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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도서관] 『노인과 바다』 속의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by 북드라망 2016. 7. 26.


"플라톤의 반플라톤주의"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대서(大暑)의 태양이 뜨겁다. 태양(日)을 머리에 인 사람(者)[각주:1]의 형상도 끔찍한데, 그것도 크다(大)고 하니 도무지 속수무책인 절기다. 그래도 온종일 에어콘 옆에서 먼지바람만 삼키는 신세가 처량하다. 알고도 들이킬 수밖에 없는 처지라 차라리 비극적이라고 해야 한다. 회사일이고 뭐고, 바다에 나가 한바탕 첨벙거리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고 꼭 시원함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바다나 그곳은 내 몸을 발 없이 위로 뜨게 해주는 곳이다. 나는 니체가 중력의 악령에서 벗어나라고 했을 때 머리에 맨 먼저 떠올리는 곳은 바로 한바탕 첨벙거리며 떠있을 이 바다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그리는 바다는 그리 시원한 바다는 아니다. 노인 산티아고는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인다. 망망대해에서 혼자 사흘 동안 5.5미터가 넘는 청새치와 벌이는 사투는 어떤 영화보다 박진감 넘친다. 하지만 노인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인 두 눈을 제외하면 몸 구석구석 하나같이 노쇠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냥 오두막에 남아 여생을 기다리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안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여든 날하고도 나흘[84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신세이기도 했다. 그가 술집에 들어서면 다른 어부들이 놀려 대기까지 했으니, 조롱거리일 뿐인 그런 존재다. 그래도 그는 ‘85’라는 숫자가 재수 좋은 숫자라면서(84일째 고기를 못 잡았으니까, 이제는 고기를 잡을 때가 되었다는 뜻) 다시 바다로 나가기를 열망한다.



왜 그럴까? 노인은 왜 안전한 오두막을 두고 괴물 같은 저 바다로 다시 나가려고 할까? 몰락을 앞둔 노인의 처지에 바다는 왜? 니체는 바다의 이미지를 무척 좋아했다. 니체에게 바다는 포구에서 노는 아이에게 매번 새로운 놀잇감을 안겨다 주는 미지의 세계다. 현대인들이 ‘신’이나 ‘인간’이라는 놀잇감에 온통 정신이 팔려 도무지 그 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면도 바다를 무대로 묘파한다.[각주:2]


이 의미에서 노인에게 바다는 행복이다. 니체는 행복을 아주 다르게 설파했다. 니체에게 행복이란 힘이 증가된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기쁨을 말한다. 행복은 힘의 증대와 저항의 초극이 일어나는 순간의 기쁨과 동의어다. 노인 산티아고가 그저 오두막에 앉아 죽음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죽음에 순응해버리는 것이고, 따라서 힘(생명)은 사라지고 마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 다시 들어간다. 또 보통의 어부라면 먹잇감이 되었을 다랑어떼 따위가 옆에 몰려 다녀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큰 놈을 잡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뿐이다. 그가 선택한 행복은 다른 사람은 다다르지 못할 그곳까지 쫓아가서 큰 놈을 찾아내 그와 대결하는 것이다.[각주:3] 죽음이 염려되는 상황인데도 그는 자신의 행복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라 마르’(la mar=바다)로 떠난다.[각주:4] 


이렇게 『노인과 바다』는 니체와 연결해서 보면 잘 해석된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아주 묘한 착상을 하였다. 플라톤을 다시 읽는데 갑자기 이 『노인과 바다』가 연결되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통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니체는 반(反) 플라톤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헤밍웨이의 이 책도 실존주의와 통상 연결하여 생각하게 하지, 플라톤은 매우 뜬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오랜만에 플라톤을 읽어서인지, 일주일간 ‘플라톤 주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플라톤에 푹 빠져 지냈다. 역시 플라톤은 손에 들고 거닐면서 소리 내 읽으면 더 좋다. 집에 있을 때면 방안을 돌아다니며 출퇴근 시간에 읽은 부분을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조용한 여름밤 플라톤의 대화편은 마음을 장엄하게 만든다. 그 장엄함이 공기에 떠돌던 철학이 내 위에 내려안게 한다.


