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체험, 삶의 현장

체험, 삶의 현장



여행이라고 다 같은 여행이 아니다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사람들이다 ;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이 다섯 부류의 여행자는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통과하는 삶의 전 여행편력이기도 하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순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남겨져 있는 내면적 과정들을 아낌없이 발휘해나가는 사람들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 228절, 책세상)


니체에 따르면 세상에는 다섯 등급의 여행자가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광객’의 표상에 그대로 부합하는 자들이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다니며 모두가 보는 것을 똑같이 보고 모두가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는, 여행지의 배경과 같은 존재들. 두 번째 부류는 여행지를 ‘관찰’한다. 이들은 보아야 할 것과 느껴야 할 것을 그대로 보고 느끼는 대신, 주관적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한다. 여기까지는 여행의 하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험으로 전환한다. 즉 관찰을 통해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이들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감각된다. 8개월간의 남미횡단 여행을 마쳤을 때, 더 이상 순수하고 호기심 넘치는 의대생 ‘에르네스토’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젊은 체 게바라처럼.




마지막으로, 여행의 초고수들은 관찰과 체험, 그리고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니체 자신이 바로 그 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괴테와 니체 각각이 떠난 이탈리아 여행을 비교하면서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했지만, 니체는 그곳에 “동화되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말한다.(슈테판 츠바이크, 《니체를 쓰다》, 세창 미디어, P.105) 니체의 사유는 그가 마시는 공기, 그를 내리쬐는 햇살, 그가 발 디디고 있는 대지와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다. “온 세상이 외국인 동시에 고향”인 자,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능동성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자, “순간순간의 인상에 온 영혼을 다 바치고, 그로부터 완전히 불타 녹아 없어지는 것에 행복감을”느끼는 자. 니체와 같은,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나는 삶의 관광객이다


“저는 여행 갈 겁니다!” ‘졸업하면 뭐 할 거니?’, ‘제대하면 뭐 할 거니?’ 같은 질문들에 대한 나의 일관된 답변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학으로, 직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렇고 그런 대학에 가서 그렇고 그런 직장에 취직하여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살아갈 거라면, 그러한 지리멸렬한 삶에 나를 내어주는 일을 굳이 서두를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런 보잘 것 없는 삶이라면, 젊었을 때 뭔가 색다른 체험이라도 해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난 적어도 1년 정도는 여행을 다닐 생각이었다. 되도록이면 낯선 땅으로! 나는 온갖 여행 에세이들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그 중에는 350만원으로 141일 동안 아시아와 유럽을 여행한 동갑내기의 책도 있었고, 초상화 그리기부터 정원관리까지 온갖 일들을 하며 세계를 유랑한 젊은 예술가의 고생담도 있었고, 50년에 걸쳐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방문한 괴짜 노인의 이야기도 있었다. 나의 로망은 커져만 갔다. 실제로 1년간은 알바를 하면서 돈을 모으기도 했다(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고, 한편에 ‘탈조선’의 꿈을 간직한 채 서울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우연’과 ‘모험’을 기대했다. 특별히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기대한 건 낯선 땅에서 내 앞에 펼쳐질 미지의 사건들 자체였다. 낭만적이고 황홀한 경험도, 처절하고 지독한 고생도 좋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내 앞에 펼쳐질 거라고 믿었고, 그것을 꿈꿨다. ‘여행’은, 내가 거부하거나 적어도 유예하고 싶었던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나는 여행을 꿈꾸면서도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도 별로 다녀본 적 없는 주제에, 나는 ‘관광객’들을 경멸했다. 모두가 가는 곳에 발 도장 찍고, 맛있는 음식으로 혀를 즐겁게 하고, 멋진 유적이나 풍경을 배경으로 인생사진 찍기. 이런 따위의 여행은 공허하지 않은가. 나는 ‘체험’하고 싶었다. 나를 흔들어 놓을 만한 ‘사건’을 겪고 싶었다.


그런데 왜 굳이 여행이어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연’과 ‘미지의 사건’은 어디에나 있지 않은가? 그것들은 꿈꾸고 말고 할 게 아니다.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동일한 순간들을 살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온전하게 겪어내려면 우리 자신의 중심을 매번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과정은 감당하기 벅찬 일이기 때문에 그간 나는 일상을 경멸하면서 ‘여행에의 동경’을 정당화해왔는지도 모른다. 우연들과 사건들이 제 발로 거저 찾아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결국 여행에 대한 나의 동경은 우연과 모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지독한 권태였는지도.


니체는 “이 다섯 부류의 여행자는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통과하는 삶의 전 여행편력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그렇다. 사실 삶이야말로 여행이다. 무수한 우연과 사건으로 매순간 무늬를 달리하는 만화경과도 같은. 나는 여행과 체험을 열망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삶의 여정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였던 것은 아닐까? ‘여행’이라는 비일상을 꿈꾸며 일상을 비방하는 동안 나는 번번이 세계를 놓쳤다. 어떠한 체험도 변형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삶의 관광객이었다.



