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능성들』 새로운 물신, 혁명의 순간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능성들』

새로운 물신, 혁명의 순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지막 "나귀의 축제" 장면[각주:1]은 볼수록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딘지 아주 장엄하다. 신이 죽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도 우중(愚衆)들은 나귀를 대상으로 다시 경건하게 신앙을 찾아 나선다. 특히 지체 높은 경배자들이 연도를 하자 그때마다 나귀가 마치 신의 목소리인양 “이-아” 하고 화답하는 장면은 교회 미사와 오버랩되어 무척이나 현대적이며 영화적이다. 이 장면은 제 발로 거렁뱅이가 된 자,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와 그림자가 쫒고 쫒기는 장면과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연극적이고 영화적인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 다 자기 이외의 것, 자기 자신을 구속하고 마는 것에 자기를 의탁하는 피로한 자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랫동안 이 장면을 그저 신이 죽은 자리에서 신앙의 부활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만 해석해 왔다. 그런 해석만으로도 니체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라는 걸출한 인류학자의 글들을 읽고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다. 그것도 니체와는 멀어도 한참 먼 경제학의 통념들을 뒤집는 전복적 희열을 느끼면서 말이다.


경제학은 애초에 도덕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학문이었다. 경제학은 시장들의 기능과 시장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들이 스스로 자동조절된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중앙 집권적 통제장치 없이도 ‘보이지 않는 손’(이른바 ‘가격’)에 의해 스스로 작동한다는 것. 가격이 비싸지면 수요가 줄어들고, 공급은 는다. 그 순간 초과 공급이 생겨서 다시 가격이 싸지고,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균형가격에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는 원리. 이 신기한 장치가 작동하자마자 등장하기 시작한 경제 이론가들이 시장은 잘 작동하는 균형 체계이며, 심지어 인간 본성에서 유래된 자연스런 체계라고 주장하였다. 시장이라는 제도가 영구불변해 진 것이다. 근대이래 수백 년 동안 이런 경제 체제를 당연한 것처럼 산 것은 경제학이론이 기여한 바가 엄청나다. 그래서 뒤집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레이버는 이런 완고한 체계에 균열을 가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이라니. 그러나 그레이버가 이야기하는 상상력은 공상과학에 나오는 그런 상상력은 아닌 듯하다. “상상력에 권력을(give power to the imagination)”이란 1968년 혁명의 슬로건이 지시하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 그러니까 경제학에 의해 영구불변 체제가 된 현대 사회를 넘어서는 사회를 만들려면 어떤 특정한 상상을 사회적 실재에 부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68혁명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기존의 완고한 사회적 실재를 바꾸려면 오로지 국가(정부)라는 억압적 메카니즘을 통해서만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을 것처럼만 상상했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다른 상상이 있다고, 더군다나 실제로 존재한 적이 있는 저항적 ‘실재’들에 기초한 급진적인 상상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정통 맑스주의가 보지 못했고, 무시하기까지 했던 주제, 그러니까 가장 ‘정신적인 주제’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정신의 개조가 필요하다는 듯이.[각주:2]

 

그레이버에게는 인류학(anthropology)이란 바로 그런 상상력의 실제적 원천들을 찾는 작업이다. 68혁명의 이론가인 카스토리아디스(Castoriadis)는 역사 자체를 상상력이 사회적으로 구속된 것(제도화)에 대하여 새로운 상상력으로 대항하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레이버는 99%가 경제학적 통념으로 가득한 세계일지라도 이런 새로운 상상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 1%의 인류학적 자원에 ‘실제로서’ 숨겨져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인류학에서 일종의 “상상의 민족지(ethnography)”를 발굴하여 소개하고, 새로운 상상을 구성하려고 한다. 상상 그 자체에 대한 인류학을, 그러니까 상상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 왔는지를 생생한 인류학적 자료를 찾아 보여주는 것이다. 