『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의 《대화편》 중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담은 책이다.


소크라테스의 짖궃음은 여전하여, 대화중 소크라테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나가려 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손목이 잡히는 장면(335b-d, 나는 소크라테스의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본다)[각주:5]이나 시모니데스의 시를 두고 억지스럽게 해석하는 장면(342a~347a, 나는 아직도 플라톤이 왜 이 시로 잘 진행되던 대화를 일탈시켰는지 잘 모르겠다)[각주:6]은 소크라테스의 코믹한 얼굴과 주위 사람들의 난처한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질문은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덕(aretē)[각주:7]은 과연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플라톤을 처음 읽을 때는 이런 질문들이 아주 뜬금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질문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각주:8] 여기에는 가르치는 것은 ‘앎(=인식)’뿐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모르는 것을 가르치지는 못하지 않겠는가.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하고 돈을 받는 사람이므로 덕은 교육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경우 덕은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그 예로 페리클레스 같이 뛰어난 사람도 정작 자신의 덕은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든다. 사실 덕 없는 나로선 그게 가능한지 어쩐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실로 다행 아니더냐. 덕이 있어도 그 덕을 아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니.


그러나 답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그 교육을 통해 문화가 전승될 뿐 아니라, 전승 문화 속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계속 나오지 않던가. 그렇다면 페리클레스의 예를 든 소크라테스의 손을 들어주어 덕은 가르쳐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결국 어찌되었건 어떤 가르침이 있었기에 훌륭한 사람의 덕들이 전승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감동은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야 나타나는 소크라테스의 반전이다. 덕의 전승 가능성은 앎을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달려있다. ‘좋음’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어떤 나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 좋음을 쫓아간다. 예컨대 아프면 먹는 약은 비록 먹을 때는 써서 나쁘지만, 먹은 후에는 몸의 회복이라는 좋은 상태를 가져온다. 만일 나쁨과 좋음을 구분해서 둘 사이를 제대로 측정할 줄만 안다면 나쁨(맛이 씀)에도 불구하고 좋음(몸의 회복)을 쫓는다. 앎은 좋음과 나쁨을 정확하게 측정할 줄 아는 것이다. 알고서는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다.



무서운 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서운 일에 뛰어드는 것도 그것을 참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현상의 모습), 무서움에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어떤 좋음이 있기 때문에(실재의 모습), 그리고 그 좋음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거침없이 그곳으로 뛰어든다. 플라톤의 구도에서는 전쟁이든, 희생이든 그곳에 좋음이 있고, 또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그것을 참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덕이 가르쳐지느냐는 그것이 앎이어야 가능하지만, 이놈의 앎이라는 것이 덕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라, 덕과 분리된 채 전달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르침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덕의 전승은 무척이나 복잡한 양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런 서술들은 푸코의 말대로 그리스의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인식’(=앎)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앎이 전제되지 않는 좋음은 불명확한 것이다. 모르고서 좋다고 덤볐다간 자기도 모르게 나쁜 짓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의미에서 플라톤은 자기배려의 지대에 ‘인식’을 도입한 최초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중에 서구 역사 전반에 걸쳐서 ‘영성(spirituality)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 인식(pure knowledge[connaissance])’을 제공하는데 결정적인 환경을 제공한다.[각주:9] 다시 말하면 자기배려와 앎이 분리되는 출발이 된 것이다. 어쩌면 '민중은 개, 돼지'라 말한 공무원은 이런 경우의 끝판왕이 아닐까. 덕을 갖지 않아도 시험으로 획득한 앎만 갖고서 통치자인 척하고 있으니. 플라톤이 삶의 구원 수단은 ‘측정의 기술’(=인식, 앎)이라고까지 딱 명시한 것(356e)을 보면 그것은 그리 틀린 시각이 아닌 것 같다.[각주:10] 


