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약선생의 도서관]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 어떤 상처를 돌파할 수 없다"


"반복되는 상처가 새로운 삶을 만든다"

주디스 버틀러『혐오 발언』





신혼 시절이었을 것이다. 출근은 언제나 그렇듯 지옥철로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도 집과 역이 가까운데다, 갈아타지 않고 회사로 출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다녔다. 그러나 자리는 늘 만석이어서 서서 한 시간은 족히 가야했다. 전날 과음이라도 했을라치면 온통 피로에 찌든 몸을 이끌고 문 옆에 기대어 서서 졸며 가기도 했다. 좀 익숙해지자 노약자석 옆이 좀 더 호젓하고 졸기에도 적당한지라 가끔 그곳을 애용하기도 했다.


계속 타고 다니다 보면, 이런 만원 지하철에서도 잘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어느 날 역시나 과음에 찌든 몸을 이끌고 노약자석 벽에 붙어서 출근 중이었다. 내 앞에는 무척 조용하실 것 같은 단아하신 할머니께서 앉아 계셨다. 나이는 꽤 들어 보였지만, 지갑 하나를 두 손으로 포개어 잡고 똑바로 앉아 있는 모습이 인상 깊어서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한 두 정거장 지나서 조그만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우락부락한 할아버지가 내 왼쪽 어깨를 세차게 밀치며 들어오더니, 할머니 옆자리를 거칠게 차지했다. 지하철에서 이런 분들은 흔하다. 시비를 걸어봐야 내 정신만 구기는 짓이다. 내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 얼굴을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좀 지나치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하신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아마 할아버지의 거친 행동이 할머니를 많이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을 밀치고 들어오는 거친 태도를 봐도 알겠지만, 할아버지는 그걸 받아줄만한 분이 아니시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입에서 “X같은 년하고는, 뭘 봐?”라고 별거 아니라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수많은 열차 중, 또 그 많은 자리들 중, 꼭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쓸데없이 이런 마찰이... 제발 그냥 이대로 지나가기를. 나는 의례 그렇듯이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지나가실 줄 알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지하철에서 이런 분들은 흔하다. 시비를 걸어봐야 내 마음만 흠이 갈 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벌어졌다. 할머니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 아마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 쪽을 바라보면서- 아주 정중한 경어로 또박또박, 그리고 무척 논리적인 어조로,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이러는 거다. “아니 세상에, X 가진 놈이 누구보고 X 같은 년이라는 거지요? 세상의 X이 죄다 빠졌나 보죠?” 그녀는 너무나 논리적이면서 가장 예의바른 어조로 이 말을 하고 계셨다. 아, 그 순간 나는 잠이 싹 달아나고,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할아버지와 내 주위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낯선 정적. 할머니는 정말이지 난데없이 튀어나온 암사자 같았다.


정중한 말투 안에는 단단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말이란 일종의 행위와도 같다. 그러나 말이라는 행위는 물리적 행위와 조금은 다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발언하는 말 자체가 직접적인 행위가 되어 상대를 가격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발언 자체가 행위이기보다, 말을 함으로써, 그 말의 결과로 어떤 효과가 따라 나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는 법정에서 판사가 “나는 선고한다”고 했을 때 출현한다. 이때 판사의 말은 바로 그 자체가 행위이다. 발언 순간 판사 앞에 서 있는 피고는 판사의 말 그대로 죄인이 되고, 교도소에 수감될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집에 홀로 있는 어린 아이에게 아빠가 전화로 “그래 금방 들어갈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아빠가 집에 일찍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아빠는 아이를 안심시키는 효과를 위해서 전화로 아이에게 금방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은 직접적인 행위라기보다 말의 내용(=집에 금방 들어간다)과는 무관하게 지금 당장 아이를 안심시키는 효과(=말의 결과로 얻는 효과)를 원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나를 밀치고 자리에 앉아 할머니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은 것은 아마도 평소 입버릇일 수도 있지만, 명백히 할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입을 닥치게 하고, 자신을 건들면 다소 피곤하게 되리라는 무언의 위협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욕설을 통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제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할머니의 카운터펀치가 날아온 것이다. 물론 할아버지의 생각과만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카운터펀치(counterpunch)였으니까.





이런 생생한 순간을 이론적으로 파헤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현대 페미니즘 이론의 거장,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5~ )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가로서, 특이하게도 반(反) 정신분석학자인 푸코를 정신분석학으로 재해석한 푸코의 계승자이자, 독특한 언어연구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녀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책으로 최근에 『혐오 발언』(Excitable Speech)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은 요즘 메갈리아/워마드 사이트의 강도 높은 발언들이 화제가 되면서 한국 지성계에도 크게 관심을 갖게 된 책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과 관련이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메갈리아/워마드의 발언에만 국한되어 이야기될 내용은 아니다. 이 안에는 매우 다층적인 관점들이 숨겨져 있다.



