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단 한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가 되기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푸코와 마르크스



알튀세르가 1964년 『자본론을 읽자』에서 푸코에 대해 이렇게 경의를 표한다. “인식의 저서들을 독서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던 거장들, 즉 과거에는 가스통 바슐라르와 카바이에스이며 오늘날에는 조르주 캉길렘과 미셸 푸코인 그들” [각주:1]알튀세르는 자기 제자였던 푸코의 책들을 ‘개척자적 작품’ 또는 ‘해방의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알튀세르는 “그는 내게서 차용한 의미나 용어들이 그의 사상과 붓 아래에서 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되었다”고 가벼운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사실 푸코는 평생 알튀세르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다. 어쩌면 말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알튀세르는 푸코의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대단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루이 알튀세르



68-70년 푸코는 벵센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68 혁명에 크게 놀란 프랑스 정부가 이른바 ‘고등교육 개혁’에 착수하는데, 그 결과가 파리의 벵센느 숲 안에 세운 ‘실험대학’ 벵센느 대학이었다.[각주:2] 사람들은 그곳에 좌파들이 우글거린다고 수군거렸다. 어느 보수 신문에 “벵센느 실험대학의 교수들은 모두 좌파다”라는 표제의 기사가 실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마르크스 이론가와 정신분석학자인 알튀세르와 라깡의 제자들이 대거 철학과 교수로 부임되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앙리 베베르, 프랑스와 레뇨, 주디트 밀러 등 기라성 같은 좌파 철학자들이 속속 합류했다. 강의 제목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제2기 이론:스탈린주의’(자크 랑시에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제3기 이론:마오이즘’(주디트 밀러), ‘20세기 마르크시즘 입문:레닌,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 흐름‘(앙리 베베르) 등등 좌파이론 일색이었다. 그러나 푸코는 ‘삶의 과학들의 인식론’, ‘니체’라는 제목으로 그들과는 아주 동떨어진 주제(?)를 가지고 강의를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좌파들의 온상, 벵센느는 끊임없는 시위와 운동에 빠져 들었다. 특히 교수들을 표적으로 삼는 학생들의 도전 때문에 푸코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푸코는 어느 누구보다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다. “벵센느의 교육이념이 현대 세계를 공부하는 것인데, 어떻게 철학과가 ‘정치에 대한 성찰’을 피할 수 있겠는가?”[각주:3]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변에 둘러싸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쇠막대기를 기꺼이 들었고,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半)미치광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지긋지긋해졌다”라고 친구들에게 은밀하게 푸념을 한다. 역시 그는 서고에 들어가 사유의 역사를 탐색하는 것이 본능인 계보학자인 것이다. 그 시절 이후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푸코야말로 마르크스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했던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1967)라는 짧은 강연에서 마르크스를 19세기의 새로운 해석학자로 등극시킨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말과 정반대의 평가이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그러지 않았는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1)[각주:4]라고. 푸코의 색다른 평가는 니체를 경유하여 이루어진 시선이었다. 니체는 철학자들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의식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는 관념(그래서 찾아낸 것이 달랑 ‘나’ 아닌가!)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해보았자 사실 그 속에 대단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표면적인 해석의 순환만 있을 뿐인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파보았자 흙일뿐이고, 그 흙들은 땅 밖에 나와 다시 땅위에 쌓이면서 다시 땅의 표면이 될 뿐인 거다. 그렇다면 땅을 파보았자, 끊임없이 표면만 있는 것이 아닌가.




푸코는 니체, 프로이트, 맑스가 이런 사실을 꿰뚫어 보고 사물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 기존에 통념적으로 사용하던 기호의 성질을 바꾸어 놓았으며, 그 기호가 통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방식을 새롭게 수정했다고 말한다.


