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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약선생의 도서관] "그 한 부분에 머리를 내던져 적어도 금이라도 가게 하자"

by 북드라망 2016. 9. 6.


전락의 훈련, 철저한 제로

-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 -




소세키의 강연 중 「문예의 철학적 기초」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다. 이 강연은 마흔 살이 된 소세키가 동경미술학교 문학회 개회식에서 진행한 것이다. 강연이라지만 요즘 같은 그런 대중 강연은 아니었던 듯하다. 강연 내용에는 만만치 않은 논리들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다. 소세키 입장에서도 그랬던지, 강연 후에 소세키가 녹취록을 정리하고 보니 들고 간 강연 원고보다 두 배나 긴 글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소세키 산방에 앉아있는 나츠메 소세키


오래전에 이 글을 읽을 때는 그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 소세키 강연의 백미는 ‘자기본위(自己本位)’를 묘파한 「나의 개인주의」이지 않느냐하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인간 인식의 불행은 집합적 대상의 어느 한 각이 크게 조명을 받으면 다른 각들은 그 조명 때문에 가려지는 것이다.


마흔 살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물론 『도련님』, 『풀베개』를 발표한 이후이며, 결정적으로 도쿄제국대학 강사를 사직하고 아사히신문사에 소설을 쓰는 전속작가로 입사한 바로 직후이다. 소세키가 안정된 대학교수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전업 소설가로 변신시킨 때이며, 이와 함께 죽을 때까지 살게 될 “소세키 산방(漱石山房)”으로 이주한 때이기도 했다. 바야흐로 소세키가 본격적인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소세키라는 이름처럼 바보 같고 기이한 전환이었다.[각주:1] 소세키가 처음에 소설가가 되고자하는 자각 없이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의 큰 전회라고도 할 수 있었다.[각주:2]


이런 때 소세키는 강연을 좀 이상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가 뜬금없이 ‘나’라는 존재의 정체가 대단히 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런 것이 대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고 칭하는 존재가 객관적으로 세상 가운데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의식이 연속되어 있을 뿐인 것을 편의상 ‘나’라고 이름을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각주:3] 어떤 의식들이 ‘살고 싶다’는 것에 끊임없이 지배되면서, 그것들이 결집하여 마치 연속되어진 듯 여기게 되고, 그래서 그런 연속적 경향이 ‘나’라는 관념을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의식의 연속적 경향이 ‘나’라는 관념을 형성시킨다."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하는 것도 의식과 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관계라고도 덧붙이는데, 심지어 ‘나’는 그런 시간과 공간조차 날조하여 만들어낸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들은 단지 살고 싶다, 살고 싶다고만 생각하고 있다.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어떠한 거짓이라도 만들고 어떠한 잘못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수행하며, 아무리 야비한 짓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간이 없어서 생활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곧 공간을 날조해 버립니다. 시간이 없어서 형편이 좋지 않다고 짐작하면 좋다, 그러면 시간을 만들어 내자 하고 곧 시간을 제작해 버립니다.”

- 나츠메 소세키 지음, 『문학예술론』, 황지헌 옮김, 소명출판, 2004, 91~92쪽.


이런 인식은 몇 년 후 『그 후』의 다이스케에게서 더욱 진전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그는 의식조차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환 작용’이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부딪히며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게 된다.[각주:4] 의식조차 교환 작용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까지 설명하고 나서, 소세키는 문학의 역할을 묘하게 이야기한다. 세상이 분화되면서, 그러니까 세상이 ‘나’와 ‘사물’로 분화되면서 점차로 몽롱해진 것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 의식한 것을 다시 자세히 구별해 나가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의 임무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주 이상한 정의이다. 문학의 그 흔한 서사성이나 허구성, 재현성을 이야기하기는커녕, 존재 자체의 생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세키는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를 우리와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소세키는 강연 중간에 이르면, 현대 문학의 이상이 미(美)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며, 또한 장엄(莊嚴)도 아닌, 오로지 진(眞)이라는 한 글자에 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각주:5] 이건 아주 이상한 것이다. 현대문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나 윤리가 아닌가.