우선 국역본으로 ‘혐오 발언’으로 번역되어 버린 원제 ‘excitable speech’에 대해서는 다소 설명이 필요하다. ‘excitable’의 사전적 의미는 ‘격분시키는’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excitable speech’는 직역하면 ‘격분시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버틀러는 사전적 의미로만 이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번역본 제목으로 택한 ‘혐오 발언’의 의미도 아니다. 버틀러의 설명에 따르면 이 용어는 법적인 용어다. 법에서 ‘excitable speech’는 어떤 강압에 못 이겨 행해진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안정된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정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증언(confessions)을 말한다.[각주:1]
 

버틀러는 왜 이런 난해한 법정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여기서 버틀러가 이 말을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는 “법이 통제할 수 없는 말”이라는 맥락에서다. 그것은 주권주체(sovereign subject, 일단 여기서는 ‘국가’라고 해두자)로부터 통제가 풀려버린 말이다. 즉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말인 것이다. 버틀러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의미를 두고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좀 더 나간다. 미국의 수정헌법 1조[각주:2]는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법조문이다. 만일 이 “표현의 자유”를 최대치로 인정한다면, 모든 말은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역설이 발생한다. 즉, 모든 말이 역설적으로 ‘excitable speech’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모든 말이 자유롭다면, 그것은 주권주체(국가)로부터 벗어나 있어야 하고, 사실 벗어나 있기도 한 것이다. 결국 혐오발언자의 혐오발언(hate speech)도, 거기에 대응하는 저항발언(counter-speech)도, 모두 ‘excitable speech’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excitable speech’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한 ‘혐오 발언’으로만 이해하기엔 너무나 폭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한데도 만약 이런 말의 규제를 국가에게 넘겨버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가르고 규제하는 권한을 국가가 갖게 되어 버린다. 즉, 그 말의 비준 권한이 국가에게로 넘어가 버린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국가가 비준한 혐오발언(hate speech)만 무한 생산될 위험에 처한다고 버틀러는 경고한다. 결국 모든 말을 국가로부터 벗어나게 해서 혐오발언과 저항발언 모두 내재적인 장에서 대결시키고자, 버틀러는 이 법적 용어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혐오 발언』의 원제는 ‘excitable speech’는 '어떤 강압에 못 이겨 행해진 말'로 법정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증언을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에게 판단을 넘기지 않으면 뭔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합의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걸까? 아니다. 역시나 버틀러는 ‘의사소통과 합의’의 철학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 책에서 버틀러의 논쟁 철학자인 레이 랭턴[각주:3]은 ‘애니타 힐 사건’[각주:4]을 두고 애니타 힐이 어떤 정치적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힐이 의도한 바대로 발언 내용이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증언이 성애화된 행위(sexualized act)가 되어 버렸다고 분석한다. 그러니까 애니타 힐이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애니타 힐의 증언을 듣고 토마스 판사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힐을 포르노그래피로 상상하게 된다는 분석이다. 청문회 증언이 의도와 다르게 일순간 음란물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레이 랭턴은 이런 불균형을 법을 통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버틀러는 생각이 다르다. 누구는 권력이 있으니까 의도한대로 이야기가 전달되고, 누구는 권력이 없으니까 의도한대로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분석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언제나 말은 의도한대로 전달되지 않을 위험에 항상 처한다. 따라서 버틀러가 보기엔 사람들 사이에 투명한 의사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늘 의사소통에는 '삑사리'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버틀러는 좀 공격적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불가역적인 상황을 이루고 있는 어떤 영구적인 다양성이 의미론적인 영역 내에 있지 않을까? 동일한 발언들에 동일한 의미를 ‘할당하는’ 지위에서 누가 해석적인 싸움 위에 서게 될까?”[각주:5]


바로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아주 뜻밖의 돌파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발언들에게 단일한 의미가 없다는 점이, 그러니까 反하버마스적인 상황이 애니타 힐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애니타 힐은 자신의 발언이 포르노그래피로 오인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발언이 의도되지 않거나 절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의미를 지닐 위험(the utterance risk)'[각주:6]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상처를 주는 권력들이 어떤 권력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그 혐오발언들을 되풀이해서 말해야만 한다고도 단언한다.[각주:7] 그 말들은 원래 그녀의 말이 아니지만(사실 그 말들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포르노그래피 언어들이다) 그 말들을 되풀이 하지 않으면 싸움의 가능성을 만들 수도 없다.


버틀러는 합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의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서 상대의 표현들을 재인용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을 무릅써야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행위능력을 위한 가능성도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척이나 내재적인 전투이다. 국가도 공론장도 상정하지 않는 너와 나의 싸움. 오로지 언어의 가치를 재탈환함으로써 힘이 조정되는 그런 싸움.


예를 들어, 퀴어(Queer)는 처음에는 성 소수자를 비하하기 위한 혐오 발언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그들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지칭하기 위해 쓰인다.


버틀러는 매우 푸코적이다. 주권적 저항방식, 그러니까 법률에 기대어 권력에 맞서는 저항방식을 비판하는 장면들은 푸코의 권력론을 아주 많이 참조하는 것 같다. 이 책이 97년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책을 쓸 때의 버틀러는 콜린 고든의 『푸코 효과』(The Foucault Effect, 1991)를 읽고 난 다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후기 푸코의 통치성 연구를 잘 알게 된 다음이 아닐까 싶다.


