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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생의 도서관] 원문에 갇힌 의미를 해방하는 번역 『번역하는 문장들』

by 북드라망 2016. 8. 9.


번역, 타자가 들어오는 관문
조재룡의 『번역하는 문장들』




프랑스어에는 ‘에크리튀르’(écriture)라는 단어가 있다. 인터넷 포털 사전을 활용해 찾아보면 ‘문자, 글씨, 글쓰기, 문체, 화법이나 작곡법’ 등등으로 번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문자와 관련된 의미들을 지칭한다. 물론 사전에 나와 있는 뜻으로만 보면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현대철학에 와서 무척이나 문제적인 단어가 된다. 형이상학의 시대, 신의 시대에 ‘신의 음성’, ‘존재의 목소리’, ‘양심의 목소리’는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배후였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상 이면에 실체적 진리가 존재하며, 세상은 언제나 그것으로부터 움직인다는 초월적 신념은 강고한 것이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때 신은 바로 이런 음성들, 그러니까 우리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실체적 진리로부터 들리는 신의 음성이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긴급하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자기 이외의 힘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래서 그런 부정적인 힘을 실체화하고서 자신을 의탁해버리는 모든 유형의 노예양식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현재의 생명력을 희생하고, 알록달록한 대중문화에 눈멀어 자신의 정신을 쓰레기 문화에 의탁하고, 사실과 근거만 찾는 과학주의의 맹신적인 태도(사실과 근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때문에 사실과 근거를 넘어서서 존재를 변형하려는 의지와 영성(spirituality-절대 신비주의가 아니다!)을 배제하는 것, 그 모든 게 니체에게는 "신(God)"의 형상이다. 어떤 배치 속에서는 과학마저도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대철학은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초월적 구속을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맥락에서 현대철학은 ‘신의 음성’에 대비하여 ‘에크리튀르’(écriture)라는 단어를 내세운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음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그러니까 음성과 초월적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와 문자적 표기들을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지칭했다. 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문학과 예술작품 자체를 “욕망의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에크리튀르는 철학 전반에 걸쳐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뒤집는 초강력 파워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네에 오면 그것은 간단치 않은 단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에크리튀르를 그냥 사전적인 의미로 번역하면 아주 이상하게 된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에크리튀르는 무의식에 각인된 무엇, 즉 트라우마 같은 것을 무의식 밖으로 끄집어내어 어떤 예술 매체에 표현해 내는 것 혹은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때 에크리튀르는 ‘기록’이라고 번역해야 당초 의미에 부합한다. 그것은 모든 예술작품들의 발현, 모든 예술작품의 기록, 생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사전적으로만 해석하여 ‘글쓰기’라고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번에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 ‘욕망의 에크리튀르(écriture du désir)’가 ‘욕망의 글쓰기’가 됨으로써, 프로이트가 마치 성적 욕망을 발현한 에로소설 같은 것에 집중했다는 인상을 주고, 더군다나 모든 예술작품에 해당하는 것을 오로지 문학에만 축소시켜버리는 위험마저 생긴다.[각주:1]



이렇게 번역은 철학 원문 자체를 이해하는데 큰 지렛대 역할을 한다. 아마도 한글만으로 철학을 읽는 것은 원문 자체가 품은 의미 중에서 어떤 한 해석을 협소하게 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통은 철학 공부를 할 때 해당 원문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그러질 못했다. 그저 번역글을 읽는 것도 벅찬 터라, 번역된 책을 완독하고, 번역글을 기준으로 이해해 나가는 것에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문구에서는 ‘번역의 한계’가 ‘이해의 한계’가 되어버려 원문의 뜻을 잘못 새기기도 하였다. 물론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이해한 것이 작가가 쓴 그대로일까 하는 염려를 언제나 하곤 하였다. 그러다보면 공부를 할수록 어떤 자격지심 같은 것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철학책이란 철학자들이 생각하게 된 것(철학담론)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언어는 매개일 뿐, 중요한 것은 철학 담론 그 자체(저자가 아니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원문으로 읽든, 번역으로 읽든, 그것들은 철학 담론에 도달하는 여러 경로 중 하나일 뿐이지 않는가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러니까, 원문 독해도 철학 담론과 접속하는 여러 경로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런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좀 엉뚱한 생각이다. 원문 자체도 번역글과 다름없는 지위에 있다는 생각인 것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최근 문학평론가인 조재룡의 『번역하는 문장들』(문학과 지성사, 2015)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이 계기가 되어 번역이라는 주제가 문화계에 큰 화두로 떠오르기도 했고, 앞서 이야기한 나의 고민도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조재룡에 따르면 번역은 원문을 그대로 옮겨오는 수동적인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이게 없었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원문에게 원문 본래의 것을 되돌려줌으로써 진정 원문을 원문답게 만들어주는 작업일 수 있다는 말이다. 조재룡은 이런 번역의 힘을 ‘원문을 원문이게 해주는 힘’이라고 부른다.[각주:2]
 

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원문 스스로도 아직 알지 못하는 자신의 숨겨진 의미들 때문이다. 사실 원문 자체의 의미도 단일하지 않다. 원문 그 자체도 무척이나 다양한 시선과 배치 속에서 그때그때 다른 의미를 품는다. 따라서 원문은 언제나 타자의 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문장인 셈이다. 원문의 언어(예컨대 맑스의 책이라면 독일어) 속에 잠들어 있어서, 당연히 다른 언어(예컨대 한글)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번역을 통해 다른 언어(한글)로 재창조되면서 숨어있던 새로운 ‘의미’가 원문의 감옥에서 해방된다. 즉 원문에 갇힌 의미들이 번역을 통해 샅샅이 새로운 언어로 옮겨지면서 능동적으로 원문을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각주:3] 



