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대학] 수신(修身)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

몸과 마음

 


영화 『트랜센던스』는 천재 과학자의 의식이 컴퓨터에 업로드 된다는 SF영화다. 주인공인 인공지능과학자 '윌'은 기술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죽게 되지만, 그의 의식이 인공지능 컴퓨터 '핀'에게 업로드 된 후, 점점 수퍼 인텔리전스가 되어 간다. 영화는 의식이 전기신호로 환원될 수 있고, 몸과 무관하게 독립적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여기서 몸은 정보를 실어 나르는 매체에 불과하다.
 



마음 곧 정신이 본질적이라는 생각은 서구에서는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몸은 곧잘 마음을 배반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의지를 발휘하려고 해도 몸이 꼼짝 않고 버티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옷만 바꿔 입어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몸과 마음은 누가 주인이랄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인 것 같다. 유가에서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明明德(명명덕)을 止於至善(지어지선)에 이르게 하는 것을 삶의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유가에서도 마음의 문제는 중요하다. 주자는 『대학장구』에서 마음을 身之所主(신지소주) 즉, '몸의 주인'이라 주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조목의 구도도,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 후에,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로 이어진다. 모두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 몸과 집안, 국가, 천하로 나아가는 구도다.


그러나 주자가 마음을 몸의 주인이라 주석했다고, 몸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피동적인 대상으로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明德(명덕)은 한번 깨우친다고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외부와 접속되어 있고, 그 외부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존재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물에 접한 몸으로 인해 끊임없이 요동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것도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할 수는 없기에 언제나 쌍으로 움직이고, 서로에 대해 상관적이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한다면, 몸과 마음은 한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이기에  분리 불가능하고, 그 움직임은 서로 평행하다.


『대학장구』의 전7장인 정심수신장(正心修身) 또한 몸과 마음의 평행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修身(수신)이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몸(身)이 지나치게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所謂脩身, 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
소위수신, 재정기심자, 신유소분치즉부득기정, 유소공구즉부득기정, 유소호락즉부득기정, 유소우환즉부득기정.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란, 몸 역시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PEACE~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몸이다. 忿懥(분취)하고, 恐懼(공구)하고, 好樂(호요)하고, 憂患(우환)이 있는 것은 몸이다. 외물과 접하고 있는 것은 몸이기에 분노하고 두려워하고 좋아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자체를 죄악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지나치게 되기 십상이다. 지나침이 있으면, 正心정심 할 수 없다. 그러면 수신은 물 건너 간 것이다. 그래서 몸이 지나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구절은 몸이 마음에 미치는 효과를 말한다. 유가에서 예를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몸을 바르게 해야 바른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주석에서 '忿懥(분취)하고, 恐懼(공구)하고, 好樂(호요)하고, 憂患(우환)하는 것을,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한다[當作心]'고 하면서 마음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서양의 관념론과는 다르다. 유가의 사유에서 안과 밖은, 즉 마음과 몸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대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에서 안과 밖의 상관성을 배웠다면, 수신에서는 그것을 내 몸에 체화하는 단계다. 정심수신장의 다음 구절은 마음이 몸에 미치는 효과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마음이 없으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분노하고,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좋아하고, 또 지나치게 걱정하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되는 것은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이고, 더 많이 듣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고, 너무 많은 맛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은 本末(본말)을 번갈아 하면서 서로 상관적이다. 그러니 몸과 무관한 마음이라는 구도는 유가의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기분이 좋고, 기분이 좋은 날은 아픈것도 잊어버리곤 한다. 몸과 마음이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컴퓨터에 업로드 된 윌의 의식은, 그의 아내가 아무리 자신의 남편이라고 확신해도 이전의 윌과는 다른 존재다. 죽기 전의 윌은 재미있어서 인공지능연구에 몰두했지만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희망이나 야망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컴퓨터로 의식이 업로드 되자마자 컴퓨터+윌의 의식은 자신을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전력과 더 많은 데이터를 요구한다. 초월자인 신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 영화는 많은 SF영화애서 되풀이 되는 질문인,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어디인가를 묻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분리에 대해서,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컴퓨터+월은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여, 장님도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도 걷게 한다. 육신을 벗어버린 의식은 0과 1의 명멸하는 신호 패턴이기에 그것을 실어 나르는 매체에 상관없이, 사방에 편재할 수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서구인들의 신, 자연의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자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이런 식의 초월자를 신으로 상정할 수 있는 이유도 몸 바깥에 독립적으로 있는 정신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가의 사유에서 자연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자는 없다. 『주역』의 리괘(離卦), 단전에는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백가지 곡식과 초목은 땅에 걸려 있다.[日月 麗乎天 百穀草木 麗乎土]'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걸려 있다(麗)'는 관계 속에 위치한다는 의미다. 천지 만물이 나름의 관계 속에서 나고 자라기에, 거기에서 벗어난 존재란 없다. 그렇기에 신은 주재자로서의 귀신이 아니다. 『중용』의 귀신장에는 귀신은 천지의 공통의 작용이면서 조화의 자취라고 주석이 되어있다. 조화의 자취란 변화의 흔적이라는 말이다. 자연의 운행은 모두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보이지 않지만 변화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왜 그런 변화가 생기는지 그 원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원리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초월자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형체가 없어,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자연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고 그 자취를 남긴다. 즉 형체와는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 역시 몸과 마음은 분리 불가능하게 상관적이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 바깥에 있는 존재를 욕망하는 것은 유가에서는 불경함이 아니라, 妄(망)일 따름이다. 공자님이 혹은 주자께서 이 영화를 보셨다면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라고 탄식 하셨을 것 같다.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

