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겁 없는 40대를 위하여

겁 없는 40대를 위하여



어머니께서는 엄마와 아기 코끼리의 다정한 모습이 태몽에 등장했다고 하셨다. 코끼리 두 마리가 폭포가 있는 호수에서 코로 서로 물을 뿜어주며 목욕하고 있는 장면이 너무나 평화로웠다고 한다. 태몽을 근거로 너는 사는데 큰 걱정하지 말라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였다. 어머니의 태몽처럼 지금까지 평화롭게 큰 탈 없이 살아왔다. 아니다. 많은 큰일이 있었지만 그 일을 무던하게 넘겼던,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나의 성격 탓에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더듬어보았다. 정리를 하고 보니 참 모순이 많다. 내 안에 여러 ‘나’가 살고 있는 느낌이다.  




두려움과 소심함


고향인 경상남도 진해에서 벚나무에 기어올라 버찌를 따먹느라 손과 입이 까맣게 되었던 일이 흐릿하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엄마가 네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을 낳으러 이모와 함께 조산원으로 간다며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다. 그러니 아마도 내 나이 다섯 살. 엄마가 없는 동안 할머니, 막내삼촌과 함께 일주일 정도 지냈었다. 동네 국민학생 형들을 따라 돌아다니며 벚나무에 용감하게 오르는 큰 형들을 부러워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시절부터 겁이 많았던 나는 나무에 오르기는커녕 밑에서 형들이 떨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며 버찌를 받아먹고만 있었다. 나무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무서웠다. 고향에 대한 가장 먼 기억은 ‘겁쟁이’ 꼬마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강아지들과의 관계도 어린 나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골목에 개가 있으면 담벼락에 바짝 붙어 게걸음으로 피해 다녔다. 뛰어서 도망치는 나를 따라온 작은 개가 바짓자락을 물었을 때의 뒷골이 뜨끈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처음 강아지를 쓰다듬어 본 일이 아마도 국민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된다. 게다가 울음이 많다. 중학교 1-2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울었다.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꾸지람을 하시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70cm의 덩치 좋은 중학교 1학년생이 선생님께 지적을 받았다고 눈물짓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달라졌지만 40대가 된 후 다시 운다. 얼마 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주인공인 이선균에게 공감하며 엉엉 울었다. 한 청년의 삶에 진정으로 공감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진심을 다하는 중년의 남성을 보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울컥했다. 사춘기 이후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40대가 되고나니 어린 시절의 소심함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여전히 빨간 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길을 건너지 않는다. 상급자가 시키는 일은 질책이 걱정되어 열심히 한다. 규칙과 규율은 꼭 지켜야 한다. 상급자가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경우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그래서 아직도 개를 만지지 못하고, 고양이를 피해 다니며, 사소한 일에 눈물을 글썽이고, 학교 규칙을 잘 따르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볼 때면 아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웃음이 난다. 유전자의 신비여.