사실 이런 해방의 힘은 이미 역사를 통해서도 발견된다. 이슬람의 세습 왕조인 아바스 왕조는 그리스의 의학, 천문학, 수학, 철학 등을 아랍어로 번역했었다. 그랬던 아랍인이 전성기에 이르러 유럽 서쪽 끝인 스페인의 코르도바로 이주한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아랍어로 되어 있는 그리스 책들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바로 이 작업의 결과물, 그러니까 재번역된 그리스 책들이 유럽을 중세의 터널에서 해방시켜 버렸다. 그때까지도 그리스 문화에 무지했던 유럽은 자신의 문화를 일구어낸 그리스를, 아이러니하게도 번역을 통해 재발견하면서 자신의 삶 자체를 구원한 것이었다. 원문(그리스어로 된 책)이 두 번의 번역(그리스어에서 아랍어, 아랍어에서 라틴어)을 통해 더욱 원문답게 재전유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현대 한글도 이런 번역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은 란가쿠(蘭學)에서 메이지(明治) 말기에 이르는 근대 여명기에 서구 개념어를 받아들일 때, 한자를 조합하여 새롭게 고안하여 받아 들였다. 철학(哲學), 이성(理性), 논리(論理), 의식(意識), 추상(抽象), 구체(具體), 정치(政治), 교환(交換) 등 철학, 정치, 경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개념어들은 이때 일본에 의해서 고안된 한자 조합어들이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유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일본 근대의 자장 안에서 그들이 생각한 범위내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런 개념어들이 저급하다거나, 서구어를 제대로 담지 못하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재룡이 소개하는 “낭만적(浪漫的)”이란 단어 생성은 생경하고 흥미롭다.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로만데끼(ろうまんてき)’이다. 그런데 이것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표기는 ‘ロマンス(로만스, romance)’나 ‘ロマンチシズム(로만치시즘, romanticism)’이다. 아마 영어의 로만틱, 로맨스, 로맨티시즘의 발음에 상응하는 한자어를 신중히 골라 조합하면서 탄생한 번역어일 것이다. 선택된 두 한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물결칠 랑(浪)’과 ‘질펀할 만(漫)’이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음차 뿐 아니라 그 의미도 어떻게든 담아내려 몸부림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4] 그러니까 로맨스라는 외래어에 담겨 있는 감수성을 일본인들의 감수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번역이 일본어의 감수성에 진정 새로운 감성을 고안해 낸 것이기도 한 것이다. 번역은 감각의 발명이었다. 조재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역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나의 정체성(identité)을 고안해낼 유일한 수단이자 매개라고 말해야 한다. 번역은 실로 타자, 내 안에 내가 늘 데리고 다니지만 잘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타자를 일깨우고, 이로부터 내가 나 자신의 정체성을 도모한다는, 부정하려 해보았자, 결국 수긍하게 되는 증거이자 엄연한 경로이기도 한 것이다.”[각주:5]


그래서 번역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문화 활동의 핵심이기도 하다. 외국어에 담긴 새로운 타자가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니까. 조재룡은 이런 경로의 추적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는 이를 ‘번역의 인식론’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역사성에 대한 고찰이다. 여기서 역사성은 텍스트의 생산 경로와 언어, 문화적 환경, 글쓰기의 맥락과 여건에 따라 조절되는 에피스테메, 즉 번역을 둘러싼 사유 가능성과 조건인 것이다. 그것은 내안에 타자가 들어오는 길들을 밝히는 작업인 것이다. 번역은 타자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문이다.



이렇게 번역의 새로운 의미를 알고 나자, 나는 오히려 외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아주 색다른 호기심이다. 지금까지 나는 번역된 글만 읽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내 수준에 그 정도만 하면 되지, 라고 안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번역의 생생한 생명력을 깨닫자, 원문 언어조차 번역과 지위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평등심이 재차 새로운 방식으로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한글 읽기도 벅찬데, 그보다 어려운 원문 언어라니, 이 나이에 어떻게 그걸 더 공부한단 말인가. 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러나 번역의 생명력을 이해하자, 오히려 역설적으로 원문 언어도 철학자의 생각(철학담론)을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한글 번역을 이해할 수 있다면, 원문도 조금만 노력하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하는 언어 공부(외국어 공부)라면 늦은 나이에도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란 발심이 생긴다.


어쩌면 이 발심은 시인 김남주가 감옥 안에서 그가 따르고자 했던 시인들의 글을 번역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그리고 자신의 시를 창조하려 했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의 시는 치열한 번역 과정, 즉 외국어와의 침통한 투쟁 속에서 체득한 것이다.[각주:6] 그에게 번역은 ‘혁명의 번역’인 것이다.[각주:7] 그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원문에 숨어 있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욕망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지대로 들어가 보고 싶다. 이제 순서를 달리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한글 번역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였고, 이제서야 그 생각들을 더 가속화시킬 도구를 습득하려는 것이다. 한글과 외국어 사이에 부유하는 타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움직여야 한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번역하는 문장들 - 10점
조재룡 지음/문학과지성사


  1. 각주 1) 조재룡 지음, 『번역하는 문장들』, 문학과지성사, 2015, 154쪽. [본문으로]
  2. 각주 2) 같은 책, 58쪽. [본문으로]
  3. 각주 3) 같은 책, 59쪽. [본문으로]
  4. 각주 5) 같은 책, 178쪽. [본문으로]
  5. 각주 6) 같은 책, 26쪽. [본문으로]
  6. 각주 7) 같은책 325쪽(염무웅의 김남주 번역시집의 「해설」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각주 8) 같은 책, 35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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