“해석의 미완성(incompleteness of interpretation), 즉 해석이 언제나 갈가리 찢겨 있고, 그 끝자락은 언제나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는 이 사실은 꽤 유사한 방식으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게서 기원의 거부라는 형태로 다시 발견된다. 맑스는 ‘로빈슨 크루소적 경제(Robinsonade)’의 거부라고 말했으며, 니체는 시작(beginning)과 기원(origin)의 구별을 중요시했고, 프로이트의 연원적이고 분석적인 방식은 항상 미완성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각주:5]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화폐와 자본과 가치라는 개념들이 사실은 극히 상투적인 것(platitude)일 뿐인데도 부르주아들이 그것들을 아주 심오한 뜻이 있는 양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그 개념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괴물도, 심오한 불가사의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각주:6] 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모든 대상의 심오성, 모든 대상의 궁극적 해석을 부정한다는 것. 어쩌면 부르주아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상투적인 것들을 심오한 것이라고 은폐하면서, 역설적으로 심오하다는 ‘상투적인’ 관념을 사회에 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들이 사용한 개념들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들 논리의 끝까지 따라가 단지 배치만을 바꾸는 방식으로 그들에 대항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노동을 노동력으로 벽돌 하나만 바꾸는 방식으로 말이다. 푸코 말대로 부르주아가 사용하는 기호의 성질을 프롤레타리아의 방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의미의 연속상에서 푸코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마르크스의 걸출한 글을 예로 들어 마르크스는 자신의 해석을 궁극적인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극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마르크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라기보다는(사실 푸코는 마르크스를 폄하도 경의도 표하지 않는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해석하는 지평이 달라졌고, 따라서 ‘순환적인 해석의 시대’를 맞이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살피기 위함이 더 크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은 기호의 배치를 바꾸어 세계의 변화를 위한 하나의 해석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기호를 사용하지만 배치를 달리하여 다른 해석을 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것 말이다. 이 의미에서 푸코는 마르크스가 해석 그 자체를 비판했다기보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이비 해석들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푸코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마르크스'에 대해서 '19세기 어항의 물고기'라며 과소평가하는 발언을 초창기부터 서슴없이 해왔다. 특히 푸코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것으로만 구성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이론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푸코는 그의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에서 명시적이진 않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알튀세리안들의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매우 민감한 언급들을 하곤 했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나 국가이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 등 강의록 여러 곳에서 그런 민감한 발언들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각주:7]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푸코는 그의 주저 『감시와 처벌』에서 『자본』 을 인용하며 자신의 ‘규율권력’ 개념을 다듬었다. 예컨대 푸코는 독특하게도 마르크스가 분석한 “결합노동일(combined working day)” 개념에 시선을 돌린다. 예컨대 한 사람의 하루 노동시간이 12시간일 때, 12명이 결합하면 144시간이 된다. 그런데 한 노동자가 하루에 12시간씩 12일 일하여 144시간 일하는 것보다, 12명이 동시에 결합해서 하루에 일하는 144시간이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즉, 결합노동일의 노동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으로서 매우 독특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독특한 개념이 공장 노동자들을 모두 동일한 규율에 따르도록 요구하게 된다는 점이다. 동일한 규율을 통해 기계와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결합하여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규율은 단지 개인의 신체를 배분하고, 그것으로부터 시간을 추출하여 축적하는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힘을 조합하여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 된다.[각주:8] 


이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AIE)[각주:9]와 어느 정도 같은 개념이기도 하다.[각주:10] 하나의 ‘억압적 국가장치’(appareil répressif d’État, ARE)가 있겠지만, 그것은 공적인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사적인 영역에 오면 다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작동한다. 학교, 교회 등을 통해서 사회적 노동이 가능한 노동력이 되도록 질적으로 구성해낸다. 다시 말하면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순종적으로 일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 내어야 진정한 노동력인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규율권력’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푸코는 스승인 알튀세르로부터 배운 개념들이나 통찰을 은밀하게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더 진전된 형태로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지점에서 논의가 끝나면 모두 아포리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주체가 단지 권력에 의존하여 구성된다면 어떻게 새로운 주체가 가능할 것인가? 그저 장치가 만들어 놓은 순종적인 주체만 생성될 것이 아닌가? 푸코도 알튀세르도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다. 어쩌면 마르크스까지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이 아포리아는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것이고,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을 발표할 때까지도 이 아포리아를 벗어나지 못한다. 들뢰즈도 이 시기의 푸코에 대해 “하나의 출구를 발견하면서 다른 출구들을 막아 버린 것 같다”[각주:11]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만큼 푸코의 아포리아는 동료들에게도 심각한 의문을 갖게 하였다. 

  

바로 이 시점에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주제를 거쳐서 만난 주제가 ‘주체 변형의 문제’, 즉 ‘영성의 문제’이다. 푸코는 또 다른 강의록인 『주체의 해석학』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그가 말하는 ‘영성’(spiritualité)이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나 실천, 그리고 경험들을 말한다. 그것은 주체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수련들과 실천들이다.[각주:12] 어떤 진실을 깨닫고,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수동적으로 듣고서만 획득되지 않는다. 진실은 위험한 실천 속으로 들어가야만 그 대가로서 획득되어지는 것이었다. 

