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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의 『전습록』 - 양지, 내 마음의 온당쾌락처

by 북드라망 2017. 7. 25.

왕양명의 『전습록』 - 양지, 내 마음의 온당쾌락처



중국 명나라 왕가에는 환관이 끊이지 않았다. 왕양명(王陽明)이 삼수 끝에 들어간[각주:1] 조정에도 곧 어린 황제가 들어서고, 환관들이 그 틈을 타 어김없이 날뛰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유근(劉瑾). 그는 뇌물의 액수에 따라 마음대로 인사를 결정했다. 당연히 간관(諫官, 군주의 과실을 직언하여 바로잡는 관리)들이 상소문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바로 투옥되고 만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열혈강호 양명, 가만있을 리 없다. 간언이 직무인 간관들을 투옥한 것은 지나친 일이며, 인심(人心)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상소를 했다. 그러나 통할 리 없었다. 오히려 유근에게 미움을 받고 양명도 곧 투옥되고 만다. 더군다나 ‘정장(廷杖) 40대’를 맞는 형벌까지 더해졌다. 궁전의 계단 아래[廷]에서 관리를 몽둥이로 내려치는 가혹한 벌이었다. 양명은 30대 정도를 맞아 의식을 잃고 다시 맞기를 반복하였다. 결국 다시 의식을 되찾긴 했으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각주:2]  



이 사건으로 양명은 서북방 귀주성 용장역의 역승(역사를 맡은 관리)으로 좌천된다. 감옥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 『易經』을 보고 점괘를 뽑아 보았다.[각주:3] 뽑힌 점괘는 명이(明夷)[각주:4]. 이 괘의 단사(彖辭)에는 이 괘를 “밝음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明入地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각주:5] 다시 말하면 명이는 해가 져서 땅속에 숨는 것이다. 양명은 밖은 유순한 태도를 지니되, 지혜는 안으로 감추고 참아야 한다고 여겼다. 유배의 시련을 감내하기로 하고 양명은 용장(龍場)으로 가기로 결단하였다. 


이때부터 평생 양명은 조용한 곳에서 체계적인 독서를 한다거나, 엘리트들과 지적 담론을 즐기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생활과는 멀어졌다. 북경에서 용장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한 도전이다. 형벌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양명은 잠시 병마가 덮치자 한 절에서 지내기도 하였고, 어떤 지방 태수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으며, 특히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인 굴원(屈原)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물론 심한 눈보라, 구불구불한 산길, 진흙탕길, 심지어 난파의 위험까지도 만났다. 더군다나 유근이 사람을 보내 살해하려고도 하였다. 사실 돌아갈 가망이 결코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컸다. 


그러나 용장으로 가는 길은 철저히 자기를 되돌아보게 한 둘도 없이 귀중한 길이 되었다. 용장에 도착하자 양명은 자신과의 진지한 투쟁에 들어간다. 이즈음에 양명은 외부세계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자기 내부의 근본적인 변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이런 생각이 끊이지 않던 어느 날 밤 중국사상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자정 무렵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갑자기 그는 격물(格物) 문제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듣는다.[각주:6]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명은 “나의 본성은 물론 성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외부의 사물에서 리(理)를 구하는 실수를 범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은 것이다.[각주:7] 그 유명한 ‘용장오도(龍場悟道, 용장에서 도를 깨침)’이다. 1508년 양명의 나이 37세, 형벌을 받고 용장으로 쫓겨 난지 2년. 어쩌면 용장으로 쫓겨나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므로 찾아온 깨달음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사의 모든 얽힘으로부터 벗어나서야 이런 깨달음이 찾아 왔으니, 용장으로 쫓겨난 것은 이 대오(大悟)가 연출한 사건이었을지도. 이로써 ‘용장(龍場, 롱츠앙)’은 중국사상사의 성지가 되었다. 