"현대 문학의 이상은 '진(眞)'에 있다."


이런 관점이 다듬어질 무렵 소세키는 그전과는 대단히 다른 소설을 발표한다. 바로 『갱부』다. 열아홉 살 난 주인공 ‘나’는 가출을 한 끝에 삶의 밑바닥이라고 여겨지는 갱부의 세계로 내려간다. 주인공은 속세에서 삼각관계에 빠졌다. 쓰야코와 스미에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다가 아마 부모와 친척들에게서 큰 비난에 직면한 모양이다. 소설에서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은 전체 이야기에서 ‘나’라는 존재가 무너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여자 문제는 가출과 자살의 계기일 뿐이다.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왔다”[각주:6]  그것은 어떤 죽음,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의 죽음을 개시하는 출발로서만 작용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카프카의 소설들처럼 오로지 어떤 상황 속으로 주인공을 몰아넣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소세키는 주인공을 죽음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일까.[각주:7]


소세키는 평소 심리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기이한 허풍선이 메이테이의 대사에는 ‘제임스’라는 사람의 이론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 ~ 1910)이다. 소세키는 그가 쓴 『심리학의 원리』를 읽고, 일부 번역까지 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이 학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해주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듯하다.


소세키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응시하려는 듯 구샤미로 하여금 곰보 자국이 남아 있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자꾸 확인하도록 한다. 소세키도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렸던 탓에 얼굴에 남아 있는 곰보 자국이 항상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것은 꼭 곰보 자국 때문만은 아니다. 소세키의 런던 시절 일기에 보면 그는 ‘self-consciousness’(자의식)라는 단어를 직접 써가며 온종일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신경쇠약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랜 후에 쓰인 소설 『그 후』에서도 주인공 다이스케는 아주 예민해서 항상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심장고동을 확인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태도는 소세키 소설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주인공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는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소세키의 여러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각주:8] 특히 메이테이와 간게쓰는 소세키가 문득문득 죽고 싶어 하는 심정을 유머에 기대어 드러내는 잠재의식의 전령이기도 했다. 메이테이의 ‘목매달기 소나무’ 에피소드, 간게쓰가 연설하는 ‘목매달기 역학’ 같은 것도 사실 소세키의 정신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굴절되어 돌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자기 자신의 심연 속에 숨겨진 죽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사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볼수록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심연만 보이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문학의 이상이 진(眞)이기도 한 것이다.[각주:9]
 


이런 심연은 『산시로』에서 전차에 치어 죽은 젊은 여자의 잘린 시체로도 나타난다. “밑에는 시체가 반쪽 있었다. 기차는 오른쪽 어깨에서 유방 아래를 지나 허리 위까지 완전히 잘라 비스듬히 동체를 내동이치고 가버린 것이다. 얼굴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젊은 여자였다.”[각주:10] 소세키는 튼튼할 것만 같은 생명이 단지 ‘꽝’하는 일순간에 사라질 것이라는 심연을 어두운 정경으로 묘사했다.[각주:11] 그것은 냉엄한 현실 인식이기도 했다. 소세키에게 현실의 생명은 순식간에 나타나고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갱부』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 본다. 물론 소세키의 충격적인 경험도 이 소설에 투영되어 있다고는 한다. 그것은 그 유명한 제자의 자살 사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기 2년 전 그는 제일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제자 중 하나인 후지무라 미사오에게 영문학을 파악하는 방식에 대해 좀 강하게 질책을 했던 적이 있었나 보다. 물론 이것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후 미사오는 ‘게곤 폭포’라는 곳에 가서 몸을 던지고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사건은 소세키와는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게곤 폭포’에 가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욕망을 자주 드러낸다.