所謂脩身, 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
(소위수신, 재정기심자, 신유소분치즉부득기정,

유소공구즉부득기정, 유소호락즉부득기정, 유소우환즉부득기정.)

수신(修身)이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몸(身)이 지나치게 분노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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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애독자 2016.01.20 08:54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몸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지나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분노해도, 지나치게 두려워해도, 지나치게 좋아해도, 지나치게 걱정해도 바름을 얻을 수 없다... 이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네요. 지나친 것을 왜 경계하라고 할까. 과도한 것, 분에 넘치는 것, 절제가 없는 것, 그건 내 몸을 혹사시킵니다. 즐거움이 없이 고달프기만 한 것. 그건 자연스러운 나의 욕망이 아니라 권력의 욕망-욕심이죠. 그런데 이 욕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초월자를 상정하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외부의 추상적 척도에 나를 맞추려다 보니 자기가 소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없다! 내 몸은 천지만물에 ‘걸려 있다’, 내 몸의 작용과 활동이 곧 마음이다! 대학 장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 북드라망 2016.01.20 09:46 신고 수정/삭제

      네. 몸과 마음의 평행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지요. 오늘도 열심히 읽으셨네요^^

  • HFOC 2016.04.10 19:35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옷만 바꿔 입어도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몸과 마음은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네요!! 천지 만물이 서로 관계속에 걸려 있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 놀 수 있을리가요!

    • 북드라망 2016.04.12 16:50 신고 수정/삭제

      신발만 다른 걸 신어도 기분이 달라지는 걸요. 그러고보니 앞서 말씀하셨던 '수동성'도 그런 '관계'들에서 생각해보시면 힌트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주행'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화이팅~!

    • HFOC 2016.04.12 23:38 신고 수정/삭제

      아직도 조금 헷갈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큰 힌트가 되었습니다. 관계와 수동성이 어떻게 연결되나 잘 생각해 보면 실마리가 조금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뭔가 알 듯 말듯. ㅠㅠ

    • 북드라망 2016.04.14 10:04 신고 수정/삭제

      저도 늘 뭔가 알듯 말듯 합니다. 하하하;; 이게 한 걸음이려니~ 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