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대학] 외부에 흔들리지도, 스스로를 속이지도 말라


毋自欺(무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대학장구』를 외부성의 관점으로 읽고자 했다. 유학의 중심 텍스트인 『대학장구』는 주체가 주인공이 되는 소위 근대성과 대결하는데 유효한 자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의 말씀과 격물치지조차도 명덕을 따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매혹으로 읽으려 했다. 근대성의 상징은 무엇보다 능동적인 주체이고, 이러한 능동성은 지금도 장려되고 숭상된다. 하지만 능동적 주체는 반드시 자신의 능동성이 행사될 수 있는 수동적인 대상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마냥 장려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외부성이란 능동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자연으로부터 촉발되는 수동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대상의 구도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천지 만물이 모두 자신이 아닌 외부에 의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 외부성의 사유다. 이때 모든 존재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영향을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동성을 긍정했을 때 비로소 주체로서의 나의 강고한 경계를 지우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의 문제를 적대가 아닌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明明德(명명덕)을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되는 이러한 존재들의 관계성을 깨우치는 것으로 읽은 것이다. 明明德(명명덕)에 해당하는 8조목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까지다. 사실 격물치지로부터 배운 앎이 바로 이러란 존재의 관계성을 터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주자는 이치를 터득했다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앎과 삶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간극 또한 외부에 의해서 촉발되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나도 그 땅을 갖고 싶기 때문이다. 사촌이 땅을 샀다고 자랑질 하지 않았다면, 욕심 때문에 배 아플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외부성이란 끊임없이 나를 뒤흔드는 것이고, 그것의 방향성 또한 언제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주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


주자가 효종을 알현하러 임안으로 갈 때, 한 지인으로부터 “폐하께서는 자네의 그 正心誠意(정심성의)에 넌더리를 내고 있으니 그런 얘기는 아예 입에 담지도 말게” 라는 충고를 들었다. 주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평생 공부한 것은 이 네 글자뿐이네. 해야 할 말을 하지 말고 임금을 속이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또 주자의 제자 체침이 주자가 임종에 이르기까지 7일간의 행장을 기록하였는데, 임종 3일 전까지 『대학장구』의 誠意章(성의장)을 개정했다고 한다. 주자는 외물에 촉발되는 욕심을 誠意正心(성의정심)으로 해결하려 한 것 같다.


격물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 6장 誠意章(성의장)이다. 誠(성)에 대해 주자는 實(실)이라고 주석을 다는데, 『중용』에서 이를 眞實無妄(진실무망)이라 풀었다. 진실되고 망령됨이 없다는 의미가 誠(성)이다. 자연은 誠(성)하다. 이때 誠(성)은 제멋대로가 아니라 한결같다는 말이다. 해는 뜨기 싫다고 해서 뜨지 않는 법이 없고, 태어나는 것은 죽기 싫다고 죽지 않는 법이 없는 것이 誠(성)이고 또 實(실)이다. 誠(성)의 반대가 妄(망)이다. 妄망이란 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 이치이고, 산을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이 이치인데, 죽기 싫다고 발버둥치고, 내려가기 싫다고 온갖 술수를 부리는 것이 바로 妄(망)이다.


誠意章(성의장)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所謂誠其意者(소위성기의자)는 毋自欺也(무자기야)니 如惡惡臭(여오악취)하며 如好好色(여호호색)이 此之謂自謙(차지위자겸)이니 故(고)로 君子(군자)는 必愼其獨也(필신기독야)니라. 소위 그 뜻을 진실 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 것이니, 악을 싫어함이 악취를 싫어함과 같고, 선을 좋아함이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自謙(자겸)이라 이른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반드시 그 獨(독)에 신중해야 한다.


"선을 좋아함이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자겸이라 이른다" ♡



뜻을 誠(성)하게 하려면,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하늘아래 誠(성)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 격물치지에서 배운 앎이지만, 욕심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를 속여먹는 것이 自欺(자기)다. 배운 자가 不善(불선)하는 것은 그것이 不善(불선)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면, 마치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不善(불선)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처럼 善(선)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여 自謙(자겸)하게 된다. 여기서 謙(겸)을 주자는 快也(쾌야), 足也(족야)로 풀었다. 겸손하다, 삼간다의 의미 대신 기쁘다, 만족한다는 의미로 푼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아무리 좋더라도, 내려올 때가 되면 흔쾌히 내려올 수 있게 되는 것이 自謙(자겸)이다.