체험을 숙고하라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은 너무 많이 하면서 숙고하는 일은 너무 적게 한다 : 즉 그들은 대식증과 이따금씩 생기는 복통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야위어간다.―‘나는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바보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방랑과 그의 그림자〉203절, 책세상)


체험이란 무엇인가? 나는 체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내게 ‘체험’ 혹은 ‘사건’이라고 말할 만한 것들은 항상 ‘여기’가 아닌 ‘저편’에 있었다. 바다 건너 어딘가에, 혹은 일상 바깥의 어떤 특별한 순간에. 니체에 따르면 나는 바보다(^^;).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특별한 체험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어떤 체험을 특권화시킬 때에야 그것은 의미를 띠고 출현한다. 그러나 체험들은 그저 ‘매순간’ 우리를 스치고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모든 체험들은 그 자체로 유일하고 특별하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뭐든 해보라’고 했다. 해보기 전엔 모른다고, 모든 경험이 나의 밑거름이 될 거라고. 그렇다. 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그런데 해보고 나면 다 알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체험들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사진을 찍는다고 체험을 붙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체험의 절대량이 부족하지는 않다. 우리는 각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겪으면서 ‘낯선 곳’을 지나고 있다. 문제는 체험의 결여가 아니라 숙고의 결여다. 우린 대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온갖 이미지들과 자극들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강한 위장은 갖고 있지 않다. 흡수되지 못한 체험들은 양분이 되기는커녕 복통을 일으키며 우리의 소화기능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갈수록 더 많은 것들로부터 아주 적은 것들만을, 다양한 체험으로부터 늘 받아들이던 것들만을 받아들이게 된다. 숙고되지 않은 많은 체험은 우리가 반복하는 습관과 사고의 패턴을 강화시킬 뿐이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매순간을 가장 진부하게 소비하고 마는 것이다. 체험이 음식물의 섭취라면, 숙고는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니체는 둘 사이의 이 지독한 불균형을 문제 삼고 있는 것.




요컨대, 숙고란 체험을 자기화하는 일이다. 체험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들과 새로운 체험들을 소화하고 배설하는 능력이다.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관점을 게으르게 고수하려고 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의 자명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힘. 우리는 결코 같은 순간을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다. 체험은 항상 ‘나’를 빠져나가며 나의 익숙한 관념과 습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이런 점에서 숙고한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 이전의 자신과 결별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가령 음식을 먹는다고 할 때, 우리는 ‘음식’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음식과 결합하고 있는 우리의 신체를, 즉 우리 자신의 감각과 욕망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만 체험하며, 우리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체험한다. 나는 매주 세미나를 준비하며 니체를 읽는다. 이때 나는 무엇을 체험하는가?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몸이 욱신거리고, 다르게 해석하려는 충동을 느끼며, 지금까지의 나 자신이 낯설어진다. 무엇보다, 내 언어로 글을 쓰고 싶어진다. ‘니체’도 ‘니체의 책’도 없다. 책을 읽는 순간, 무수한 마주침이 펼쳐지는 장으로서의 나의 신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른 것’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체험하는 일이다. 생 빅토르 후고는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생 빅토르 후고, 《디다스칼리콘》)이라고 말한다. 지금 여기서 다르게 느낄 수 없다면, 지구 반대편에 간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체험을 ‘꿈꾸는’ 한 우리는 작동중인 우리의 신체와 마음, 그리고 경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그 유일한 순간을 방기하고 만다. 그것은 종종 ‘여행’이라는 저편에의 동경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 순간 이루어지는 매번의 체험 속에 나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으면서 일상 너머의 여행을 꿈꾸는 것은 얼마나 무력한가.


일상 속에서 어떤 새로운 것도 능동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우연을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간 우연들과 그 자신을 분리시키며 ‘그랬었다’라고 쓸쓸하게 읊조린다. ‘나와는 무관하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하며 한 발 빼는 거다. 그러나 나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우연은 나의 신체를 통해 펼쳐지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그랬었다’를 ‘나 그러하기를 원했다!’라고, 나아가 ‘나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로 바꾸어내는 창조적 의지를 지닌 자만이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꿈꾼다. 여행에 대한 갈망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해졌다. 낯선 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나를 뒤흔들 체험들이 제 발로 나를 찾아오지는 않으리라는 것. 숙고하지 못하는 자는 어딜 가든 익숙한 자신과 재회할 뿐이고, 그에게는 모든 여행이 또 하나의 권태로운 일상일 뿐이라는 것. 지금 여기서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라고 말할 수 없다면, 낯선 경험 역시 또 하나의 ‘그랬었다’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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