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평범’의 패배주의에 맞서

‘평범’의 패배주의에 맞서



나는 별 일 없이 산다


"「네 꿈은 평생 평범하게 사는 거라며?」/(…) 「저기…, 너 정말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고 싶다든가… 그런 젊은이다운 꿈은 없니?」/ 「없어. 난 두더지처럼 죽은 듯이 숨어 살 거야….」/ 「불행도 행복도 필요없단 거야?」/ 「응….」"(후루야 미노루, 『두더지』 1권)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두더지』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스미다는 ‘평생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범상치 않은 꿈을 털어놓는다.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혼자서 낚시터 보트대여점을 운영하는 중학생 스미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평범해질 수 없는 이 소년은 외친다. “평범 최고!” 스미다가 말하는 ‘평범’에는 강한 저항감이 섞여 있다. ‘너희들은 모두 특별하다’ ‘자기만의 꿈을 갖고 살아라’ 따위의 말들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반발심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는 소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굳이 말하자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보통’이다. 커다란 불행도 엄청난 행복도 없이 조금은 하찮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꿈’, ‘개성’, ‘희망’ 따위의 공허한 말들을 내세워 열심히 살 것을 강요하지 말라. 차라리 내게 날것 그대로의 ‘평범’을 달라. 스미다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평범은 나의 표어



‘평범’, 그것은 나의 슬로건이기도 했다. 나의 ‘평범’은 ‘평균’과는 무관한 것이다. 사실 나는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산골에 있는 작은 대안학교에서 성적이나 입시와 무관한, 평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10대를 보냈고, 20대가 된 지금은 돈벌이와는 무관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오히려 나는 ‘평균적 삶’을 거부함으로써 나의 평범을 구축했다. 미래를 불안해하고, 남들만큼 갖지 못함에 안타까워하고, ‘좋은 삶’의 궤적을 따라갈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평균적 삶의 태도’에 대한 경멸 속에서. 그러나 나는 동시에 ‘평균적 삶’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자신의 개성을 과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결국 이 태도 역시 자기 앞에 놓인 것이 별 볼일 없는 ‘보통의 삶’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균적 삶에 포획되는 것과 기를 쓰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 나는 이 모두를 비웃으며 다른 길을 갔다. ‘평범’이라고 하는 제 3의 길을.


일종의 인디적 감성이라고나 할까^^? 주류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그것과 싸우려고도 들지 않으면서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것. 내게 ‘평범한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만적이지 않은 태도이며, 삶에 대한 헛된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범’을 내세움으로써 ‘너만의 경쟁력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자기계발 담론의 억압과 ‘짱돌을 들어라!’라고 말하는 ‘진보어른’들의 꼰대질에 동시에 저항했(다고 생각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가사처럼, 게으르고 평범한 내가 ‘별일 없이’ 살고, ‘별다른 걱정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들이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깜짝 놀랄 만한 얘기’일 거라고 믿었다. 평범은 나의 무기였다. 평범 최고!



냉소적인, 너무나 냉소적인


그런데 어쩌면, 나는 그저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평균적 삶을 살고 싶지는 않지만, 나서서 거기에 저항하는 일은 또 너무 성가신 거다. 내가 찬미한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는 피로와 냉소가 스며들어 있었다. 어쩌면 난 단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때 겪게 될 좌절이 두려워서, 혹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번거롭게 느껴져서, 욕망의 꼬리를 감춘 채 죽은 듯이 숨어 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나? ‘평범’, 그것은 내가 삶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우회로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읊조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범함으로 만족할 테니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아줘…’


<효리네 민박> 중에서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은 ‘힙’한 태도의 한 유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평범을 자임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비하가 섞인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성공보다는 나의 작은 행복을 더 중요시하고, 타인의 인정보다는 나의 기분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화려한 비일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일상을 가꾸는 데 신경을 쓴다는 자기 표명이다. 27.7%. 대졸 신입사원의 채용 후 1년 내 퇴사율이다. 이들은 말한다. ‘평범하고 싶다’라고(EBS 다큐프라임 508회 - 2017시대탐구 청년 3부 평범하고 싶다). 이때의 ‘평범’ 역시 ‘평균’과는 무관한 것이다. 가령 나는 사람들이 ‘아이유’를 좋아하는 이유가 평범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려하지 않고, 출세지향적이지 않으며, ‘자기 삶’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다른 아이돌들과의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유의 음악과 외모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평범함이다(아이유 팬으로서 말한다^^;).


그런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나의 삶을 살겠다’고 말하지 않고 ‘평범’이라는 말에 기대는 것인가? 나는 특별이니 평범이니 하는 구분 따위를 초월하여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지만, 사실 여전히 그러한 구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것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는 않겠다는, 나는 평범으로 충분하다는, 수세적이고 굴종적인 태도의 표현이 아닐까? 어쨌든 문제는 지금 내게 그러한 평범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주류적 욕망에 붙들리는 것과 그것에 대한 경멸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 이 둘은 여전히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평범’은 너무도 무력하다. 더 이상 평범에 숨고 싶지 않다.