그러나 『갱부』는 그런 생물학적인 자살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있다. 주인공은 앞에서도 언급한 ‘심연’에 가 닿고 싶은 욕망으로 철철 넘친다. 하쓰씨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장면은 그래서 다르게 해석될 명장면이다. 여기서 게곤폭포는 심연의 끝을 상징한다. 소세키는 이 장면에서 의식을 숫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의식을 숫자로 나타내면 평소 10이었던 것이 지금은 5가 되어 멈춰 있었다. 잠시 후에는 4가 되었다. 3이 되었다. 그대로 가면 언젠가 한 번은 0이 되고 만다. 나는 그 경과에 따라 옅어져 가면서 변화하는 기쁨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 경과에 따라 옅게 변화하는 자각의 정도만큼 자각하고 있었다. 기쁨은 어디까지나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치로 따지자면 의식이 어디까지 내려가려고 하든 나는 기쁘다고만 생각하며 만족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점점 내려가 드디어 0에 가까워졌을 때 돌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 나쓰메 소세키, 『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4, 259쪽.



그렇다면 이 소설은 「문예의 철학적 기초」에서 이야기한 그것, 즉 애당초 ‘나’가 없는 그 상태, 그러니까 ‘의식이 0인 상태’로 내려가 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것이다. 소세키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죽음을 향해 가보게 한 것은 바로 이 지대로 내려가 보도록 한 것이다.


소세키에게 ‘의식이 0인 상태’는 아주 독특한 지대이다. 어떤 경로를 거쳐 그 지대에 이르면 두 가지의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순풍에 돛 단 듯한 기세로 밑바닥까지 흘러들어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죽음 직적까지 가서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온다. “소극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돌연 반대로 적극의 꼭대기로 돌아온다. 그러면 순식간에 생명이 확실해진다.”[각주:12] 소세키는 바로 이것을 ‘죽다 살아난 경험’이라고 명명한다.


이후의 서술들은 바로 돌연 반대로 “적극의 꼭대기”로 돌아오는 순간들을 묘사한다. 죽어버리자고 생각하고 사다리에서 몸을 약간 뒤로 당기고 손에서 힘을 빼려고 했을 때, 어차피 죽을 거면 여기서 죽어봐야 신통치 않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이어서 “게곤 폭포까지 가라”하는 호령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때 주인공은 느슨해지려던 손을 다시 단단히 조인다. 의식이 0인 상태는 오히려 살라는 호령이 들리는 지대이다. 마침내 다음과 같은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좀처럼 나갈 수 없었다. 어쩐지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복장이 터질 것 같았으므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깨버리고 싶었다. 어느 쪽을 깨느냐 하면 물론 머리를 깨는 것인데, 얼마간 벽도 깨질 정도의 울화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걸으면 걸을수록 천장이 방해가 되었다. 좌우의 벽이 방해가 되었다. 짚신 바닥으로 밟는 계단이 방해가 되었다. 갱 전체가 나를 가두고 언제까지고 내보내주지 않는 것이 가장 방해가 되었다. 그 방해물의 한 부분에 머리를 내던져 적어도 금이라도 가게 하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생각한 것은 빨리 게곤 폭포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 『갱부』, 272쪽.


정면 멀리 보이는 게곤폭포


머리를 부딪쳐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울화가 치미는데, 얼마 만큼이냐 하면 얼마간 벽도 깨질 정도라고 한다. 읽는 나마저 화가 치솟으면서도, 어린이의 마음처럼 쓰인 이 문장을 보고 웃음이 함께 번진다. 그러나 뒤이어서 방해물들을 향해 '머리를 내던져 적어도 금이라도 가게 하자'고 말한다. 마음만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 실제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 소세키는 무척 전투적인 작가다.


결국 이 소설은 현실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계를 그린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락의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게곤 폭포는 그 종착지로 선택된 그런 곳이다. 결국 이 글은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서 진행된 사고실험과도 같다. 물론 계급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있겠지만 일단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그 문제도 함께 사고할 수 있을 글이다. 어쩌면 소세키의 모든 소설이 그렇기도 하다.


