 드나들었다. 문탁이 ‘엄마 커뮤니티’는 아니지만, 문탁 식구들 대부분 아이를 키웠던 엄마들이었다. 내가 세미나 할 동안 첫째는 그들 품에서 잠이 들곤 했다. 놀이터를 배회하던 아빠의 독박육아는 그렇게 구원받았다. 그리고 문탁 식구들은 첫째의 돌잔치부터 초등학교 입학까지도 챙겨주었다. 



집짓고 같이 살까


나의 육아가 끝날 즈음 둘째의 출산으로 우리는 다시 논이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듯. 이번에는 첫째가 다니는 아파트 가정어린이집의 엄마, 아빠들 중 네 가족이 동네친구가 되었다. 동갑내기의 아이들에, 엄마 아빠들도 비슷비슷한 또래였다. 바닷가로 놀러가서 트럭도 같이 타고, 강원도에 있는 펜션으로 같이 놀러갔고, 휴가철 시간을 맞춰 전남 고창에서 모이기도 했다. 아이들 핑계로 어른들이 신나게 놀러 다녔다. 우리가 이사를 안 갔다면 그들과 어디선가 맥주를 먹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어린이집 엄마 아빠들과 신나게 놀며 지내는 사이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아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몇몇 학부모들과 선생들을 대상으로 작은 마을을 조성하려고 하는데, 그 마을에 들어오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 제안의 시작은 우리의 결혼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식 준비로 한참이던 때, 우리는 주례선생님으로 아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한 분을 모시기로 했다. 좋은 인품으로 후에도 여러 결혼식 자리에 모셔졌지만, 주례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마을조성 초기 마음을 내어 추진하시던 그분은 몇 번의 상의 후에 그 일을 나에게 한 번 해 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오셨다. 그 인연으로 내가 속해 있던 건축그룹은 4년여에 걸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함께 만들었다. 

같은 동에 살고 있는 학교 선생님 세 가족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생각보다 토지 및 건축비용이 높아서 개별주택을 짓기 어려웠지만, 세 가구는 그 마을에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같은 학교 선생님 한 분을 더 모아서 네 가구가 같이 사는 다가구주택을 계획했다. 

  

일반적으로 다가구주택은 토지와 건물을 한 명의 건축주가 소유하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는 방식의 집이다. 반면 다세대주택은 소유자가 여러 명인 집이다. 토지와 자금 등의 조건으로 우리는 소유자는 한 명의 형식이지만, 임대가 아닌 공유하는 개념으로 다가구주택을 계획했다. 사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경우는 매운 드문 사례이다. 허나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기회가 주어지면 다음에 하겠다. 그렇게 세 가구는 논이 있는 아파트에서 다시 다가구주택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렇게 네 가구가 함께 모이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과 마당을 공유하고 다른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된 집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삼촌과 이모가 될 것이다. 혼자 아이를 키우지 말고 같이 돌보면 좋겠다, 싶었다. 





낯설지만 일반적인 경험

  

둘째가 아직 기저귀를 못 땠을 때, 논이 있는 아파트를 팔아 공사대금으로 지출했다. 그리고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잠시 전셋집에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 낯설었지만 일반적인 경험을 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어느 다가구주택의 2층이었다. 

일단 집구조가 독특했다. 남쪽으로 거실을 배치하기 위해서였는지, 나머지 방 세 개는 복도식으로 나란히 붙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들이 다 고만고만했다. 그 중에 가운데 방은 딱 창고 사이즈여서 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방들 맞은편으로 주방과 화장실이 마주하고 있었다. 거실이외에는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 달리 보면 하숙집에는 딱 맞는 구조였다. 

  

문제는 집주인 아들이 1층에 살았는데 그 집 아이가 우리집 아이들보다 어렸다는 것이다. 뒤꿈치에 슬슬 굳은살이 잡히는 사내아이와 기저귀차고 돌아다니는 둘째가 있는 집이 조용할 리가 없었다. 똑똑똑. ‘저기요, 아랫집인데요. 너무 시끄러워서 아이가 잠을 못 자요.’ 놀이매트를 거실에 빈틈없이 깔았다. 똑똑똑. ‘저기요~’ 저녁이후엔 깨금발로 돌아다녔다. 똑똑똑. ‘저기요~’ 이건 말도 안 되는 부실공사거나 ‘소머즈’의 귀를 가진 분들이 틀림없었다. 아니다. 요즘 같이 층간소음에 민감한 사회에서 그 정도로 참아준 고마운 분들인지도 모른다. 