그러나 이번에 읽을 때 나는 이게 아주 묘하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이해해왔던 플라톤이 나의 편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니체나 푸코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닌데, 내가 자꾸만 플라톤을 교양층에 회자되는 통념적인 반(反) 플라톤의 관점에서만 플라톤을 해석하고 규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반박하면서 제시한 “인식(앎)”은 어떤 경우에도 ‘좋은 삶’을 위해 복속하는 인식이다. 그것은 좋은 삶이라는 큰 목적 없이는 절대적으로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아마 플라톤도 좋은 삶이 없이 순수 인식만 발달시키려 한다면 아주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도 여전히 자기배려의 좋은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인식을 활용하고자 했을 뿐인 것이다.


아울러 좋은 것(agathon)을 알면 좋은 것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나쁜 것을 행하는 자는 좋은 것을 알지 못할 뿐이라는 점에서 그의 인식론은 근대적 인식의 이미지와 달리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놀랍게도 플라톤이 “참된 앎이 행위의 근간이니,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앎이라 할 수 없다”[각주:11]라고 했던 왕양명과도 중첩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놀라운 감각의 전환이다.


이렇게 되자 나는 ‘감히’ 니체와 소크라테스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제의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불러내지만, 그가 비판한 모든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이미 넘칠 정도로 반영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무하마드 알리처럼 대중들의 통념에 훅을 날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니체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니체의 소크라테스 비판은 소크라테스 본연의 모습,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유가 온전히 승계된 비판적 소크라테스를 되살리기 위한 무의식적 행위였을지 모르겠다.


니체주의자 푸코가 말년에 소크라테스를 다시 불러낸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푸코의 자기배려 탐색은 철학적으로 본다면 소크라테스 안에 있는 니체주의를 끄집어 낸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니체와 푸코는 플라톤 안에 숨어 있는 반 플라톤주의를 끄집어내어, 통념적인 플라톤주의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서구를 플라톤의 언어로 무너뜨리려 했다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루쉰식으로 말하면 쇠철방 안에서 쇠철방의 재료로 쇠철방을 뒤집으려 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철학의 기원』에서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적 플라톤을 분리해서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날조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타고라스학파에게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초월적 사고[이데아(형상, eidos)]가 드러났다고 본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부분을 이오니아의 이소노미아(무지배) 영향권에 있는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무 자르듯이 자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반플라톤주의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진정한 소크라테스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파이돈』을 대표적인 피타고라스적인 텍스트로 폄하한다.[각주:12]
 

그러나 나는 무 자르듯 그리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플라톤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개의 입장이 스며들어있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태로 뒤섞인, 무척이나 혼종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고 싶다. 역사적 소크라테스, 비판적 소크라테스가 플라톤 전체에 걸쳐 다른 정신들과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불멸을 설파하고, 대표적인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권에 있어서 신체를 경시하는 철학서로 알려진 『파이돈』은 곧 있을 죽음을 앞두고, 있는 힘을 다해 죽음을 훈련하려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좋음’(agathon)을 찾으려는 눈물겨운 사고실험의 텍스트로 볼 수 있다. 즉, 나쁨 앞에서 좋음을 찾아 훈련하고 죽음을 통과하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파이돈』은 무척이나 실천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도 있다. 좋음을 향해 좋음의 앎을 끝까지 내쳐 달려간.