그러니까 誠意(성의)는 앎을 몸에 붙이는 첫걸음인 셈이다. 격물에서 배운 바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誠意(성의)의 단계다. 앎을 부단히 내면화시키지 않는다면 自謙(자겸)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내고 배 아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남이 그런 짓을 했을 때 꾸짖을 수도 있지만, 정작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때는 슬그머니 다른 마음이 일어나고 만다. 그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에게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을 정당화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愼獨(신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반드시 獨(독)에 신중해야 한다. 이때 獨(독)은 단지 홀로 있을 때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만 아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자리라고 주자는 주석한다. 다른 사람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할 수 있지만 내 욕망의 벡터가 어느 쪽으로 움직이려하는지 그 기미를 살펴서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정말 눈치를 채지 못할까? 毋自欺(무자기) 다음 구절은 마음에 진실함이 있으면 바깥으로 다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의미의 誠於中(성어중) 形於外(형어외)에 대한 구절이다. 小人(소인)이 閒居(한거)에 為不善(위불선)하되 無所不至(무소부지)하다가 見君子而后(견군자이후)에 厭然揜其不善(암연엄기불선)하고 而著其善(이저기선)하나니 人之視己(인지시기)가 如見其肺肝然(여견기폐간연)이니 則何益矣(즉하익의)리오 此謂誠於中(차위성어중)이면 形於外(형어외)니 故(고)로 君子(군자)는 必愼其獨也(필신기독야)니라. 이는 소인배가 홀로 있을 때 못하는 짓이 없다가 군자의 모습을 본 후에 기가 죽어 황급히 선을 가장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마치 폐와 간을 꿰뚫어보듯 훤하게 보이니, 그렇게 가장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는 마음에 진실함이 있으면 밖으로 드러나니,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아는 바에 삼가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거짓된 속셈이 훤히 드러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다면 참으로 딱한 노릇일 것이다. 그러니까 愼獨(신독)의 獨(독)의 의미는 혼자서만 모르는 자리일 수도 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법이 없으니 獨(독)을 잘 단속하지 않으면 꼴사나운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는 경고다.


그러니까, 이런 풍경 말이다..



외부는 나를 성인의 삶으로도 이끌기도 하고, 소인배의 삶으로 이끌기도 한다. 격물치지로부터 明德(명덕)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그것이 저절로 내 몸에 붙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 의해 내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치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이끌리면서도 짐짓 그걸 감추려 온갖 핑계를 대게 된다. 나의 경우는 언제나 예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뜻을 진실 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毋自欺(무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야 한다.
 

글_최유미
 

☆ 오늘의 『대학 』 ☆

所謂誠其意者(소위성기의자) 毋自欺也(무자기야)
如惡惡臭
(여오악취)하며 如好好色(여호호색) 此之謂自謙(차지위자겸)이니
(고) 君子(군자) 必愼其獨也(필신기독야)니라.


소위 그 뜻을 진실 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 것이니,
악을 싫어함이 악취를 싫어함과 같고, 선을 좋아함이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자겸이라 이른다.
이러한 까닭에 군자는 반드시 그 독에 신중해야 한다.



小人(소인) 閒居(한거) 為不善(위불선)하되 無所不至(무소부지)하다가
見君子而后
(견군자이후) 厭然揜其不善(암연엄기불선)하고 而著其善(이저기선)하나니
人之視己
(인지시기) 如見其肺肝然(여견기폐간연)이니 則何益矣(즉하익의)리오
此謂誠於中
(차위성어중)이면 形於外(형어외)

(고) 君子(군자) 必愼其獨也(필신기독야)니라.


소인배가 홀로 있을 때 못하는 짓이 없다가

군자의 모습을 본 후에 기가 죽어 황급히 선을 가장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마치 폐와 간을 꿰뚫어보듯 훤하게 보이니, 그렇게 가장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는 마음에 진실함이 있으면 밖으로 드러나니,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아는 바에 삼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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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애독자 2016.01.06 13:38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愼獨(신독)의 獨(독)이-'혼자'라는 게 <아무도 모르는 곳>이 아니라 <자기만 모르는 곳>이라니 어 이거 클났네... 관계를 떠나 오롯이 따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마음을 다한다는 것. 이게 왜 힘든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 끊임없이 외물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외물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毋自欺(무자기).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내고 배 아파하지 않는 것. 내가 원하는 건 땅이 아니다. 그런데 왜 남이 땅 사는 것 보고 배 아파 하는가. 그러면서 배 안 아픈 척하는 것. 이것이 자기를 속이는 일이다. 이 거짓을 철저하게 꿰뚫어보고 스스로 마음에 진실해지는 것. 이것이 신독이다... 대학 장구에서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관계의 윤리를 배웁니다!

    • 북드라망 2016.01.06 14:32 신고 수정/삭제

      네, 내가 원하는 것은 땅이 아닙니다.
      읽는 과정까지 이렇게 쭉 써주시니 새롭네요. 고맙습니다.

  • 명자바라기 2016.01.10 10:52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내가 능동적인 주체이며 동시에 천지만물에 영향을 받는 수동적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우리사회에 만연한 갑질들은 좀 줄어들겠지요...

  • HFOC 2016.04.10 19:20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앎과 삶이 일치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남들에게는 바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 상황에 처한다면 과연 정직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항상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네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이 수동적인 존재란 사실을 긍정하는 것, 즉 외부성의 사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공감하면서도 능동에는 항상 수동적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이 완벽히 와닿지가 않네요. (말 뜻 그대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건 분명히 아닐 텐데, 그 미묘한 차이를 알 듯 모르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북드라망 2016.04.12 16:48 신고 수정/삭제

      네. 조금 더 생각해보시고, 답에 가까워지신 것 같으면 또 댓글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