근자감


하지만 비공식적 일상에서 사람들과 마주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겁이 덜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장남인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 부모님, 결혼 안 한 세 명의 삼촌, 한 명의 고모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서울에 취직한 큰삼촌과 군대 간 둘째 삼촌과의 기억은 많지 않지만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막내삼촌과 시집가기 전이었던 고모는 장조카인 나를 참 많이 좋아해주셨다. 마당에 있던 무화과나무에 올라 무화과를 따 주곤 했던 막내삼촌은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면 항상 같이 놀아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후에도 지금은 숙모님인 여자친구와 놀러갈 때 자주 나를 데려갔었다. 고모도 마찬가지로 나를 많이 예뻐하고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삼촌과 고모의 친구들은 사랑방처럼 우리 집을 이용했었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탄 덕분에 소심한 내가 그나마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한 대가족들은 나를 많이 사랑했고, 칭찬하고, 추켜세우고, 관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런 가족들의 사랑은 내가 가진 모든 일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의 기초가 되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이런 사랑들은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돈을 조금씩 모아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고, 자식이 셋이나 되는 고모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든 졸업식에 참석해 주셨다. 심지어 대학입학 후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매달 30만원씩을 용돈으로 보내주셨다. 모든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아버지께서는 대가족의 가부장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셨다. 삼촌들과 고모를 공부시키고, 분가시키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내 안 저 깊숙이 숨겨져 있는 가부장적 사고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사실 입으로는 리버럴을 말하지만 내 안에는 경상도 특유의 보수성과 꼴통 ‘사나이’성이 남아 있다. 이 부분은 아내와의 관계를 이야기 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무모하고 과감한 서울행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 집안 사정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과외금지조치로 인해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영업에서 가장 만만한 것은 음식점. 진해 시내에 한식집을 차렸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문을 닫게 되었고,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때 과감하게 서울행을 감행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와 나는 많이 다르다. 만약 내가 당시의 아버지였다면 지금까지 30여년 이상을 살아왔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결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겁을 내고 주저하면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아버지가 생존의 절박함으로 어쩔 수 없이 과감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생존의 위기가 와도 최대한 현상을 유지하는 방법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어쨌건 아버지는 서울로 와서 취직을 해 직장에 잠깐 다니셨지만 그만 두고 다시 자영업의 길로 나섰다. 식당, 우유보급소와 쌀가게 등 몇 번의 자영업을 하면서 부모님 두 분은 매우 바쁘게 지내셨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혼자라서 좋아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께서 동생만 데리고 먼 외가로 도망(?)쳤다.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힘들게 일하면서 결과도 좋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다툼이 많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3개월가량으로 기억되는데, 사실 어머니의 부재가 좋았다. 나만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집에 있는 빈병들을 팔아 500원가량을 마련하고 버스종점에 가서 서울 중심지로 가는 버스를 탄다. 서울 중심지까지는 약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개포동에서 출발한 288번 버스는 말죽거리를 지나 흑석동을 찍고 한강대교를 건너 남대문을 지나 서울을 일주했다. 창밖으로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남대문 시장에 내려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걸어가 배가 고플 때 까지 책을 봤다. 나와서는 붕어빵 몇 개를 사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의 비밀 여행은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 까지 3-4번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일탈은 아니었다. 나를 돌봐주시는 할머니께는 친구집에 놀러간다고 말씀드리고, 정해진 시간에 집에 도착하는 치밀함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혼자서 무엇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고 재미있다. 혼밥, 혼술 이라는 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혼자서 밥먹고 술먹기의 재미를 알고 있었다. 여행도 혼자 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혼자서 여행하면 뭔 재미가 있냐고 심심하다고 하지만, 일정에 쫒기지 않는 느긋한 여행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볼 계기가 된다. 재작년 겨울 멕시코와 쿠바를 20일간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멕시코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와 동행을 하기도 했지만, 숙소에서 나와 서로의 여행루트를 찾아가고 밤에 숙소에서 만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노천카페에서 모히또를 시켜놓고 하루 종일 음악을 듣기도 하고, 센트로라 불리는 도시 중앙 광장의 나무그늘 아래에서 시가를 사라는 동네 아저씨와 잘 통하지도 않는 스페인어 단어 몇 개로 대화를 이어가 보려고도 했다. 무작정 혼자 살사학원에 찾아가 세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배우기도 했다. 나, 나름, 쿠바 유학파 살사 댄서다. 

  