* * *


이제 우리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로 되돌아 가본다. 아마 이 책을 읽은 게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 겨울방학이었으므로 실로 삼십 년 만의 해후다. 평소에는 이 책을 니체의 행복관을 말할 때 적당한 예로 들려주곤 했다. 니체에게 통념적 행복인 안락과 장수는 오히려 힘(생명력)이 소멸되어 버린 상태에 불과하다. 5.5미터나 되는 청새치와 투쟁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전적으로 이런 행복관에 어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플라톤과 함께 읽어서인지, 힘이라는 다소 장엄한 서사보다 산티아고가 죽음에 불구하고 먼 바다로 나가 투쟁하는 것이 산티아고 자신에게 무척 즐거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전향되었다. 어떤 타인의 평가와도 무관하게 향유한 즐거움으로 말이다.


이 소설에서 타인의 평가는 맨 처음 선술집에서의 조롱들[각주:13], 맨 마지막 관광객이 청새치의 앙상한 뼈를 상어로 오해하는 장면[각주:14]으로 나온다. 그러나 모든 타인의 평가는 전적인 오해에 불과하다. 힘의 고양과 저항의 초극은 결국 그 자체로 즐겁다는 근본적인 "좋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노인은 결국 자신의 좋음을 향해 타인 평가와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을 회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청새치나 상어와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노인은 바다에서 청새치와 투쟁을 벌임으로써 “좋음”을 되찾은 것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참아내고 바다로 나간 것이 아니라, 청새치와 싸우고, 상어떼와 항전하면서 비로소 바다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높이는 “즐거움”을 획득한 것이다. 길이가 무려 5.5미터나 되며, 자신이 타고 있는 어선보다도 60센티미터도 넘게 긴 청새치는 행복을 위해 나타난 노인의 적이자 친구인 셈이었다. 이 적과 싸우고, 이 친구와 사랑을 나누면서 노인은 자신의 늙음을 넘어서고 있었다. 삼십년이 지나 동일한 책이 플라톤이 품은 반플라톤주의와 함께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프로타고라스 - 10점
플라톤 지음, 강성훈 옮김/이제이북스
자기배려의 인문학 - 10점
강민혁 지음/북드라망


  1. 각주 1) 김동철·송혜경 지음 『절기서당』, 북드라망, 2013, 130쪽. [본문으로]
  2. 각주 2)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7, 159쪽. [본문으로]
  3. 각주 3)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노인과 바다』, 김욱동 옮김, 민음사, 2012, 51쪽 [본문으로]
  4. 각주 4)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같은 책, 31쪽 ; 스페인어로 바다(mar)는 양성명사로 여성형 명사로는 ‘라 마르(la mar)’, 남성형 명사로는 ‘엘 마르(el mar)’이다. 따라서 산티아고는 바다를 여성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항상 새로움이 샘솟는 것들을 상징한다. [본문으로]
  5. 각주 5) 플라톤 지음, 『프로타고라스』, 강성훈 옮김, 이제이북스, 2011, 108~109쪽. [본문으로]
  6. 각주 6) 플라톤 지음, 같은 책, 119~128쪽. [본문으로]
  7. 각주 7) 그리스어 아레떼(aretē)는 ‘탁월함’, ‘훌륭함’으로 의미하기도 하고, 지혜, 용기, 분별, 절제를 총칭하여 ‘덕’이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본문으로]
  8. 각주 8) 강민혁 지음, 『자기배려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 79쪽. [본문으로]
  9. 각주 9) 미셸 푸코 지음, 『주체의 해석학: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115쪽. ; Foucault, Michel 『The Hermeneutics of the subject : Lectures at the Collége de France, 1981-1982』,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Picador NY, 2005, p. 77 [본문으로]
  10. 각주 10) 플라톤 지음, 같은 책, 143~144쪽. [본문으로]
  11. 각주 11) 왕양명 지음, 『낭송 전습록』, 문성환 풀어 읽음, 북드라망, 2014, 101쪽. [본문으로]
  12. 각주 12) 가라타니 고진, 『철학의 기원』,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5, 212쪽. [본문으로]
  13. 각주 14)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같은 책, 11쪽 [본문으로]
  14. 각주 15)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같은 책, 12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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