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소설, 첫눈에 반(反)해 보라!

소설(小雪), ‘All in 음(陰)’의 시절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첫눈, 알 수 없는 설렘


사람마다 첫눈에 대한 느낌은 조금씩 다르나 ‘설렘’에 있어선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첫눈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촉발한다. 도대체 눈이 뭐길래? 눈을 맞으며 그저 황홀해하기만 했을 뿐, 왜 눈에 마음을 빼앗기는지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보통 첫눈이라 하면 연인과의 만남이나 어떤 소원 혹은 기적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첫눈 오는 날 우리 만나자”라는 멘트를 서슴없이 날린다. 이런 행태가 유치해 보일지 몰라도, 나름 의미가 있다. “올해 첫눈은 반드시 애인과 함께 할 거야! (불끈)”와 같이 첫눈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맞이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맞이하려는 대상이 오직 ‘연인’만이 전부일까? 그 이야기를 할 시기가 왔다. 소설(小雪)이다.


맞다. 왜 연인들은 첫눈이 오는 날에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일까. 짬뽕이나 찐한 소주 한잔이 먼저 떠오르는 나로써는 도통 알 수 없다. 초짜이거나 아니면 아줌마 감성이나 둘 중 하나라는 것만을 명확히 알 뿐! 근데 왜케 씁쓸하냐....


소설은 글자 그대로, 첫눈이 내리고 얼음이 살포시 얼어붙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날씨가 팍팍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분다. 손돌(孫乭)바람으로 일컬어지는데, 사연이 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 간 왕을 태워준 뱃사공이 바로 손돌이라는 사람이었다. 왕을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얕은 여울로 배를 몰았으나, 그것이 오해를 산다. 자신을 육지에 도로 내버리는 걸로 여긴 왕이 손돌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으니, 그 원혼이 손돌바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손돌바람이 불어 바람이 차다가도 어느 순간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니, 옛 사람들은 소설을 다른 말로 소춘(小春)이라 부르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 남산의 트랙을 산책하는데 개나리가 핀 것을 봤다. 눈을 비비고 들여다봐도 개나리임에 틀림없는 게 아닌가? 춥다가 잠깐 따뜻해지니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온 걸로 착각해서 일어난 일이리라. 손돌을 죽인 왕이나, 봄인 줄 알고 기어 나온 개나리나 모두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마치 소설에 첫눈이 내리는데, 오직 ‘연인’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소설에 내리는 첫눈은 곧 뭔가 다가옴을 알리는 징조인데, 그것은 별거 없다. 추운 겨울이 올 뿐. 그럼 왜 우리는 설레고 두근거려 하는가? 추운 겨울이 뭐 좋다고? 어려워 보이는 말을 좀 늘어놓으면, 소설에는 괘상(卦象)으로 봤을 때 순음(純陰)의 기운이 지배하고 있다. 따뜻한 양기(陽氣)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All in 음(陰)’! 음기가 극에 이르면 양기가 찾아온다. 봄이 ‘spring’이기 위해선 겨울의 꽉꽉 누르는 힘이 필요하다. 눌러 놓지 않으면 스프링처럼 튀어나올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겨울은 뭔가 바깥으로 펼치기보다, 안으로 수렴하는 기의 흐름이 우세함을 알 수 있다.


겨울에 식물은 기운을 뿌리에 집중시키고, 동물은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기운을 보존한다. 모두 기운을 한 점으로 집중시킨다. 모두 얼음이 녹고 봄바람이 불 때, 튀어나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요컨대 ‘올인음’인 소설에 겨울의 하강하는 기운, 이른바 폐장(閉藏)의 에너지를 듬뿍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첫눈을 보고 느끼는 알 수 없는 설렘은, 바로 순도 100%의 음기를 취할 수 있는 찬스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단지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말씀! 순도 100% 음기는 씨앗을 만들 수 있는 기운이다. 그래서 소설은 음력으로 해월(亥月)에 자리하고 있다. 해(亥)는 단단하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나무 목(木)변을 붙이면 핵(核)이 된다. 핵분열, 핵폭탄처럼 만물 생성의 출발은 바로 이러한 핵, 씨앗에서 비롯하게 마련이다. 그럼 인간에게 씨앗을 기른다 함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름하여 씨앗-폭탄. 자판기에 돈을 넣고 씨앗-폭탄이 나오면 이걸 흙이 있는 곳 아무대나 투척하면 된다. 생명은 폭탄처럼 터지는 것이라는 걸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 나라에도 이런 걸 만들면 좋을 거 같다. 생명을 뿌리는 놀이!!