또다시 ‘excitable’이라는 단어로 되돌아 가본다. 내 생각에 버틀러가 ‘excitable’이라는 잘 사용하지 않는 형용사를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재미있게도 이 단어 속에 품고 있는 ‘cite’라는 말과도 연관된 것 같다. cite의 라틴어는 cĭto이다. cĭto는 ‘빨리 움직이게 하다, 재촉하다’란 의미도 있지만, ‘인용하다’란 의미도 있다. 즉, excite(흥분시키다)와 cite(인용하다)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excitable은 ex-citable, 즉 ‘맥락에서 벗어나 인용할 수 있는’이란 의미가 되면서, 버틀러의 저항 방식을 지지해주는 단어가 된다. 즉 ‘퀴어’는 원래 혐오발언에서 시작되었지만, 동성애자들이 ‘퀴어 공동체’ 등으로 재전유함으로써 기존 맥락(혐오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단어(저항의 맥락)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혐오발언자들의 말을 과거의 사건들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혐오 의미에서 ‘탈-인용’(ex-citable)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탈-인용(ex-citable)’이라는 이 새로운 의미는 이번에 버틀러를 읽으면서 감동했던 문장 중 하나와도 연결된다. 그것은 "그 누구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 어떤 상처를 돌파할 수 없다"(No one has ever worked through an injury without repeating it)는 그녀의 힘찬 말이었다.[각주:8] 상처가 반복됨으로써 트라우마가 지속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와 항상 재대결하고, 그 트라우마가 다른 것이 되도록 하는 근본적인 가능성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복이 없다면 트라우마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고정되지만, 상처가 반복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상처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꼭 혐오발언에만 한정될 필요 없는 삶의 명언이다. 모든 소수적인 것들은 바로 자신들이 지닌 상처들을 품은 채 전진하여 삶을 힘차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citable’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 누구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 어떤 상처를 돌파할 수 없다"



20년도 더 된 그 옛날 지하철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예기치 않은 ‘대항 욕설’에 당황하셨는지, 또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잠자코 앉았다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여전히 지갑을 잡은 채 다시 눈을 감으셨다. 아주 효과적인 ‘excitable speech’이지 않은가. 새삼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할머니는 사회에 만연한 트라우마들을 경험적으로 잘 처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를 상상해보면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다.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그러니까 반복된 상처를 새로운 가치로 전환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때만,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만일 국가 밖에서 행해지는 이 내재적인 전투에서 삶을 힘차게 만들어가는 방식이 아니고, 다시 삶을 어두움에 밀어 넣는 발언으로 상대에게 저항한다면, 그리고 그런 저항이 또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저항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할머니의 발언방식을 다시 탐구해 봐야 할 것 같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혐오 발언 - 10점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알렙


  1. 각주 1) 주디스 버틀러 지음, 『혐오 발언』, 유민석 옮김, 알렙, 2016, 38쪽 ; Judith Butler, 『Excitable Speech』, Routledge, 1997, 15p [본문으로]
  2. 각주 2) “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 위키백과 [본문으로]
  3. 각주 3) 레이 헬렌 랭턴(Rae Helen Langton) : 칸트 철학과 페미니즘 철학에 관해 광범위한 저서를 갖고 있는 철학자로서, 포르노그래피와 대상화(objectification)에 대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레이 랭턴 식의 법률적 저항 논리를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본문으로]
  4. 각주 4) 애니타 힐(Anita Hill) 사건 : 1991년 미국의 대법원장 후보 토머스 판사가 부하직원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애니타 힐을 지속적으로 성희롱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청문회에 소환되어 다루어졌다. 애니타는 흑인, 여성이라는 차별을 딛고 홀로 권력과 싸운다. 당시 청문회에 참석한 상원의원 14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이후 미국 내 페미니즘 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본문으로]
  5. 각주 5) 같은 책, 167~168쪽 ; 86~87p [본문으로]
  6. 각주 6) 같은 책, 166쪽 ; 86p [본문으로]
  7. 각주 7) 같은책, 169쪽 ; 87p [본문으로]
  8. 각주 8) 같은책, 194~195쪽 ; 102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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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아미 2016.08.23 13:46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약선생님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오늘 글은 최근 관심을 두고 있던 책에 대한 내용이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관련된 지하철 에피소드가 속을 뻥 뚫어주네요 ㅋㅋㅋ

    • 북드라망 2016.08.23 14:27 신고 수정/삭제

      안녕하세요, 아미님^^
      저도 지하철 에피소드가 너무 감명깊었답니다.
      막상 저런 비스한 상황에 닥치면 참 대처하기가 애매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저 분은 참 멋있으신 것 같아요^^

    • 약선생 2016.08.24 00:38 신고 수정/삭제

      네네. 감사합니다. 이번에 여러 이슈와 이 책 때문에 다시 기억이 났던 에피소드입니다. 사람 얼굴이나 정황은 가물가물한데, 당시의 느낌은 강렬하게 되살아납니다. 또한 버틀러는 정말 멋진 철학자입니다. 책이 쉬운편은 아니지만, 곳곳에 세찬 문장들이 숨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