이런 사고실험을 소세키는 ‘전락의 수련’이라고 부른다.[각주:13] 주인공이 기관지염 판정을 받고, 그것이 폐병의 바탕이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그는 운명이 여기까지 몰아와주었으니, 운명에 날려갈 때까지는 여기에 있자고 다짐한다. 이곳 가장 밑바닥, 의식이 제로인 상태를 훈련한다면 죽을 때까지는 견딜 수 있지 않겠느냐는 가느다란 숨결 같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는 문득 오는 길에 보았던 민들레가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이곳 사람들의 얼굴이 모질고 악착같은 얼굴[각주:14], 살이라는 살은 모두 퇴각하고 뼈라는 뼈는 모조리 함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얼굴, 한마디로 거칠고 난폭한 느낌이었다.[각주:15]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빚은 인형의 머리처럼 보이고, 나와 똑같은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을 뿐인 평범함 얼굴들이다.[각주:16] 소세키의 존재가 바뀐 것이다.


그것은 ‘나’가 사라진 지대, 의식이 제로가 된 상태를 훈련한 이후의 소세키가 바라본 세상이다. 「문예의 철학적 기초」에서 말한 문학의 임무란 바로 존재의 생성을 뒤집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성 후에 이미 굳어버리고 변하지 않게 된 ‘나’와 ‘사물’을 거슬러서 다시 그 생성의 기원으로 올라가보는 것, 바로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갱부』는 그 실험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기승전결이 없이 아주 엉뚱한 곳에서 끝낼 수 있다. 따라서 최후의 그 지대에는 문학이라는 형식조차 없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소세키는 자신의 작업 모두를 그것에 투신했던 전사이기도 했다. 철저한 제로에 이르는 어떤 전투에 복무한 전사 말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갱부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현암사
자기배려의 인문학 - 10점
강민혁 지음/북드라망


