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적, 내 미지의 친구들

적, 내 미지의 친구들



밀실 속의 환상


군 입대 첫날이 떠오른다. 흐릿한 기억들 가운데 유독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처음으로 낯선 남자애들 20여 명과 같은 생활관에 남겨지게 되었을 때다. 짧은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다른 이들은 모두 행동을 개시했다. 서먹하고 적대적인 공기를 불식시키고 옆 자리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익명의 빡빡머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모두들 본능적으로 열심히 입을 놀려댔다. “이름이 뭐예요?”, “어디 살아요?”, “학교는 어디 다녀요?” 보충대에 머무는 고작 사흘 동안 볼 사람들끼리 뭐 그렇게 알아야 할 게 많다고.


내 눈에 그들의 행동은 낯선 곳에 떨어져 낯선 이들에 둘러싸인 상황을 견디지 못해 어떻게든 의지할 상대를 구하고자 하는 발버둥처럼 보였다. 그들과 달리, 나는 억지로 친구를 만들고 그들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느니 그냥 사흘을 외톨이로 지내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 나는 인간관계에 그다지 필사적이지 않다. 마음 맞는 사람이 없다면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그 때문인지 독립적이라거나 자존감이 강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친구관계라고 다르겠는가. 나는 언제나 자연스레 내 곁에 오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들과의 편안한 관계에 만족했다.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좋다. 그들과 나누는 실없는 대화가 좋고, 그들과 흘려보내는 시간도 아깝지 않다. 그러나 딱 그 정도. ‘우정’이니 ‘의리’니 거창하게 의미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모든 관계에 심드렁한 내가 실은 ‘우정’에 대해 장대한 환상을 품어 왔다는 사실이다. 환상의 주된 출처는 일본 소년만화들. 그 중에서도 10대 시절의 나를 온통 사로잡은 것은 《원피스》다. 이 만화는 내게 일종의 ‘우정 포르노’였다. 만화는 주인공 루피와 일당들에게 매번 전보다 큰 시련을 안겨준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당들의 우정은 점점 더 극적인 방식으로 재확인된다. 숨겨진 과거, 치명적인 오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적과의 처절한 전투. 이는 ‘밀짚모자 일당’의 우정을 ‘재창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이용되는 장치들이다. 적당히 익숙한 관계에 안주하는 내게 일당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증명해내는 우정을 훔쳐보는 일은 짜릿한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친구’ 혹은 ‘우정’에 관해서 내 안에는 모순적인 두 측면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신경한 태도와 무표정한 얼굴 아래 실은 은밀한 환상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경’이라는 장막 뒤의 비겁함


《원피스》의 ‘뜨거운 우정’을 동경했던 10대 이후로도 우정에 대한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허영심이 좀 첨가되었달까. 공부를 시작할 즈음부터는 지적으로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또래 친구를 갈망했다. 그렇지만 무모하게 《원피스》식의 저돌적인 ‘동료 구하기’를 흉내내면서 그런 친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런 관계는 현실에 없다고, 있다고 치더라도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미리 결론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 친구들과의 관계가 지닌 한계는 명백했다.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은 너무 분명해서, 그 선을 넘으려고 무리하기보다는 익숙한 경계 안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



니체는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주는 누설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벗에 대한 동경과 현실 관계에의 안주라는 나의 모순이 누설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태껏 나는 관계를 수동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해왔던 것 같다. 내게 ‘친구’와 ‘우정’이란 늘 내게로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는 상대에 달린 문제였다. 나는 친구를 기대했지만, 그런 친구를 만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은연중에 나 자신이 관계 속에서 주체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관계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자극인가?’, ‘나는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고 싶은가?’ 한 번도 이런 방식으로는 질문해본 적이 없다. 늘 현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한 번도 온전히 현실에 있지 않았다. ‘내가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파고들어 질문하기를 회피했던 것이다.