  

집 건너편에 있는 두유대리점도, 근처에 있는 작은 동네도서관도, 거의 매일 다니시는 고물상 할아버지도, 겨울에 반바지로 갖다 올 수 있는 마트도, 거실에 붙어 있는 작은 발코니도, 그 위를 비춰주던 가로등도, 둘째가 처음 변기에 똥을 눴던 기억도 좋았다. 그러나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아내와 내가 단둘이 키우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보통 전세계약기간은 2년이다. 그 사이 집은 다 지어지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붕이 올라가고 도배가 마무리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마을은 도로포장도 안 됐고 사방이 공사현장 같았지만, 전세기간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이사했다. 지금까지 이사도 여러 번 했다. 거의 2년에 한 번 꼴로 그 동안 5번 이사를 했다. 하지만 그 마을로 들어가면 당분간 이사는 안 할 듯싶다.



아이들이 알아서 놀 수 있는 관계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이 마을에 여럿 살다보니 둘째는 이집 저집 돌아다니는 게 자연스럽다. 마을의 아이들은 주말이면 ‘아점’을 챙겨먹고 집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모여서 자기 집들을 순례하며 놀기 시작한다. 그럴 때 아이들은 불쑥 현관문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적게는 한두 명이고 많게는 대여섯 명이 모여 논다. 조금만 커도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수 있기에 우리집은 아예 잠금장치를 풀어 놓기도 한다. 

  

네 가구가 모여 사는 다가구에서는 둘째 찾기가 더욱 어렵다. 네 집 중 어디에서 놀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부모가 그래도 되냐고? 살아보니 그렇더라. 이 마을에서는, 네 가구가 모여 사는 다가구에서는 되더라. 내가 아니어도 위아래 집 누군가가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와 일대일인 상황에 지속적으로 놓인다는 게 사실 독박육아의 한 단면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여 사는 다가구의 관계 속에서는 아이와의 관계가, 특히 주말에는, 일대일인 경우가 적은 편이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내 아이만 돌보는 것도 아니게 된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의 경우는 둘째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만나게 되는 부모의 관계도 다양해졌다. 초등방과후 모임을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등-하원을 같이 하는 네 가족이 한 번 두 번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각자의 집에서 엄마, 아빠들의 저녁모임도 하고, 주말이면 서로의 집으로 몰려다니며 어울리게 되었다. 마치 둘째가 다가구의 집들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첫째는 동네의 집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주말에 집에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그 집에서 잘 놀고 있겠거니 안심도 된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것도 아닌데 동네에서 그렇게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노는 집들이 있다. 

  

물론 다가구에 살면서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아래집의 민감한 층간소음문제도 있고, 아이들 사이의 다툼이 부모의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아내의 경우 같은 학교에서 일하다보니 문제가 집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동네에서 등-하원을 하면서 친구가 된 네 가족도 늘 평온하지만은 않다. 놀이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다르기도 하고, 많은 아이들이 함께 하다 보니 통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모임의 자리가 괜히 부부사이의 문제로 붉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아닌 울타리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내 아이에게도, 그리고 아빠인 나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가 아빠로만 있지 않게 되고, 시선이 내 아이에게만 머물지 않고, 가족의 울타리에서 한발 떨어져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그 관계 속에서 누구의 말처럼 아이도 스스로 자라지만, 아빠도 같이 커가는 듯하다. 다가구 가족들과 동네 친구들에게 감사한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태도

  

나는 아이를 키우는데도 공동육아를 만들거나 대안교육에 적극적이지 않은 편이다. 맹모처럼 아이를 위해 집을 옮겨 다닐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집단으로 만들려 노력하진 않는다. 특별하게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가 초등방과후에 다니면서 어쩌다보니 몇몇 가족이 모여 있게 되었고 함께 아이가 커가는 걸 보게 되었다. 아내 덕분에 알게 된 선생님들과 같은 마을에서 집도 짓게 되었다. 공동육아를, 모여 사는 집을 바란 적은 없지만 어느새 아이도 나도 그 속에서 잘 지내고 있다. 놀이터를 배회하던 아빠의 육아시절에도 문탁식구들이 함께 아이를 키워주었다. 그 이후로도 아이들을 아내와 나라는 울타리 속에만 있진 않았었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논이 있는 아파트로, 논이 있는 아파트에서 골목길 다가구주택으로, 그곳에서 다시 함께 사는 마을의 다가구주택으로, 그리고 동네에 사는 친구들도 함께 했다. 그런 만남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서, 동네에서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방향이 생기는 듯하다.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싶다. 아니, 이렇게 키우는 게 맞는 거구나, 싶다.

  

글_청량리(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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