  1. 각주 1)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원래 이름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이다. 그러나 소세키에게는 하나의 이름이 더 있다. 시오바라 긴노스케(塩原金之助). 9살 때까지 함께 살았던 양부모 쪽 성을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결국 이름은 세 개다. 이 중 필명인 소세키(漱石)는 하이쿠로 이어진 친구 마사오카 시키와 관련된다. 시키가 친구들이나 보라고 쓴 자필회람문집에다 소세키가 비평을 쓰고 ‘소세키’라고 서명을 했다. 이때부터 긴노스케가 소세키가 된 것이다. 이리 보면 ‘소세키’는 소세키의 정신이 솟아난 최초의 장이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때 유아용 교과서 『몽구』에 나온 손초라는 사람의 일화에 나온 말이다. 예부터 침석수류(枕石漱流)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돌로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을 한다는 뜻인데, 자연에 은거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손초가 착각하여 침류수석(枕流漱石)이라고 말한다. 즉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입을 헹군다는 말을 한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 알고 있다고 해도 손초는 고집을 피우며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으려 함이요,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으려는 것일세”라고 꿰맞추며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의 수석(漱石)이 바로 ‘소세키’이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돌로 양치질한다는 무척이나 기이한 이름이다. [본문으로]
  2. 각주 2) 모두 알다시피 소세키는 서른 일곱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사생문(寫生文)으로 소설가에 데뷔했다. 그러나 영문학 교수였던 그는 이 소설을 쓸 때까지 만해도 자신이 소설가가 되겠다고 하는 의식이 없었다. 단지 친구가 ‘기분전환’ 삼아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이른바 ‘놀이’로 이를 행했던 것이다. 그는 영국 유학으로 돌아왔을 때, 유학시절의 끔찍함 때문에 온 정신이 한계상황으로 내몰려 있었다. 그에겐 진정 기분전환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유학 생활은 너무 궁핍했으며, 게다가 연구도 한계에 부딪혀 앞을 알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그에겐 불쾌한 기억뿐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신경쇠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소세키의 딸이 회상하길 당시의 소세키는 심한 노이로제 상태였으며 자녀들조차 가까이 다가오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표면의 유머러스함 이면에 이런 어두움이 숨겨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3. 각주 3) 나츠메 소세키 지음, 『문학예술론』, 황지헌 옮김, 소명출판, 2004, 78쪽. [본문으로]
  4. 각주 4)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윤상인 옮김, 민음사, 2003, 45쪽. ; 강민혁 지음, 『자기배려의 인문학』, 북드라망, 2014, 172~173쪽. [본문으로]
  5. 각주 5) 나츠메 소세키 지음, 『문학예술론』, 황지헌 옮김, 소명출판, 2004, 119쪽. [본문으로]
  6. 각주 6) 나쓰메 소세키, 『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4, 45쪽. [본문으로]
  7. 각주 7) 죽음의 장면은 소세키 소설들에서 매번 반복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메이테이나 간게쓰의 죽음 충동이나 고양이의 ‘자살’ 말고도 『우미인초』에서 아름다운 후지오의 죽음, 『풀베개』에서 보이는 오필리아의 자살 이미지, 『산시로』에서 산시로가 노노미야의 집을 지키다 목격하게 되는 젊은 여자 시체. 그리고 『마음』은 아예 죽음의 이야기이다. 선생님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선생님은 세상을 불신하게 되었고, 선생님의 배신으로 친구 K는 ‘자살했으며’, 메이지 천황이 ‘붕어’했을 뿐 아니라, 그 붕어와 함께 노기 장군 부부가 ‘순사’를 한다. 마침내 선생님이 ‘자살’을 하고, 소설엔 안 나왔지만 나의 아버지도 ‘돌아가셨을 것이다’. 소세키 자신도 일상에서 죽음은 너무나 익숙한 주제였다. 소세키가 친부모에게 돌아갔을 때 상속자였던 소세키의 큰형이 도쿄대학의 전신인 가이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큰형은 어린 소세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학문적 의욕을 북돋워주고 공부도 돌봐준 듯하다. 그러나 큰형은 치명적인 병이 있었다. 결국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차남인 작은형도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이어서 친어머니도 죽는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고양이가 정신이 들어보니 형제도, 어머니도 사라지고 없었다던 장면은 딱 소세키의 모습 그대로다. 또한 그 자신이 위궤양과 신경쇠약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었다. 소세키에게 죽음은 큰 심연이자 삶의 매우 중대한 사태다. [본문으로]
  8. 각주 8) 사람들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소세키=구샤미”라는 등식에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구샤미는 의식되는 표면의 소세키일 뿐이고, 메이테이와 간게쓰, 도쿠센, 도후의 독특한 모습들이야말로 소세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 뒤편에서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평가하는 또 다른 소세키이다. 그래서 나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온통 ‘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결국 소세키는 구샤미, 메이테이, 간게쓰 그리고 고양이의 복합체인 것이다. 소세키는 그 사이에서 계속 진동하면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9. 각주 9) 사실 고양이의 최후도 자살에 가깝다. 처음엔 발버둥을 치지만, ‘자연의 힘에 맡겨 저항하지 않기로’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죽음을 ‘선택’한다. 사실 고양이는 여러 소세키 중 어떤 분신이다. 정처 없이 떠돌다 우여곡절 끝에 구샤미의 집에 숨어 들어와 살길을 찾은 고양이는, 양자로 갔다가 양부모의 이혼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소세키를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소세키는 언제나 이곳저곳을 부유(浮遊)했다. [본문으로]
  10. 각주 10) 나츠메 소오세키 지음, 『산시로』, 최재철 옮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5, 50쪽. [본문으로]
  11. 각주 11) 같은 책, 51쪽. [본문으로]
  12. 각주 12) 나쓰메 소세키, 『갱부』,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4, 264쪽. [본문으로]
  13. 각주 13) 같은책, 312쪽. [본문으로]
  14. 각주 14) 같은 책, 144쪽. [본문으로]
  15. 각주 15) 같은 책, 167쪽. [본문으로]
  16. 각주 16) 같은 책, 3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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