관계에 대한 비겁함과 관념적 동경, 이 상반되어 보이는 두 모습은 관계의 패턴을 바꾸지 않으려는 나의 한결같은 나태함의 동일한 표현이었던 것. 현실 ‘너머’의 것을 상상하고, ‘우정 포르노’에 탐닉하는 나의 모습은 ‘지금 이 관계’ 속에서의 내 무력함을 누설한다. 나는 나를 규정하고 있는 관계에 나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 이 관계가 전부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험해야 하는데, 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가까이의, 더 없이 먼 이들


“형제들이여, 나 너희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권하지 않노라. 나 너희에게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권하노라.”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p.102)


나 역시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란 현실에서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핑계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나의 시선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나는 계속해서 ‘이웃들’만을 가질 뿐이었다.


‘이웃’이란 나와 같은 것들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이들이다. 익숙하고 일정한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다양한 거리를 형성할 수 없는 이들. 반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란 무언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통적인 기반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말한다. 다양한 거리를 주파하며 불편한 감각을 유발하고, 익숙한 거리들을 재조정할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먼 존재들’에 대한 ‘환상’으로는 1센치의 거리도 변화시킬 수 없다. ‘먼 존재들’은 먼 존재들대로, ‘이웃들’은 이웃들대로, 또 나는 나대로 각자의 위치를 고수할 뿐이다.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쾌한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더없이 가까이’갈 때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익숙한 거리가 무화될 정도로 ‘더없이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먼저 ‘더없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품었던 관념적 동경을 버려야 한다.


지금 나는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친구’라는 규정성에 도저히 끼워 맞춰지지 않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나이도, 성향도, 관심사도 제각각인,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 이전에 내가 친구들과 관계 맺던 방식은 이들과의 관계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지금 ‘이 관계’ 바깥에서 친구를 찾고 있다. 아직 나는 밀실에서 뛰쳐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래서야 이전에 내가 관계에 갇혀온 방식을 답습하게 될 뿐이다.



적, 내 미지의 친구들


“친구들이여,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현자가 이렇게 외쳤다.

“적이여. 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살아 있는 어리석은 자, 나는 외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책세상, p.319)


‘친구’란, ‘우정’이란 무엇인가? 내게 친구란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몇 년 만에 만나도 예전과 같은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관계. 그런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에게서 공통적인 것에 기반한 유대감을 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나와 비슷한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누군가와. 그러니까 실은 언제나 나 자신과만 사귀고 있었던 셈이다. 동일자의 우정. 그러나 이 ‘동일성’이야말로 환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차이들의 복합체이기에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느끼는 방식은 동일할 수가 없다. 때문에 ‘동일자’의 우정이란 오류와 착각에 불과하다. 즉, 동일자로서의 친구란, 사실 친구가 아니다.


그렇다면 늘 자신과만 사귀어왔던 나는, 이제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란 것은 없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현자"의 가르침일 뿐이다. “살아있는 어리석은 자” 니체는 “적들”에게 외친다. 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니체에게는 적이야말로 친구다. 우리의 규정성 바깥에 있고, 나와의 동일시가 불가능한, 그리하여 항상 미지의 존재로 출현하는,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는 적. 그가 바로 친구다. 《원피스》에서 루피 일당의 모험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다다. 정해진 길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일당들이 마주치는 모든 이들은 적이다. 이들은 매번 적과 마주치고 싸우고 친구가 된다. ‘밀짚모자 일당’의 ‘우정’과 ‘모험’은 적과의 조우, 다시 말해 새로운 친구를 찾고 기존의 관계를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밀짚모자 일당의 ‘잡다한’ 면면들을 보라. 출신, 외모, 목표, 심지어는 종(種) 마저도 초월한 하이브리드 우정 공동체.


'친구'란 규정성에 도저히 끼워 맞춰지지 않는...하이브리드...


우정이란 매번 타자에 자신을 여는 일을, 즉 친구가 될지 모르는 미지의 적과의 마주침을 수반한다. 적이란 ‘아직 오지 않은’ 나의 친구다. 부디, 나의 우정이 위험천만한 모험이기를. 자, 넌 이제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으냐.


글 _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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