씨앗을 기른 자 vs 씨앗을 죽인 자

문학과 신화를 살펴보면, 오행의 기운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매우 많다.『삼국지연의』의 제갈공명과『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씨앗에 대한 상반된 결과를 보여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제갈공명은 씨앗을 잘 길러 봄에 싹을 틔었고, 오르페우스는 싹을 죽여 버렸다. 먼저『삼국지연의』부터 살펴보자. 제갈공명의 별명은 와룡(臥龍) 선생이다. 혹은 복룡(伏龍)이라고도 부른다. 와룡은 누워있는 용이요, 복룡은 엎드려 있는 용이다. 별명은 그 사람의 성향을 암시하고 있다. 용은 바다에 살기에 수(水) 기운을 띠고 있다. 그런데 그저 물밑에만 잠들어 있는 용은 용이기 보다 이무기에 가깝다. 용은 용이 되려면, 언젠가 하늘로 승천해야 한다. 바다에서 용오름이 솟구치는 형상은 봄의 ‘spring’ 즉 목기(木氣)를 상징한다. 제갈공명은 훗날 유비를 만나 천하에 뜻을 펼치게 되는데, 그가 초막에서 농사를 지으며 차분히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인 에우뤼디케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향한다. 온갖 고초를 겪고 아내를 만나,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저승의 주인인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지상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고. 오르페우스는 거의 다 올라와서야 기어코 참지 못하고 돌아보고 만다. 그 순간 아내는 다시 저승으로 리턴! 음양으로 보면 저승은 음에 속하고, 지상은 양에 속한다. 저승은 그 음기가 아마도 순도 100% 순음(純陰)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저승에서는 음의 기운이 지배하는데, 그것이 바로 폐장(閉藏)의 기운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순음(純陰)의 시기에는 무슨 일을 하든 ‘기다리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이 곧 ‘씨앗’을 기르는 마음임은 물론이다. 아무렴, 씨앗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겠는가? 오르페우스는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했다가, 아내도 잃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반면, 제갈공명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실력을 닦았다. 삼고초려는 그가 얼마나 기운을 응축하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세 번 거절한 후 마침내 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쑥쑥 뻗어나가는 목기(木氣)로 신출귀몰 활약하는 이야기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갈공명과 오르페우스는 씨앗을 기르는 인내심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은 단순히 오래 참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제갈공명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자신의 ‘때’가 올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아내인 에우뤼디케가 뒤에서 잘 따라 오고 있는지 불안함을 견딜 수 없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저승에서 탈출할 수 있건만, 이 무지함이여! 참고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은 힘들고 지루한 시절도 곧 지나감을 아는 지혜로움에서 비롯한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씨앗이 언젠가 싹을 틔울 것임을 아는 지혜! 그래서 겨울은 오행상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귀를 잘 기울여보자. 세 번 이상 불렀을지도 모른다. ㅡ,.ㅡ


귀를 기울이며

겨울이 지혜를 상징함은 근거가 있다. 대략 봐도 겨울에 지혜롭지 못하면 곧바로 얼어 죽기 쉽다. 어느 계절보다 지혜가 요구되며, 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또한 이때는 기가 내부로 응축되는 시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식물 뿌리에 기운의 엑기스가 모이듯, 인간 역시 내부로 기운이 집중된다. 인간의 내면이라 함은 뱃속이 아니라, 정신세계 즉 사유체계를 가리킨다. 날씨가 추워 육체의 활동력은 저하되는 반면, 그만큼 정신을 확장할 수 있는 때이다. 더구나 소설은 ‘올인음’이기에 넓힐 수 있는 범위는 최고치에 달한다. 그러니 순음의 시절인 소설에 지혜를 벼리지 않고 언제 하겠는가? 그럼 지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키우는 것일까?


오행 분류표를 한번 살펴보자. 오행에서 수(水)는 계절로는 겨울, 기운으로는 폐장(閉藏), 덕목으로는 지혜에 해당한다. 여기에 하나 더. 신체 오관으로는 귀(耳)를 상징한다. 언뜻 보기에 무질서해 보이는 이 조합에는 미묘한 연관성이 있다. 그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마치 암호 해독을 하는 일과 비슷하다. 지혜와 인체 부위 중 귀가 나란히 놓여 있음은 무척 시사적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진실로 여기지만,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혜는 귀로 잘 듣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요컨대 남의 말을 ‘경청’해야 지혜가 샘솟을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단지 다른 이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포함한다. 첫눈을 바라보며, 외부로 쏠렸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보면 어떨까? 그 어떤 경험보다 가슴이 설레고 두근두근해질 수 있으리라.


한문에서 들을 문(聞)은 흔히 안다, 배웠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듣는 것이 곧 앎의 시작이자 원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들으려는 그 태도야말로 앎의 원초적인 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지.


소설에는 손돌바람이 불어 쌀쌀한데다, 솔로들은 첫눈 때문에 괜스레 마음만 싱숭생숭하기 쉽다. 그래서 바깥에 나가기도 애매한데 공연히 몸은 달뜬다. 여름에는 너무 더운 나머지 하릴없이 쓰러져 있었지만, 따뜻한 방안에 있으면 심심하기 짝이 없다. 이때 이런저런 ‘킬링타임’에 빠지기 쉽다. 사실 자극적인 요소가 주변에 널려 있어 심심할 틈도 없다. 이럴 때 정신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산만해진다. 지혜는커녕 무지해지고 게을러지기 쉬운 때가 또 소설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앞서 말한 대로 소설은 내면에 기운의 엑기스가 몰리는 시기이다. 그것은 곧 사고의 폭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각종 전자 휴대용 기기들을 한편으로 몰아두고, 오로지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그 방법은 연필과 노트만 놓고 일기를 쓰는 일이다. 제갈공명이 융중의 초막에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구상한 것처럼, 연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내년에 움틀 씨앗을 길러보도록 하자.


※ 임진년 소설의 절입시각은 11월 22일 오전 6시 49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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