뭐라도 좀 확실히 해야 하는데


나에겐 약간의 문자 중독증이 있다. 모든 어린이에게 아버지는 절대적인 진리이며 모방의 대상이다. 나도 아침마다 신문을 한 시간 정도 정독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스포츠면에서 시작한 신문읽기는 잡다한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사회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고, 1987년 노태우가 당선된 대통령 선거부터는 정치면으로 까지도 확대되었다. 신문을 매일 한 시간씩 읽는 습관은 계속 이어져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올해 여름까지도 집에서 종이신문을 구독했었다. 신문을 읽으며 단어를 배웠고, 사회 이슈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관심은 다른 쪽의 독서로도 이어져 도서관이나 90년대 유행하던 책대여점에서 닥치는 대로 여러 종류의 책을 읽었다. 읽을 거리가 없으면 청량음료 뒤에 붙어 있는 성분표라도 읽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지만, 교과 공부에 크게 관심과 흥미를 가지지는 못했다. 요즘 티비에 나오는 ‘공부의 신’처럼 계획을 세우고 몰입해서 공부해 본 적은 없다. 한 권의 참고서를 완벽하게 마무리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성적을 잘 받아 칭찬받고 싶은 인정 본능은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고, 시험 기간이면 그나마 공부하는 흉내를 내며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공부를 안 하면서 꿈은 ‘법조인’이었다. 어린 시절 대가족 구성원들의 칭찬과 기대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더한 허세를 낳았다. 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공부를 안 하는데 성적이 잘 나올 수 있나. 그렇다고 마음 놓고 신나게 놀지도 했다.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닌데 잘하는 것도 아닌, 놀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그다지 재미있게 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태도로 고등학교 때 까지 지냈다. 


다행이었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신문을 비롯한 많은 글을 읽고 가지게 된 얕은 지식과 독해력 덕분이었다. 대입시험이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면서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학력고사형 모의시험을 보면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수능으로 대입시험이 바뀌면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와 자료를 대략 읽어보면 문제 속에 답이 보이는 문제들이 많았다. 꾸준하게 암기하고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않아도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있었기에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서 절대적인 시간 투입이 필요한 영어 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파파고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할 수밖에. 열심히 하는 자세가 없다면 반짝이는 창의성이나 상상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 



내 인생의 사춘기


계속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한 결과 의도치 않았던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법조인이 꿈이라면서 왜 정치학? 사실 이건 내 허세의 결과다. 나의 장래희망과 일치하는 선택은 법대 진학이었다. 하지만 견고한 학벌체제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이름이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고, 원서를 쓰는 날 그나마 비슷해 보이면서도 합격 커트라인 점수는 낮은 정치학을 선택했다. 별 생각 없이 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의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꾸준하게 열심히 공부하는 재주가 없었지만 학교가 재미있었다. 개강 첫날 노교수님께서 한 말은 아직도 기억난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모든 내용을 거짓이라 생각하며 듣고 비판하세요.” 고등학교 시절과 다른 접근과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다. 늙수그레한 복학생 형들이 교수님의 의견에 문제제기를 하며 진행되는 충격적인 수업을 긴장하고 숨죽이며 재미있게 지켜보기도 했다. 발제를 하고 비판에 반비판을 계속하는 수업에 참여하며, 비판적 사고에 대한 집착이 생겨버렸다. 사회현상이나 이론에 대해 조금은 시크하게 “그 이론은 사회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군”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지적 허세를 즐겼다. 법조인이 되어 있어 보여야겠다는 허세는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허세로 이어졌다.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이 현상을 무언가 다르게 비판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 속에 살았다. 자연스럽게 운동권에 있는 선후배들과 친하게 되었다. 노동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고, 정치외교학과의 학회에도 들어가 철학, 정치경제학 책을 읽고 세미나를 했다. 하지만 선천적 겁쟁이가 어디 가겠는가? 운동권 언저리에서만 겉돌면서, 당시 학교에 조금 남아 있던 학생운동조직의 세미나 제안에는 덜컥 겁이나 생각해보겠다고만 하고 도망쳤다. 그렇다고 해서 학술적으로 심화된 공부를 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또 보이고 있었다. 있어 보이고 싶어서 도대체 뭐라 하는지 알 수 없는 글들이 실려 있던 『키노』라는 영화잡지를 장식품으로 들고 다니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예술영화들을 보러가서 졸다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아 이게 뭔가? 계속해서 이도 저도 아니게 살고 있었다. 결국 군대를 다녀와서는 사법시험을 준비해보겠다고 휴학을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 6개월을 머물렀지만, 성실한 태도가 없는 나에게 암기와 반복을 해야 하는 시험은 적합하지 않았다. 쉽게 포기했고 그럭저럭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래저래 귀동냥한 얄팍한 지식들은 시스템에 충실하게 살아오던 나에게 그것을 벗어나는 일이 더 본질적이고 멋있을 수 있다는 또 다른 허세를 가지게 해 주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포섭에 대한 유인과 배제에 대한 공포’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 곳이 대학이라는 공간이었다. 만약 대학에서 방황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친구들과 모여 주식, 가상화폐, 골프, 부동산투자, 재테크를 이야기하며 어정쩡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차피 어정쩡한 삶을 산다면 주식, 부동산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점들을 고민하며 리버럴한 척 어정쩡하게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