근대 예절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농담관계’와 ‘회피관계’를 설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친구들처럼 서로 조롱하고, 희롱하고, 괴롭히는 그야말로 무례하고, 비격식적인 관계를 ‘농담관계(Joking relation)’라고 하는데, 대개 평등한 관계이다. 반면 사회 내 어떤 한 집단(노예들)이 다른 한 집단(귀족들)을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고, 극단적인 존중과 격식을 갖추도록 하는 관계를 ‘회피관계(Relations of avoidance)’라고 하는데, 대개 위계적인 관계이다. 농담관계에 참여하는 자들의 신체는 상호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욕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동물 같은 것이어서, 야생적인 관계인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이 “생성하는 몸(a body in the act of becoming)”이라고 했던 그 카니발적 신체다.[각주:3] 그러나 회피관계에 참여하는 자들의 신체는 상호 회피한다. 즉 신체는 닫히고, 신체의 모든 구멍은 막히고 폐쇄된다.[각주:4]

 

사실 회피관계에 있는 자는 타부(tabu)를 가진 사람, 즉 추장이나 왕에 불과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농담관계였던 것. 그러던 것이 ‘문명화과정’을 거치면서 회피가 일반화되는 단계에 이른다. 국가가 강제력을 독점하면서, 신하들의 공격적 충동(이것은 농담관계를 구성하는 충동이다)을 억누르게 된다. 이것이 완전히 내면화되고, 궁정을 너머 신흥 부르주아지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농담관계의 평등적인 상상력들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 이후 그런 상상력(자연과 연결되었다는 상상력)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 즉 카니발적 장소(the place of the carnivalesque)[각주:5]에서만 용인되는 것이 되었다.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상상력은 제한되고, 들뜬 신체는 진정되었다(drying out)[각주:6]. 그만큼 예절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상상력의 조절과 연관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경계 지워진 관계, 경제학이 제시한 세계관만 남게 된 것이다. 

이런 상상의 중대함은 소비(consumption)의 개념을 인류학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소비는 원래 파괴하고, 태우고, 증발시키고, 낭비하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것이 나오려면 기존의 것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철학자 바타유(George Bataille)가 문화의 본성은 야생의 희생적 파괴와 같은 비합리적 행동에 존재한다고 봤던 것도 이것 때문이다. 북아메리카 연안의 포틀래치는 엄청난 양의 재화더미에 추장이 불을 붙이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연출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위한 엄청난 소비였던 것. 현대의 소비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소비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욕망을 다르게 이해하게 한다. 사실 욕망은 필연적으로 상상을 포함한다. 욕망의 대상들은 항상 상상적 대상들이다. 즉 어떤 끌림이나 상태에 부과하는 상상적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헤겔의 인정욕망을 여기에다 얹어 설명하면, 모든 욕망의 대상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생성된 상상적 구조물이다. 동물들이 단지 성적 충동만을 가지고 섹스를 한다면, 인간은 단지 섹스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와 함께 섹스를 할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즉 그들은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욕망은 상호 인정을 상상하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인정하는 상상력을 선취하여 조작할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이미지(상상력을 조정하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다른 이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을 ‘구속하는’기술(광고 등)을 발전시키게 된 것은 이것 때문이리라. 상상력을 제한하여 오로지 물리적 대상인 상품에만 집중하도록 구속하는 것, 바로 현대 소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진짜 즐거움이 물리적 대상을 소비하는 데 있지 않다고 단언하면서, 그 즐거움은 몽상 그 자체에 있다고 진단한다. 욕망은 상당 부분 상상에서 쾌락을 얻는다. 그렇다면 욕망의 충족은 재화의 소비보다 상상의 조련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제한된 재화를 소량으로 소비하면서도, 상상력을 새롭게 하여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다. 내가 직접 야채를 길러서 요리해먹고, 친구들과 낡은 기타를 들고 록밴드를 결성하여 우리들의 음악을 하는 것, 그것은 상상력에 기반한 창조적 소비주의이다. 상상력이 소비 그 자체를 수정한다. 

