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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프란츠 카프카 읽기 - 인디언이 되었으면!

by 북드라망 2017. 7. 14.

프란츠 카프카 읽기 

- 인디언이 되었으면! 



그가 쓴 모든 글은 투쟁의 기록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그는 왜 투쟁이라는 화두를 마음에 품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투쟁은 왜『성』에서처럼 자기와의 내적 투쟁이어야 했을까요?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24년 죽기 전까지 프라하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는데요. 그곳에서 체코인들의 독일에 대한 독립 투쟁을 지켜보았고, 1차 세계대전도 겪었습니다. 청년 시절 김나지움에서는 많은 책을 읽었고, 체코인도 독일인도 아닌 유태인으로서의 자신과 그의 민족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시오니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그의 지적 호기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카프카의 왕성한 지적 편력은 어느 정도 그가 놓인 프라하에서의 위치 때문이기도 했어요. 프라하는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었고, 독일계 오스트리아인들이 도시를 움직이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에는 독일인들이 차지하는 사회적 비율은 7% 정도였고 그것도 점점 더 감소하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체코인들은 여전히 계속되는 독일계의 지배에 대한 거부감과 유태인에 대한 경멸을 한데 묶어서 프라하의 독일계 유태인들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공격했습니다. 어린 카프카도 길에서 몇 번이나 유태인이라며 놀림을 당하곤 했습니다. 프라하의 유태인들은 폐쇄적인 두 집단 사이에서 박탈감을 느꼈지요.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프라하의 유태인 게토 속으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프라하의 진취적인 유태 젊은이들은 시온주의로 나아갔습니다. 체코 민족주의나 독일 민족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유태 민족주의로 뭉쳐서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런 식의 유태 집단주의를 우려의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라하의 모든 사람들은 민족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우리 다섯에게는 가능하고 참아지는 것이 저 여섯 번째에게서는 가능하지도 않고 참아지지도 않는” 공동체, 단지 타자를 멸시하고 배제하기 위해 상상된 공동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설사 가장 억압받고 불쌍한 공동체의 집단주의라고 해도 그 이기적인 공동체적 본성은 똑같이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섯 친구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집에서 뒤이어 차례로 나왔는데 우선 하나가 나와 대문 옆에 섰고, 그 다음에는 두 번째가 와서, 아니 왔다기보다는 미끄러져, 수은방울처럼 가볍게 대문을 나와 첫째로부터 벌지 않은 데 섰고, 그 다음은 셋째, 그 다음은 넷째, 그 다음은 다섯째가 그랬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줄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게 되어 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다섯이 지금 이 집에서 나왔다”고. 그때부터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어떤 여섯 번째가 자꾸만 끼어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운 생활이리라. 그는 우리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귀찮다, 그러니 그것으로 충분히 무슨 짓인가를 하는 것이다, 싫다는데도 그는 왜 밀고 들어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를 모르며 우리들한테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우리 다섯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에게서 가능하고 참아지는 것이 저 여섯 번째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그 밖에도 우리는 다섯이며 여섯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도무지 이 끊임없이 같이 있음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우리 다섯에게도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미 같이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결합은 원하지 않는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상.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여섯 번째에게 가르친단 말인가, 긴 설명은 벌써 우리 테두리에 받아들임을 의미하는 거나 다름없을 테니 우리는 차라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아무리 입술을 비죽이 내밀 테면 내밀어보라지, 우리는 그를 팔꿈치로 밀쳐내 버린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밀쳐내도 그는 다시 온다.(「공동체」)



하지만 카프카가 「공동체」에서 썼듯이 ‘여섯 번째’는 언제나 다시 옵니다. 왜냐하면 카프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에는 민족의 이름이나 정치적 이념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갖가지 어두운 게토와 푸른 초원이 너무나 많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죠.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의 온갖 풍경을 마주하고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두운 외진 곳, 비밀에 싸인 복도, 투명하지 않은 젖빛 창, 더러운 정원, 떠들썩한 선술집, 문이 잠긴 여관 등이 살아 있어요. 우리는 새로 건설된 도시의 넓은 거리를 걸어가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발걸음과 시선은 불안하죠. 마음속으로 우리는 여전히 옛 불행의 골목에 있는 것처럼 떨고 있어요. 우리의 영혼은 위생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비위생적인 낡은 유대인 거리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위생적인 새 거리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죠.(구스타프 야누흐,『카프카와의 대화』)


카프카는 민족적 배제와 정치적 예속보다 훨씬 더 심각한 구속이 우리 세포 하나하나를 다 더럽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정 속박 없는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매 순간을 덮치는 온갖 명령을 낱낱이 따지고 거절해야만 합니다. 카프카가 쓴 장편 소설의 주인공인 K들은(『아메리카』,『소송』,『성』) 자신을 얽어매는 모든 관계를, 떠나고 또 떠나고만 있습니다. 휴식과 안정을 주는 침대란 늘 죽음보다 무서운 복종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고요.


이 미션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복종을 벗고 최후의 신선한 공기를 맛보려 했던 주인공들은 ‘자기’를 떠났습니다. 카프카가 썼던 맨 처음 소설에는 아름다운 아가씨, 친절한 친구, 사랑스러운 모든 거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사나이가 나옵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마저 거부했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지요.(「어느 투쟁의 기록」) 국도의 아이는 한 밤중에 갑자기 집을 나와 남쪽 도시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잠을 자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 세계, 오늘의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는 도시가 멀리서 그를 부르고 있었지요.(「국도의 아이들」)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을 부양하고 여동생에게 음악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를 떠나기 위해 인간의 탈을 벗고, 갑충이 되어 죽습니다.(「변신」) 인간의 먹음이 갖는 수치스러운 욕망을 고발하기 위해 단식 광대는 짐승보다 못한 짚더미로 스러지지요.(「단식광대」)


이들의 운명이 비참하다고요? 아닙니다. 카프카는 자기 마음의 온갖 구속을 떨치려는 자들의 이미지를 초원 위에 그렸습니다. 아! 인디언이 되었으면! 내면의 게토를 깨부수려는 자들은 모두 인디언들이었던 것이죠. 봄입니다. 박차도 없고, 말 모가지도 말 대가리도 없는 달리기를 꿈 꾸어봅시다.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 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 모가지도 말 대가리도 없이.(「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글_ 오선민(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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