  

푸코는 이 주제를 기반으로 철학사 전반을 재구성하는 시도를 한다. 우선 푸코는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을 가지고, 그가 주체 존재의 변형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런 문장들을 보라. “이 모든 것들[부, 명예, 감각적 쾌락-인용자]이 어떤 새로운 습관을 시작하는 데 상당히 방해가 된다는 것을,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은 서로 크게 대립되므로 우리들은 하나를 아니면 다른 것을 필연적으로 포기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내가 알았을 때, 어떤 것이 나에게 유용한 것인지 나는 탐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각주:13] 그리고 ‘어떤 삶의 규칙들’[각주:14]이란 제목으로 나열한 몇 가지 규칙들을 보라. 그는 자신의 주체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기 위해서 어떤 대가로 치루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접근이 칸트, 헤겔, 셸링, 쇼펜하우어, 니체, 후설,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철학자들에게도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영성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높이 평가하지 않고, 심지어 비판적이기까지 하더라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인식행위’(activity of knowing)는 반드시 영성의 요청(requirements of spirituality)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각주:15] 즉 은밀하게 숨겨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영성 없는 인식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푸코는 심지어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들은 철학사에 재출현한 새로운 영성주의자들인 것이다. 


결국 푸코는 19세기 철학사는 데카르트 이후로, 즉 17세기 철학 이후 사유의 역사는 ‘영성의 구조’(주체 변형의 구조)를 다시 성찰하게 된 역사였다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면 진실을 주어진 것으로만 생각하고 이미 해석된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이것이 푸코의 데카르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영성과 인식, 이 두 가지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각주:16])에서 벗어나, 진실을 획득하기 위해서 주체는 자신을 어떻게 변형해 나가야 하는지 성찰하는 철학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푸코는 묘하게도 '영성의 문제'가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에서도 다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체 변형이 동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또한 혁명 이후에도 사회주의 공동체 변화와 동행적인 의식을 갖기 위해서 부단한 주체 혁명이 불가피하다. 어쩌면 사회주의 혁명은 영속적인 주체 혁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정작 정신분석학자들과 정통 마르크시스트들은 자신의 이론 속에 내재되어 있었을 이 영성의 문제를 계급, 당, 조직이라는 사회 형식(social forms)만을 내세워 은폐했다.[각주:17] 사회 형식의 변화와 함께 주체 변형의 문제를 동시에 고민해야 하는데도 언제나 사회 형식의 변혁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푸코는 함정에서 벗어나 ‘주체가 변형되는 장소’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체는 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주체 자체도 실체가 아니라 권력관계라는 새로운 통찰로부터 시작된다. 주체 자체가 자기와 자기와의 권력관계에 의해서 구성되는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주체가 관계를 벗어나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주체도 하나의 관계 속에 구성되며, 그것은 더 나아가 자기와 자기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이다(이것도 명백히 칸트의 경험적-초월론적 주체의 새로운 전유와도 관계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각주:18]) 이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주체는 자기가 자기와 투쟁하면서, 그리고 아마 그것은 사회투쟁, 예술투쟁 등 다양한 다른 관계와 함께 형성될 것이다. 그 투쟁의 기술들, 역사들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그리스·로마의 사유에 파묻혀 있던 바로 ‘자기배려’의 대륙인 것이다. 자기배려는 주체 형식과 사회 형식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우고 회복하는 것이다. 신학과 통치기술에 의해 서로의 고리를 폭력적으로 끊어버린 곳을 연결하고 다듬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는 정신의 윤리적 장치인 것이다. 