생산적 유일성 혹은 생산적 타자성



“각자는 자기 내면에 생산적인 유일성, 그의 본질의 핵심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이 유일성을 의식하면, 그의 주변에는 이상한 광채, 비범한 사람의 광채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를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며, 저 유일성에는 수고와 노고의 사슬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전집 2권, 『반시대적 고찰』 , 책세상, p.417)




19세기 말, 니체는 왜소화되어가는 유럽문화가 양산하고 있는 “많은-너무나도-많은-자들”을 앞에 두고 『반시대적 고찰』  썼다. ‘위대함’이나 ‘고귀함’ 같은 문제설정이 자취를 감추고, ‘공리’, ‘평등’, ‘평화’ 등의 가치들이 그 자리를 꿰찬 당대의 유럽에서 니체는 ‘몰락의 징후’를 느꼈던 것이다. 왜소한 인간들이 온갖 번거로운 시설들을 만들어내고 정신없이 중 노동에 몰두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함이며, 마음을 국가에, 돈벌이에, 사교나 학문에 성급하게 선사하는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진정한 과제를 더 이상 소유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 어째서 사람들은 중심에 가닿고자 하고, 무리 속에 머물고자 하는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전의 어느 시대 사람들보다 교양 넘치는, 진보적 정신으로 무장한 19세기 말 유럽인들로부터 ‘게으름’을 읽어냈다.


우리는 매번 유일무이한 순간을 살아간다. 삶은 매순간 규정성을 빠져나가는 중에 있다는 것이다. 직전까지 유효했던 세계에 대한 해석도 다음 순간 맞이하게 되는 세계의 유일무이함 앞에서 효력을 잃어버리곤 한다. 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이전의 세계와, 다시 말해 이전의 자기 자신과 불화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기이한 우리의 실존’에 직면하여 ‘자기 고유의 척도와 법칙’을 생산하기란 너무도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여론이나 관습 뒤에 숨는다. 니체가 말하는 게으름이란, 각자의 ‘생산적 유일성’에 대한 회피이며 태만이다.


지금 우리는 유일성을 찬미한다. 진보·교양 따위 알 게 뭐냐,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각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한다. 평범을 말할 때조차 우리는 평균으로 수렴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평범’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유일성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는 그저 누구에게도 들볶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기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면 온갖 성가신 일들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평범’이라는 표어 뒤에 몸을 숨기고 스스로의 에고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 이처럼 반동적이고 유아적(唯我的)인 유일성은 너무나 무력하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유일성.


니체는 ‘생산적’ 유일성이라고 말한다. ‘유일한 나’를 생산하는 것은 나와 힘을 주고받는 타자성들이다. 그리고 “진실로 생산적인 모든 것은 불쾌감을 유발”(프리드리히 니체, 전집 2권,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p.260)한다. 타자성은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타자성들과의 부딪침은 쾌적한 것일 수 없다. 우리는 타자들로부터 무언가를 뺏고 빼앗기고 파괴하고 파괴당한다. 생산적 유일성은, 동시에 생산적 타자성이다. 외부로부터 지켜내야 할 ‘소중한 나’,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만 우리는 유일무이하다.


나, 그리고 우리 ‘평범’을 말하는 자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유일성을 생산해내는 ‘생산적 타자성’이다. 나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한 태도로 ‘평범’을 이야기했다. 남들이 말하는 특별함에 주눅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나 자신의 ‘생산적 유일성’을 외면하는 동안, 다시 말해 내게 침입해 들어오는 성가신 타자들을 회피하며 삶을 최소한으로 겪으려 노력하는 동안, 나는 시들시들한 청춘이 되어 있었다. 생산적 유일성을 의식하는 자의 광채, 이것은 그가 삶을 겪어내는 의연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특별함과 평범함을 넘어선 자의 비범함이다.



정직과 명랑


니체에 따르면, 삶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이란 그것을 회피하거나, 그로부터 숨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삶은 우리의 바람이나 기대, 예측을 어긋나며 끊임없이 진동한다. 스미다를 보라. 삶은 그를 숨어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스미다는 평범한 보통 어른이 되고자 했지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스미다는 ‘덤으로 사는 인생’을 자신의 죗값을 치르는 데 쓰고자 하지만, 우연은 또다시 그를 흔들어 놓는다. 스미다도 나도 정직해지고자 했다. 기만을 가장 덜 저지름으로써. 나는 평범함에 안주하면서, 적어도 스스로의 평범함을 회피하는 다른 이들보다는 나 자신이 훨씬 정직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의 정직에는 ‘광채’가 없었다.


니체는 “자신에게 자신을 위해 말하고 쓰기 때문에 정직하며, 가장 힘든 일을 사유를 통해 이겨내기 때문에 명랑하며, 그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변함이 없”(프리드리히 니체, 전집 2권,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p.405~406)는 쇼펜하우어의 정직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자신을 위해 말하고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무엇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에 직면함을 말한다. 자기 자신에 직면하는 자, 그에게는 가장 힘든 일을 회피하지 않고 겪어내는 자의 명랑이 깃든다. 그는 정직하므로 명랑하다. 뒤집어서 말하면, 기만으로서의 삶을 명랑하게 겪어낼 수 있는 자만이 정직할 수 있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실존을 조금 무모하고 조금 위험하게 다루어야 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전집 2권, 『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p.394)라고. 우리의 실존을 외부로부터 지키려고 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더 큰 곤란에 빠지곤 한다. 정직하기 위해, 명랑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해져야 한다.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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