대학교 4학년 1학기가 끝난 후 덜컥 취직이 되었다. 자동차와 철도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별 고민하지 않고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을 했고 인사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면접에서 노동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고 이야기 하고 98-99년 노동자대투쟁에 대해 민주노총의 입장에서 말했다. 당시 민주노총 금속연맹 산하 노조가 있던 회사라 나의 합격이 의아했다. 임원들과 인사담당자는 노련한 시각으로 진보적인 척 하고 있지만 독일인 아이히만처럼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인 나의 비겁한 본질을 한 눈에 파악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역시나 난 회사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사무직 여성은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으로만 뽑고, 사무보조업무를 주로 시킨 후 결혼을 하게 되면 퇴사시키는 회사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규칙을 잠자코 따르지는 않았다. 창원 공장의 직원 하나가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에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직장인데, 결혼한다고 그만두라는 것은 불합리하며 근로기준법에도 어긋나는 일’이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인사팀의 다른 직원들은 먼저 퇴근했고 약속이 있어 사무실에 혼자 남아 웹서핑을 하고 있던 중 우연히 그 글이 올라온 후 10여분 만에 내가 제일 먼저 읽게 되었다. 조회 수는 2. 나는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화면을 캡쳐하고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라고 지방노동청에 신고했어야 옳다. 하지만 조직의 임무에 충실한 나는 급하게 전산실에 연락해 글을 내려달라고 선조치 한 뒤 창원 공장에 전화해 해당 직원의 팀장에게 상황을 알렸고, 퇴근 한 인사팀장에게 연락해 전화로 조치사항을 보고했다. 다음 날 인사팀장과 담당 임원에게 앞으로 우리 회사를 이끌어 갈 훌륭한 인재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다고 엄청나게 칭찬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올바름을 생각하지 않고 조직의 부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용기내서 올린 글이 삭제되고 팀장에게 불려가 욕을 먹었을 그 직원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너무 밉고 싫었다. 체제에 포섭되고 싶어 안달하며 한 사람의 정당한 문제제기와 요구를 짓밟아버렸다. 훌륭한(?) 인재가 퇴사해서는 안 된다는 팀장과 담당임원의 한 달 여의 설득을 물리치고 1년 정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 목표는 대학원 진학. 계급배반투표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계획을 잡고 석사과정에 등록했다.



아버지와 나 - 평행이론


오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대학 공부를 다 하지 못하셨다. 이유는 할아버지의 병환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던 할아버지께서는 평소에 약주를 좋아하셨다.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점심때 막걸리 반주를 한 잔 하시고 숙직실의 찬 다다미방에서 잠깐 주무시다가 뇌졸중이 와서 거동이 어렵게 되셨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께 침을 놓고 약을 처방받았지만 차도는 없었고, 오랜 시간 병석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고향에서 입시학원 수학 강사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제사를 지낼 때마다 항상 신세 한탄을 하셨다. 할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나는 크게 마음먹은 대학원 공부를 다 하지 못했다. 이유는 아버지의 병환 때문이다. 여러 가지 자영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부동산 관련 일을 하면서 돈을 좀 벌기도 하셨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많은 곳이라고 10여년을 채 못채우시고 다시 식당을 시작하셨다. 대한민국에서 식당이 성공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운영이 어려워졌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는지 갑자기 뇌졸중이 와서 거동이 어렵게 되셨다. 중환자실에 1달 넘게 계셨고, 병원을 전전하며 재활치료를 받으셨지만 한쪽 손발을 쓰지 못하시고 10년 넘게 어머니의 수발을 받으며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집에 모아둔 돈이 없어 대학원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강사 일을 하면서 처음엔 혼자 침대에 누워서 울면서 아버지를 원망하는 일도 많았다.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소비요정