세네카는 훌륭한 영혼은 나쁜 영혼, 즉 영혼의 오류 이전에 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언제나 주체는 바꾸어나가야 할 존재이며, 또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낙관적 통찰이다. 푸코는 이 통찰을 이어받아서 우리가 어떤 나쁜 상태에 있더라도 스스로를 재건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단 한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자기가 되기”(To become again what we never were is)를 권한다.[각주:19] 마치 나쁜 영혼이 역설적으로 ‘주체 변형의 장소’이기도 하다는듯, 어떤 어긋난 영혼, 오류의 영혼이야말로 새로운 주체로 가는 출발이라고 속삭인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걸출한 박사논문인 에피쿠로스의 우발성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은 알튀세르가 천착했던 “우발성의 유물론”[각주:20]과 만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넘어선 새로운 마르크스로 세상을 바꾸는 출발이 되는 것이 아닐까.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하)』, 박정자 옮김, 시각과 언어, 1995, 112~113쪽. [본문으로]
  2. 현재는 파리 8대학이다. 위치도 자크 시라크가 파리 시장으로 있었을 때 벵센느 숲(이곳은 상징적이게도 NATO 군대가 물러난 자리이다)에서 파리 도심 생-드니로 이전하였다. 지금은 생 드니의 뱅센느 대학(Université de Vincennes à Saint-Denis)이라 불린다. 푸코 시절 정식 명칭은 뱅센느 실험대학 (Centre universitaire expérimental de Vincennes)이었고, 뱅센느 대학(Université de Vincennes)으로 불렸다. 이전 당시 학교 이전을 교수와 학생들이 완강히 반대하자 고등교육장관이 한말은 유명하다. "그들이 성질내는 이유가 뭐죠? 이전할 새대학 건물들은 자유로, 레닌가, 스탈린그라드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될 텐데요.“ 생-드니에 있는 파리8대학의 위치는 좌파기관들이 많이 있다. [본문으로]
  3. 디디에 에리봉 지음, 『미셸 푸코(상)』, 박정자 옮김, 시각과 언어, 1995, 21쪽. [본문으로]
  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최인호 외 3인 옮김, 박종철 출판사, 1991, 189쪽. [본문으로]
  5. 미셸 푸코 외 지음, 「니체, 프로이트, 맑스」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9, 38쪽. ; Michel Foucault, 「Nietzsche, Freud, Marx」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Edited by James D. Faubion, Translated Robert Hurley and others, The New Press, 1998, 273쪽. [본문으로]
  6. 미셸 푸코 외 지음, 「니체, 프로이트, 맑스」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9, 37쪽. ; Michel Foucault, 「Nietzsche, Freud, Marx」 『AESTHETICS, METHOD AND EPISTEMOLOGY』, Edited by James D. Faubion, Translated Robert Hurley and others, The New Press, 1998, 273쪽. [본문으로]
  7. 미셸 푸코 지음,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 도서출판 논장, 2011, 103쪽, 345~346쪽. [본문으로]
  8. 미셸 푸코 지음,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2003, 257~258쪽. ; Michel Faucoult, 『DISCIPLINE AND PUNISH-The Birth of the Prison』, Translated by Alan Sheridan, VINTAGE BOOKS, 1977, p. 163 [본문으로]
  9. “하나의 억압적 국가장치가 존재하는 반면, 다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존재한다. 단일화된 억압적 국가장치가 완전히 공적인 영역에 속하는 반면, 외견상 흩어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대부분은 반대로 사적인 영역에서 유래한다.”(루이 알튀세르 지음, 『아미앵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90쪽.) [본문으로]
  10. 강민혁 지음, 『자기배려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 103쪽. 이런 주장은 오래전부터 사토 요시유키 등 여러 사람들이 해왔고 최근에는 진태원 선생님 등 한국 학자들도 관심을 갖고 하고 있다. [본문으로]
  11. 들뢰즈·가타리 지음 「욕망의 쾌락」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들뢰즈·가타리의 정치적 사유』, 이호영 옮김, 푸른숲, 1997, 108~109쪽. [본문으로]
  12.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58쪽. ; Michel Foucault, 『The Hermeneutics of the Subject』,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PICADOR, p. 15. [본문으로]
  13. 스피노자 지음, 『지성 개선론』,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15, 18쪽. [본문으로]
  14. 스피노자 지음, 『지성 개선론』,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15, 25~26쪽. [본문으로]
  15.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67쪽. ; Michel Foucault, 『The Hermeneutics of the Subject』,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PICADOR, p. 28. [본문으로]
  16. 이 주제는 최근 2017년 가을 프랑스철학회에서 발표한 김은주 선생님의 발표문 「푸코-데리다 광기 논쟁을 통해 본 데카르트라는 사건」을 참조할 수 있다. 종합토론 시간에 데카르트의 『성찰』은 영성의 전통과 인식의 사고가 중첩된 텍스트인 것 같다는 의견은 참고할만 하다. [본문으로]
  17.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68쪽. ; Michel Foucault, 『The Hermeneutics of the Subject』,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PICADOR, p. 29. [본문으로]
  18. 강민혁 지음, 『자기배려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 112~120쪽. [본문으로]
  19.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132쪽. ; Michel Foucault, 『The Hermeneutics of the Subject』,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PICADOR, p. 95. [본문으로]
  20. 알튀세르의 “우발성의 유물론”은 후기 사상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70년대 루소 강의에서도 우발성의 역사를 줄기차게 이야기해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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