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글쓰기, 나를 떠나 나에 이르는 길

고전비평공간 규문(링크)에서 활동하는 건화님의 새연재 '베짱이의 역습'을 시작합니다. 연재 제목만 보아서는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마음을 내려놓고 '느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ㅎㅎ;; 그러니까 이 연재는 20대 '베짱이' 청년이 철학을 공부하며 써나간 글입니다. 20대 청년의 삶과 글쓰기, 고민들을 잘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쓰기, 를 떠나 에 이르는 길



글을 쓰고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냥 글을 잘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우연히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를 가장 크게 매혹한 것은 글이었다. 글다운 글을 자주 접하지 못한 탓인지 글 잘 쓰는 게 멋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는데, 그러던 중 연구실 주변을 맴돌며 마주친 글들은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저자들의 텍스트는 물론이고, 여러 선생님들의 글, 도저히 또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친구들의 글. 멋진 글들을 접하며 처음으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각자의 무게중심은 모두 다를 것이다. 내 공부의 중심은 단연 글쓰기다.


대체 어떤 글을 쓰고 싶었던 걸까? 우선 나는 ‘사적인’ 글들이 싫었다. ‘자기문제’에만 매몰되는 글들 말이다. 나는 글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특히 내 또래들에게. 대학도 안 나오고 취업도 안 한, 조금은 독특한 위치에 있는 20대로서 내 포지션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이런 열망은 더욱 커졌다. 내 또래들이 공감할 만한 텍스트는 부재하다시피 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했다. 그게 일종의 강박이 된 걸까. 어떤 텍스트를 만나건 ‘청년’이니 ‘세대’니 ‘20대’니 하는 말들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글이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번의 에세이를 거치는 동안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패턴이 되어버렸다. 20대의 안온하면서도 무기력하고 불안한 삶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읽은 텍스트의 내용을 거기에 적당히 끼워 맞춘 다음, ‘각자의 자유를 발명하자’는 식의 무책임하고 공허한 결론에 이르기. 이마저도 글이 잘 풀릴 때의 얘기다. 이런 식으로 쓴 글들은 나 자신에게조차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 자신부터가 공허하다고 느끼는 글들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할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




모든 글은 사적이다, 아니 어떤 글도 사적이지 않다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쓰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관찰해야 한다. 니체에 따르면, 관찰이란 관찰 대상과 “비밀에 찬 적대관계, 즉 서로 마주 바라보는 적대관계”에 돌입하는 일이다. 예컨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에 대해 이방인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속한 시대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얼마간 반시대적으로 되어야 한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대상을 조망할 수 있는 중립적인 거리의 확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대상과의 익숙하고 쾌적한 관계를 해체하고, 낯선 거리를 발명하는 일이다. 반시대적으로 된다는 것 역시 스스로를 바깥에 놓고 제3자의 위치에서 자기시대를 저울질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반시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자기시대로부터 빠져나갈 은밀한 출구를 하나 발명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방인과 반시대적인 자는 자신의 집단과 시대를 ‘관찰’한 결과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거기에 ‘속해’ 있을 수 없게 된 자들이다. 관찰이란 무엇보다 관찰하는 나의 위치와 관련된 일이며, 세계와 나 사이에 다른 긴장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누구도 자기 자신과 무관한 것을 관찰할 수 없으며 자신이 아닌 것에 대해서 쓸 수 없다. 아니, 무언가를 관찰하고 무언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이미 그것과 자신이 무관하지 않음을 뜻한다. 관찰은 자신을 빼놓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대상과 나 사이의 익숙한 고요함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라는 점에서 대상과의,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불화와 투쟁을 함축한다. 그리고 쓴다는 것은, 그 투쟁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은밀한 탈주를 감행하는 일이다. 요컨대 쓴다는 것은, 무엇을 쓰든 간에 결국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이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그것은 한때 자신이었던,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어떤 것과의 투쟁과 결별을 함축한다. 이로써 우리는 비로소 미지의 관계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 그리고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서문-1886)


니체는 그 자신과 무관한 것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철저히 자신의 것, 그리고 자신이 극복해낸 것들에 대해서만 말했다. 니체는 매번의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관찰하기를, 다시 말해 자신으로부터 떠나오기를 반복했다. 교양인, 문헌학자, 염세주의자, 바그너, 쇼펜하우어 … 등등은 그가 싸우고 떠나온 자기 자신의 다른 이름들이다. 그의 모든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었으며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더 나은 자신으로 전진해 나가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과 결별하는 과정으로서의 자기극복. 니체는 자신이 맞서 싸운 모든 인간적인 것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고, 그 싸움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과 결별했다.