리(理)는 본래 외부 사물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心]에 내재해 있다는 용장의 깨달음은 가히 혁명적이다. 이것은 “마음은 텅 비고 영명하여 어둡지 않으니, 뭇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온갖 일이 여기서 나온다. 마음 밖에 이치가 없고, 마음 밖에 일이 없다”(虛靈不昧, 衆理具而萬事出, 心外無理, 心外無事)[각주:8]라는 문장으로 간략히 표현된다. 이것은 주자가 명덕(明德)을 설명하면서 “마음은 모든 이치를 통섭하여 (객관적인) 만사에 대응한다”(心具衆理而應萬事)고 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주자는 마음을 객관적인 이치[理]를 지각하고, 그 지각한 리에 따라 객관적인 외부 사물에 대응하는 ‘주체’로 파악한다. 그러나 양명은 마음과 이치는 원래부터 하나였고, 따라서 사물의 이치는 마음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그런 이유로 세상 모든 일들이 이 마음으로부터 산출된다고 보았다. 주자에게는 일단 마음과 이치가 분리되어 출발한다면, 양명은 애초 출발부터 마음과 이치는 하나다. 서로 출발과 결과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양명이 몸, 마음, 의념, 앎, 사물(일)을 하나로 엮어 설명해 주는 방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다음과 서애와의 대화에서 양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발한 것이 바로 의념이며, 의념의 본체가 바로 지(知)이고, 의념이 있는 곳이 바로 물(物)이다. 만약 의념이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이고, 의념이 임금을 섬기는 데 있다면 임금을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이며, 의념이 백성을 어질게 대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데 있다면 백성을 어질게 대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물)이며, 의념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 있다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이다.”(전습록권상 6조목)[각주:9]

  

몸은 마음이 주재하는데 이 마음은 의념(意)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의념(意)은 주로 실천적 의향을 말하는데, 넓게 보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말은 마음은 욕망으로 드러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양명은 이 욕망의 본체가 지(知), 즉 앎이라고 한다. 욕망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앎이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욕망[意]이 돋아나고, 그 순간 욕망이 옳은지 그른지를 바로 알아차리는 것이 앎[知]이다. 양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온갖 현실의 현상들은 이 욕망들이 맺히면서 천변만화하며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의념이 있는 곳이 바로 물이다(意之本體便是知)”라는 말에서 물(物)은 사(事), 즉 실천적 활동을 포함한 모든 현상들을 일컫는다. 양명은 어린아이가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이 바로 사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각주:10] 결국 마음이 몸을 주재하는데, 이 마음은 욕망으로 드러나고, 그 욕망이 옳고 그른 것은 앎이 알려 주며, 또한 욕망은 고립되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의 실천적 활동과 더불어서 함께 구성된다는 것. 그래서 양명은 이렇게도 말한다. “뜻[意]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던 적이 없으며, 반드시 사물에 부착되어 있다.”(意未有縣空的, 必着事物)[각주:11] 욕망[意]은 사물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몸[身]-마음[心]-욕망[意]-앎[知]-현상[物]이 하나로 주르륵 엮인다. 