아버지 덕분에 일을 시작한지 벌써 햇수로 15년이나 되었다. 아침 6:00 ‘오리꽥꽥’ 알람소리를 들으며 일어난다. 10분만 더 자고 싶다. 아니다. 10분 늦게 나가면 30분이 지체된다. 힘겹게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회사의 위치는 서울역이다. 용인에 살기 때문에 아침 6:30 이전에 출발하면 45분이 걸리지만 7시 전후로 출발하면 막히는 경부고속도로 때문에 1시간 이상이 걸린다. 7시가 조금 넘어 회사에 도착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오늘 수업 진행을 점검해 본다. 나는 재수생 종합반 학원에서 논술을 강의한다. 종합반 학원 강사의 생활은 일반적인 회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 8:10에 1교시를 시작하니 그 전에 출근해야 하고, 점심시간은 12:30부터, 마지막 교시와 질의응답을 모두 마치면 17:00에서 18:00 정도. 욕심을 부려 저녁 특강을 하면 밤 열시가 되어야 끝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년 2월부터 11월까지 일한다. 딱히 일이 재미있는 건 아니다. 좀 더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지불한 수강료 만큼의 지식을 내놓으라는 노골적 태도를 보이는 아이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료사이의 우정? 그런 것도 없다. 강사라는 직업이 팀워크가 필요하지 않고 고독하게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 그런지 각자의 개성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충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을 만나는 순간에는 그들에게 최대한 충실하게 신경 쓴다. 그러면 나는 별로 재미도 없는 일을 왜 15년씩이나 하고 있을까? 작년 겨울 이틀 동안 제주 올레를 혼자 걸으면서 내린 결론은 의외로 간략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어서였다. 툴툴거리면서도 일을 계속 하고 있는 이유는 쉽게 돈을 벌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소비에 충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맛과 재미? 물질적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에 매몰될 때 느끼는 변태적 쾌락? 딱히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돈 벌고 쓰는 재미로 10년 이상을 버텼다. 좋은 집, 차, 음식 등을 소비하는 것이 힘들게 일하는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 생각했다. 학원 강사 일이 나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난 그냥 다른 일보다 쉽게 돈 벌고 쓰기 쉬운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었다. 나의 꿈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는 대안적인 삶이라 입으로는 말했지만, 실제로 소비요정이 꿈이었다. 대안적 삶을 찾아 무모하게 도전하는 건 어린 시절 골목에서 만난 으르렁거리는 강아지보다 만 배는 두렵다.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할 때 - 변화의 바람은 밖에서 불어온다


어영부영 살다보니 벌써 40대 중반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크게 ‘다른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학교 결석하지 않고 착실하게 다니고, 운 좋게 대학에 입학했다. 졸업해서 한 가지 직업을 15년이나 이어가면서 물질적 정신적으로 폭포 아래에서 목욕하는 코끼리 모자처럼 편안하게 살아왔다. 타고난 겁은 나의 삶을 스펙터클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굴러가도 크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 내 삶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만간 업계를 떠나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벌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되는 한 사교육이 망하는 일은 없겠지만, 입시환경의 변화는 내가 일하고 있는 종합반의 존립을 어렵게 한다. 대한민국 사교육의 민낯에 대해서는 아들과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어쨌건 내가 종사하고 있는 업계가 더 이상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교육부에서는 내가 강의하는 논술과목에 해당하는 각 대학의 논술전형을 재정지원과 연계해 ‘폐지 유도’한다고 한다. 



이제 조만간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앞으로 몇 년간은 내가 의도하지 않은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것 같다. 세상에 내 자유의지대로 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입시정책의 방향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다고 20대 이후 그랬던 것처럼 겁에 질려 흘러가는 대로 내 삶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나의 삶의 흐름에 긍정적인 영향과 용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허세와 힘을 빼고 내 삶의 모순점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용감한 태도로 주어진 운명에 부딪힌다면 정말 있어 보이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글_우자룡(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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