니체를 통해 나는 ‘사적인 글’에 대한 나의 표상을 의심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아니 어쩌면 모든 일에 있어서 사적인 것과 사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내가 들여다보는 모든 것들 속엔 내가 있고, 그 모든 것들은 이미 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도, 말할 필요도 없다. 쓰기에서 문제는 나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과정에 있느냐, 아니면 더욱 단단히 붙드는 중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흔들리며 말 건네기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일일 것이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나를 완전히 이해하는, 혹은 그렇다고 믿는 누군가에게는 말을 건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말을 건네는 일은 이해가능한 공통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는 무관하다. 말을 건네고자 하는 열망은 소통과 이해의 불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한다. 공통적인 것들 위에서의 소통이 아니라 기존의 소통 기반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일,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에 문제 자체를 비틀어 되돌려주는 일. 말을 건넨다는 것은 전달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는 일이며, 그것을 요청한 적이 없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타자성을 뿜어내는 일이다.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20대인 내가 내 또래들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진부한 방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내가 너무나 ‘20대인 채로’ 20대의 문제를 논했기 때문일 것이다. ‘20대’라는 규정성 안에 머무르는 한, 내가 속한 세대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0대가 자기경험을 보편화하며 20대들에게 충고할 때, 우리는 그를 꼰대라고 부르지 않는가. 20대인 채로 20대를 논하는 것 역시 스스로가 속한 세대를 보편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불행’, ‘무기력’, ‘냉소’, ‘염세’ 등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 혹은 선관념을 통해서만 나와 내 또래들의 문제에 접근했다. 그렇게 문제를 어떤 표상 안에 가두어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놀라게 하지 않는 뻔한 질문과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교조적인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갖고 있는 표상들과 그러한 표상으로 구축된 영토를 허물어내는 일이다. 어떤 표상이나 이론도 나와 우리의 문제를 완벽하게 요약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론에 기대어 우회하지 말자. 나로부터 단도직입(單刀直入)하자.


매끈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직시할 수 있을 때라야 ‘20대’라는 규정성으로부터 떠나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을 건넬 수 있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직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문제를 매끈하게 정리하려 들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문제를 매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힘을 갖는 것이다. 나와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고착적 관점으로부터 가벼워져야 한다.



가벼움이라는 가면 뒤의 무거움


올해 초부터 니체 세미나를 하며 가장 크게 바뀐 것은 ‘가벼움’에 대한 이미지다. 가벼운 태도, 가벼운 마음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진지함을 포기할 때, 삶의 무게를 방기할 나타나는 것이 가벼움이며,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잠시 눈을 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스스로를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가벼움이냐 진지함이냐의 기로에서 내 선택은 당연히 진지함이었다. 그런데 니체를 읽으며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무거움과 비장함은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 자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태도라는 점이다. 인간들이 가장 회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 존재의 가벼움이며, 비눗방울 같은 삶의 무의미함과 불안정성을 직시하느니 심각한 얼굴을 꾸며내고 비장함을 가장함으로써 그것을 외면하고자 한다는 것.


사실 나와 나의 또래는 누구보다 가벼움을 추구한다. 우리는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관계 하나를 단념하기를 선택하고, 누군가의 어설픈 진지함에 대해 ‘진지충’, ‘씹선비’와 같은 말들로 불편한 심사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다치기 싫어서 피하고 경계하는 태도를 ‘쿨함’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우리는 침투해 들어오는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벼운 웃음이라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우리의 가벼움은 길을 잃을 게 두려워 정해진 경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두려움으로 경직된 마음의 표현이다. 이와 달리, 니체가 말하는 가벼움은 요동치는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시도하는 자의 가벼움이다. 파도 위에 서 있기 위해서는 땅에서 자신을 지탱하던 감각을 버려야 한다. 매번 다른 높이와 리듬으로 닥쳐오는 파도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균형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균형을 잃고 파도에 휩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바다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리듬을 탈 수 있으며, 자신을 지탱하던 힘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자기 자신과 새롭게 관계 맺을 수 있다.




내 글의 무거움은 균형을 잃을 것이 두려워 나를 떠받치는 중력의 힘에 의존하려는 소심함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내 글이 무거워지는 것은 스스로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믿는 순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가, 다시 말해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을 때 나는 가볍게 내 생각을 펼쳐내지 못하고,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며 움츠려들었다. 매번 비장하게 ‘무기력’이나 ‘냉소’ 같은 문제를 꺼내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찝찝한 뒷맛이 남았던 건 그 때문이다. 중요해 보이는 문제들과 중요해 보이는 말들에 의지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지켰던 것이다.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떠날 수도, 나 자신을 직시할 수도 없었다. 이게 바로 나의 글이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는’ 글이 될 수 없었던 이유다.



가벼워지자


이제 나는 가벼워지고 싶다. 내가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은 비장하게 주먹을 움켜쥐고 관념적으로 ‘나의 문제’에 덤벼들 때가 아니라, 가벼운 스텝으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를 발견해낼 때일 것이다. 낯선 풍경들, 낯선 생각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다른 감각으로 나를 만나고 나 자신과의 거리를 변주해내는 것. 하여 지금 나의 화두는 가벼움이다. 이 글쓰기가 가벼움을 훈련할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섣불리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진 말아야겠다. 우선은 가볍게,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자.


들뢰즈는 모든 철학은 ‘구체적인 것’이라고 했다. 모든 철학개념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현실적인 고민들과 더불어 창조된 것이므로, 플라톤의 이데아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같은 기이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조차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개념들이 공허하고 난해한 관념의 영역에만 머물게 되는 것은 독자들이 그것을 자신들의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읽어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구체성 속에서 하나의 개념과 철학이 지닌 구체성과 만나기. 공부를 하면서 만난 철학개념이나 철학서의 어느 한 구절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들어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나의 ‘구체성’ 속에서.

                                                                                                                                                                                                                       글 _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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