 사실 모든 현상(사물)이 마음에 따라 있다면, 좀 이상하게 여겨질 것도 같다. 그렇다면 서양철학의 대표적인 관념론자인 버클리의 생각과 같은 것 아닐까 싶은 것이다. 깊은 산에 홀로 핀 꽃은 내 마음에 없으면 없는 것인가? 나아가서 내가 보고 있는 모든 사물들이 내가 보지 않으면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양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 이 꽃과 그대의 마음은 함께 적막한 곳(고요함)으로 돌아간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는 이 꽃의 색깔이 일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각주:12] 양명은 의(意)가 없다면 꽃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꽃을 보지 못하면 마음은 꽃과 함께 고요함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양명은 꽃이 홀로 피고 지는 것의 실재성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꽃을 보았을 때에야 그 꽃은 내 마음에 의미 있게 다가와서 욕망을 일으키고, 따라서 그 순간에야 꽃은 일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花顔色一時明白起來]는 점이다. 욕망과 현상의 부착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나면 양명의 트레이드마크인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좀 더 선명해진다. 양명의 비유처럼 격물은 마치 거울을 닦아 그것을 밝게 하는 것과 같다.[각주:13] 여기서 ‘격(格)’은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 잡는다[格君]고 할 때의 격이다.[각주:14] 앞에서 전개된 논지를 다시 적용하면, 몸은 마음이 주재하고, 그 마음은 욕망으로 드러나며, 다시 그 욕망이 부착되어 사물과 현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물과 현상들을 바로 잡으려면 욕망과 함께 바로 잡아야 한다. 따라서 격물은 실천적 행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마음공부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과 사물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안 된다. 욕망이 일어났을 때 옳고 그른 것을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양명도 이를 분명히 이야기한다. “격물은 치지의 공부다. 치지를 알았다면 이미 격물을 안 것이다. 만약 격물을 알지 못했다면 치지의 공부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각주:15] 격물을 모르면 치지의 공부란 게 있는지도 모르므로 그것을 맛보지도 못한다[未嘗].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러나 치지하여야 격물할 수 있다. 결국 양명은 지의 문제로 되돌아와 고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옳고 그름’이 도덕적 선·악을 판별하는 일이라면, 다시 도덕군자들의 그렇고 그런 도덕론으로 도로 떨어지는 위험에 빠진다. 여기서 마침내 ‘치양지(致良知)’의 종지가 제기된다. 치양지 사상은 양명이 49세가 되어서야 도달한 사유이다.[각주:16] 이때 제자인 진구천(陳九川, 1494 ~ 1562)이 공부의 핵심을 조금 깨달은 듯하지만, 온당하며 시원스럽고 즐거운 곳을 찾기가 어렵다고 하자, 양명은 비결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앎을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대가 갖고 있는 한 점의 양지가 그대 자신의 준칙이다. 그대의 의념이 붙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알고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아니, 다시 조금이라도 그것을 속일 수 없다. 그대가 다만 자신의 양지를 속이려 하지 않고 착실하게 그것에 의거하여 (무엇이든) 행한다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 그러한 곳이 얼마나 온당하며 시원스럽고 즐거운가!”(전습록권하 206조목)[각주:17]


양지는 내가 갖고 있는 한 점의 준칙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험적으로 정해진 도덕준칙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이 온당(穩當, 사리에 맞음)한지, 궁극적이고 진정한 쾌락(快樂,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진실로 알게 해주는 내 마음의 감각이다. 물론 그것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 준칙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바뀌는 과정에서 선택된 준칙일 뿐이지, 고정불변하여 끊임없이 사람을 구속하는 규범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지가 내가 온당하다고 여기고 즐거움을 느끼는 그런 곳에 기대어 있다는 점이다. 이름하여 온당쾌락처(穩當快樂處)! 


물론 이것은 퇴행적인 자아가 안온한 쾌락을 옳다고 판단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허구적인 양지”는 진짜 양지의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배제되어 질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온전한 양지를 되살리는, 그러니까 양지의 거울을 닦고 또 닦는 사유가 진정 필요해진다. 몸은 마음이 움직인다. 마음은 욕망으로 드러난다. 양지는 그 욕망을 조절한다. 조절된 욕망으로 일과 사물을 대하면 현실의 현상이 바뀐다. 결국 양지는 온당하고 즐거운 결단을 매순간 하는 역량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줌의 양지’가 삶을 바꾼다. 그러나 양지조차 허구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양지의 판별을 굴절시키기도 한다. 이 굴절을 바로 잡기 위해서 철학이, 그러니까 사유가 필요하다. 온당쾌락처로서의 사유가. 




