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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아기가왔다 1

신생아 돌보기 2탄 _ 어렵지만 아빠는...

by 북드라망 2017. 9. 29.

신생아 돌보기  2탄 _ 어렵지만 아빠는...


‘아기를 낳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키우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


이 말은 아빠, 그러니까 내가 이제 그만 결혼해서 아기 낳고 살라던 친구들에게 한 말이다. 그렇다. 아기 낳기나, 기르기 모두 어렵다. 그리고 당연히 결혼 생활도 쉽진 않다. 그래서 나는 앞서 밝힌대로 세가지를 모두 하지 않으려고 했다. ‘불의를 보면 일단 참고, 어려운 일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보자’가 명시적인 생활신조는 아니나, 본인의 무의식 저변을 지배하는 관계로 그랬다. 결혼이야 어떻게 무른다 해도 아이는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결혼도 했고, 아기도 돌보고 있다. 인생은 얼마나 기가 막힌 것인지!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것이 매일매일 어렵지만, ‘어렵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다른 감정이 어려움들 사이사이에 스며 있다. 그 기쁨이 참 기가 막힌다. 아마도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그런 감정이리라.



지금은 엄마가 출근을 하고, 한시간여 딸과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놀고난 다음이다. 뒹구는 동안 딸은 30분 전쯤 먹은 분유를 약간 토하고, 아빠는 딸의 젖은 옷을 갈아 입히고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기저귀를 버리러 간 사이에 우리 딸은 갈아입힌 옷 앞섬을 빨아 적셔놓았다. 5초도 안 되는 그 사이에! 또 갈아입힐 수는 없으니 잘 말려보기로 하고 다시 딸과 논다. 아침잠을 더 자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말이다. 이때 묘한 기시감이 든다. 그러니까 이 일은 오늘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긋그제도, 긋긋그제도 계속 반복된 일이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신생아 때는 160일이 넘은 요즘보다는 훨씬 다이나믹 했다. 이른바 ‘패턴’이라는 것이 지금보다는 훨씬 덜 형성되어 있었을 때여서 아기가 이 다음엔 뭘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분명히 이 시간에 잠을 잤는데, 오늘은 안 잔다거나, 어제는 수돗물 소리에 잠잠해졌는데 오늘은 백약이 무효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일매일이 조금씩 달랐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아기는 그나마 (여전히 넓기는 하지만) 예측가능한 범위를 만들어 간다. 그런 아기를 보면서 인간이란 정말이지 습관의 집적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그렇게, 어쩌면 평생 가지고 갈 습관들을 만들어가는 사이에 아빠도 돌봄형 인간으로 재조직되어 갔다. 갑자기 큰소리로, 어떤 방법으로도 말릴 수 없는 기세로 울면 대개는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고, 그냥 엥엥거리다 말고, 또 엥엥거리다가 말고 하는 식으로 울면 뭔가 쌌다는 이야기고, 그러니까 아기가 방출하는 非(비)-인간적인 메시지들을 겨우겨우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시기가 아빠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하면, 엄마의 눈물과 아기의 울음 속에서 단련된다. 


이 시기는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집 사정은 역시 잘 모르겠지만, 우리집의 경우엔 아빠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했다.(사실 지금도 몹시 중요하다. 고로 나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아기를 낳느라 몇 년치 기력을 한 방에 소모해 버린 터이고, 아기는 ‘신생’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 어떤 것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인생 신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빠는 그런 사태를 거의 예상하지 못했었다. 출산을, 엄마가 으악 으악 힘 좀 주면 뿅하고 태어나 응애하고 우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연분만 한 산모는 출산 후 회복이 빠르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터였다.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엄마와 아빠가 함께, 아빠는 ‘보조’까지는 아니어도 비율로 치자면 6:4(아빠쪽이 4) 정도의 비율로 아기를 돌보면 되겠지 했던 것이다. 출산을 앞둔 아빠들에게 미리 말해주지만, 출산 후에는 산모도, 아기도 당신의 계산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왔던 인생의 수많은 계산들처럼 이번 계산도 오산이다.



엄마는 하루에도 서너번씩 울었다. 이건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가 어렵다. 정말 아기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룩 떨어진다. 가령 아기가 울어서 아빠가 분유를 타러 갔다 오면 엄마는 아기를 달래다가 울고 있다. 이때 아빠는 안다. 그게 모두 호르몬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호르몬 때문이 아니라면? 나 때문이라면?’ 하는 그런 기분을 항상 느꼈다. 게다가 당시 엄마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마치 아기에게 모든 기운을 주어버린 듯 했달까.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와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엄마를 돌볼 사람은 결국 아빠뿐인 셈이다. 아기는 엄마와 아빠가 모두 있어야 생기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엄마의 몸 속에서만 자란다. 그래서 아빠는 그 점에 있어서 늘 엄마에게 조금 미안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임에도 말이다. 이건 그러니까 엄마가 아무 이유없이 우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과 비슷한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


갓 태어난 아기는 자고 있거나, 깨 있거나, 운다. 정말 그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물론 밖에서 보기에만 그렇고 사실 정말 많은 걸 한다. 매순간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고, 먹으려고 하고, 숨을 쉬려고 하고 등등...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쉴틈없이 바쁘다. 그런데 역시 목조차 가눌 수 없다. 그런 아기를 돌보는 일은 당연하게도 어렵고 힘들다. 게다가 본 아빠처럼 인생의 지난 나날들 속에서 ‘아기’에게 관심이 0.1도 없었던 사람이라면 아기 자신에게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아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낯설다. 아빠보다는 훨씬 아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엄마는 울고, 아프고, 힘들고...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빠는 그저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리사님의 손짓 하나하나까지 안구에 새겨넣을 기세로 관찰했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긴 하지만 크게 틀리진 않는다.



정신없이 배우며 돌보던 어느날 아빠는 잠든 우리 딸의 모습을 보면서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더랬다. 생각보다 훨씬 작고, 혼자 잠드는 법조차 모르는 우리 딸의 모든 가능성이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신생아는 두어번의 수유 시간만 놓쳐도 탈진 상태에 이르고 만다. 스스로 일어나 분유를 타먹을 수도 없으니 누군가 모유든 분유든 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한 생명의 현재, 그리고 현재에 잡혀있는 미래가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코 끝에 후추가루가 날아든 것처럼 재채기가 나왔다. 그렇다. 한 생명이 전적으로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한 생명은 3분의 1쯤 의지 했었다. 내가 누군가'들'의 의지가 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


사정이 그러하니 어찌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나. 책도 보고 검색도 하고 관리사님 말씀도 잘 듣고 하는 그런 이론적인 공부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아기를 잘 관찰하는 것이다. 잘 '보면' 된다. 아기가 어제와는 어떻게 다른지, 지난 번에 보였던 반응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걸 느끼는 아빠의 감각은 또 어떻게 변했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말하자면, 감각을 열고 아기와 조우한다. 그것만 잘해도 신생아 돌보기의 반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건 마치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익힌 외국어가 '아기어'라니...


여전히 아빠는 공부 중이고, 앞으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기와 조응하는 ‘감각’이 어느 정도 생긴 만큼 자..자...자신 있다! 우리 딸이 한 인간으로서 가지게 될 여러 습관들을 만드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빠의 가슴은 벅차 오르리. 


_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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