  사실 상상은 경험적인 영역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욕망은 근본적으로 상상에 의해서만 충족되어도 실제로 충족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데카르트에 와서 이것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상이 경험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후 꿈이나 마음속 그림들은 비경제적인 것들이 된다. 이제 케이크는 상상으로만 먹으면 먹은 게 아니고, 빵집에서 사서 실제로 ‘소유하여’ 먹어야만 먹는 것이 되었다. 상상이 사라지면서 경제만 남아 버린 꼴.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상상을 뒤엎고, 상상을 새롭게 직조하여 구성하면 기존 위계도, 기존 소비도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지점에서 그레이버가 꺼낸 카드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총체적 상호의존성’. 그는 시장이라는 것이 없어도 잘 작동하는 사회의 모습을 찾아 보여준다. 놀랍게도 두 집단 또는 두 개인 사이에서 서로에게 물품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무제한적인 협정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계약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 바로 공산주의였다는 것. 내가 보기엔 그것은 어떤 ‘믿음의 공산주의’ 같은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 밑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총체적으로 상호 의존해야만 돌아가는 사회일테니 말이다. 화폐를 중심으로 믿음이 구성된 공동체.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뜻밖에도 ‘물신주의(Fetishism)’이다. 물신은 사람이 만들거나 행하는 그 무엇이다. 의무적인 욕설도 물신을 구성한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맹세한 사람을 죽여 버릴지 모른다고 협박함으로써, 공동체의 물신은 강화된다. 화폐, 국가 등등이 바로 그런 물신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런 무언가를 창조하고 나서, 마치 그것이 자신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 이런 물신은 그 무엇도 표상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로 스스로 힘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 그것에 복종한다. 마치 그것은 사람들이 새로운 신을 창조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우리의 행동들(our own actions coming back at us)[각주:7]인 것이다. 데이비드는 바로 이 순간이 혁명적인 순간이라고 선언한다. 


“(아프리카 상인들의) 보통의 목표는 작은 시장체계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거래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교환 항목과 비율, 신용과 재산의 관리에 대한 규칙을 규정하는 것. 심지어 물신이 명시적으로 계약을 확립하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 아닐 때조차, 그것들은 거의 변함없이 새로운 무언가(새로운 시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공동체들)를 창조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최소한 처음에 모든 ‘총체성(totality)’을 잠재적이고 상상적이며 관점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이 정말로 결정적인 지점인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치 물신적 대상이 실제로 주체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상상적인 총체성(imaginary totality)이었다. 계약의 경우에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위반을 하면 그것이 당신에게 벌을 주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라.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혁명적인 순간이다”[각주:8] 


이제 다시 니체의 나귀 축제로 되돌아가보자.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지체 높은 인간들이  나귀를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을 구성하고 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화들짝 놀란다. “하나같이 다시 경건해졌구나. 기도를 하고 있구나. 실성들을 했나보다!” 두 사람의 왕, 실직한 교황, 고약한 마술사, 거랭뱅이, 나그네, 예언자들이 모두 어린애처럼 무릎을 꿇고 나귀를 경배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아”하는 나귀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들은 신을 다시 깨워 일으켰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내 당혹스러움을 거두고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두고 새로운 평가를 내린다. “나귀의 축제를 잊지 말라! 그것은 내 곁에서 생각해낸 좋은 징조(good omen)이다. 건강을 되찾는 자만이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낼 수 있으니 말이다”[각주:9]




나는 이 순간이 그레이버가 통찰한 그 혁명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지체 높은 자들은 기존의 신이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물신을 창조함으로써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이 새로운 물신 앞에서 헤쳐 나갈 길은 험난하고 낯설 것이다. 그러나 저 경배의 순간은 완전히 새로운 길로 들어선 순간임이 틀림없다. 아마도 경배는 새로운 물신을 둘러싸고 새로운 믿음으로 이루어진 행위이리라. 건강을 되찾은 자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행위로서 말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509~520쪽.; Friedrich 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by R. J. Hollingdale, Penguin Books, 1961, p. 319~326 [본문으로]
  2. 이 의미에서 나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이 가지는 가치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3.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40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18. [본문으로]
  4.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40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19. [본문으로]
  5.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80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40. [본문으로]
  6.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78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39. [본문으로]
  7.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216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136. [본문으로]
  8.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가능성들』, 조원광·황희선·최순영 옮김, 그린비, 2016, 228쪽. ; David Graeber, 『POSSIBILITIES』, AK Press, 2007, p. 142. [본문으로]
  9.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520쪽.; Friedrich Nietzsche, 『Thus Spoke Zarathustra』,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by R. J. Hollingdale, Penguin Books, 1961, p. 32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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