용장오도 이후 양명은 용장에서 생활하면서 묘족(귀주성 등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 말을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양명은 그들에게 집 짓는 법과 학문을 가르쳤다. 이들과 함께 ‘하루헌(何陋軒)’을 짓고 공자가 했던 말, “군자가 거주한다면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썼다. 순박한 주민들은 양명의 인품에 감화되었다. 높은 관리가 와서 양명을 모욕하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분개하여 대항해 싸우려고도 하였다. 그만큼 양명의 마음이 현실의 실천과 혼연일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양명이 말한다. “나는 온갖 도깨비들과 함께 몇 번이고 죽을 정도의 위험에 처했지만 태연하게 되었다. 그것은 때때로 일어날 재앙에 대한 하루아침의 걱정은 잊고, 성인이 되지 못하는 평생의 걱정은 잊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양명은 단 하나의 마음, 한 줌의 양지로 평화를 획득한 성인이었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왕양명은 21세에 과거(국가고시)의 예비 시험이라 말할 수 있는 절강성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그 후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회시(會試, 과거의 제2차 시험)에 내리 두 차례나 떨어진다(22세, 25세). 그 후 낙향하여 용천산에서 시사(詩舍)를 만들고 시문을 논하는 벗들과 어울리는 한편 병법 연구에 정열을 쏟았다. 병법에 열심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손에 잡히는 과일을 이용하여 그것을 진열하며 군대의 진형을 구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후한시대에 베트남의 대란을 평정하였던 명장 마복파(BC14~49)를 흠모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침내 28세가 되어서야 그는 세 번째로 회시를 치러 과거에 합격했다. 예비 시험인 향시에 합격한 지 꼭 7년이 지난 때이다. 회시에 이어서 제3차 국가고시라 할 수 있는 전시(殿試)에서도 상위권으로 합격하여 국가의 관리가 된다. 지금 대입으로 보면 삼수였다. [본문으로]
  2. 김길락 외 지음, 『왕양명 철학연구』, 청계출판사, 2001, 57쪽 ; 뚜 웨이밍 지음,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권미숙 옮김, 통나무, 1994, 168쪽. [본문으로]
  3. 그는 형벌 이후 옥중에서 『역경』 연구에 열중하였다. 『역경』 과 관련하여 「‘역경’을 읽으며(讀易)」를 비롯해 여러 편의 시들을 짓기도 한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철학적 키워드인 ‘양지(良知)’를 ‘역(易)’이라고 천명하기도 한다. 그는 괘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우주의 리듬과 완벽하게 교류하는 상태로 들어가도록 했다. 괘의 의미를 숙고하는 과정 자체가 내적 평화를 얻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점괘는 일종의 수단인 것이다. 점괘를 보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여 사건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점괘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여 마음을 우주의 리듬과 연동시킴으로서 내적 평화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사건이든 정면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4. 뚜 웨이밍 지음,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권미숙 옮김, 통나무, 1994, 171쪽. [본문으로]
  5. 리링 지음, 『리링의 주역강의』, 차영익 옮김, 글항아리, 561쪽/623쪽. [본문으로]
  6. 뚜 웨이밍 지음,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권미숙 옮김, 통나무, 1994, 186쪽. [본문으로]
  7. 뚜 웨이밍 지음,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권미숙 옮김, 통나무, 1994, 186쪽. [본문으로]
  8.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163쪽. [본문으로]
  9. 身之主宰便是心, 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 卽事親便是一物, 意在於事君, 卽事君便是一物, 意在於仁民·愛物, 卽仁民·愛物便是一物, 意在於視聽言動, 卽視聽言動便是一物[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98~99쪽.] [본문으로]
  10.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833쪽. [본문으로]
  11.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623쪽. [본문으로]
  12.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741쪽. [본문으로]
  13.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214쪽. [본문으로]
  14. 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388쪽. [본문으로]
  15. 格物是致知工夫, 知得致知, 便已知得格物. 若是未知格物, 卽是致知工夫亦未嘗知也[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450쪽.] [본문으로]
  16. 「연보」에 따르면 ‘치양지’의 종지를 제기한 시기가 정덕 16년 1521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1520년 6월 건주로 가는 길목에 나흠순에게 답장을 보낼 때 간략하게나마 양지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 황관은 양명이 43세때 처음 나왔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진구천에게 양지에 대해 설명한 전습록의 기록은 1520년 49세로 되어 있다.[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641쪽.; 진래, 『양명 철학』, 전병욱 옮김, 예문서원, 2003, 257쪽, 277쪽.] [본문으로]
  17. 只是致知。爾那一點良知,是爾自家底準則。爾意念著扈,他是便知是,非便知非,更瞞地一些不得。爾只不要欺他,實實落落依著他做去,善便存,惡便去,他這裡何等穩當快樂[왕양명 지음, 『전습록』, 정인재·한정길 역주, 청계출판사, 2007, 64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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