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처서, 모기의 입은 쉽게 삐뚤어지지 않는다

처서, 온 누리에 숙살(肅殺)이!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처서, 매가 되는 시간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은 요즈음엔 딱히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처서가 왔음에도 도심 속 모기는 여전히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만큼 더위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렷다. 남은 더위, 즉 잔서(殘暑)의 흔적은 단지 모기뿐만이 아니다. 아직도 여름인양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열기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 열기는 다름 아닌 산만함이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는 덥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었으나 이제는 다르다. 봄과 여름의 발산하는 기운에서 토(土)의 교량을 건너 가을과 겨울의 수렴하는 기운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시공간의 장으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여름의 습관대로 살고 있다면 곤란하다. 혹시 휴가 후유증을 앓고 있지는 않은지? 입추 다음에 처서를 배치한 것은 그래서 절묘하다. 가을의 초입에서 여전히 길을 잃고 여름처럼 살고 있다면, 모름지기 처서(處暑)에 처서(處暑)를 해야 한다. 이건 결코 말장난이 아니다. 처서는 그 낱말 자체가 실천윤리를 담고 있다. 여기서 처(處)는 머무르다, 돌아가다, 처리하다 등으로 풀이된다.『설문해자』에선 “處, 之也(처는 ‘그치다’이다)” 라고 되어 있다. 즉 처서 즈음은 더위가 그치는 시기이다. 그러나 그친다는 것은 저절로 됨을 뜻하지 않는다. 처서를 맞이하는 자, 스스로 더위를 그치게끔 해야 한다. 어떻게 그칠 것인가? 그 힌트를 예기·월령(禮記·月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월령에선 처서의 첫 5일간을 응내제조(鷹乃祭鳥)라 하여, 매가 새를 잡아들여 가을 제사를 지내는 때라고 하였다. 뭔가 봄의 의례와는 색깔이 사뭇 다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입춘 때는 입춘첩이다 해서 덕담을 대문에 붙여놓고 복을 빌었다. 그에 비하면 가을 제사는 좀 무섭다. 매를 풀어 새를 사냥해 제사를 지낸다? 매를 사진 혹은 TV화면으로 보면, 그 기세에 그만 압도되어 버린다. 육중한 발톱으로 먹이를 옴짝달싹 못하게 움켜쥐고, 날카로운 부리로 먹이를 찢는다. 헉! 봄의 훈훈함과 대조되는 찬바람 씽씽 부는 가을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이는 처서의 처(處)와도 연관된다. 처는 주로 처형(處刑), 처단(處斷), 즉결처분(卽決處分)등 살벌한 말과 함께 쓰인다. 요컨대 처서의 처(處)는 매의 매서운 기세로 더위가 일으키는 산만함을 처단, 즉 끊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매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매의 눈’이 뭔가? 흐리멍덩함과는 거리가 먼 형형히 살아있는 눈빛이며, 하나의 먹이만을 노리는 태도이다. 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지 않는다. 여름 동안 벌여놓은 일을 한 번에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마음 또한 탐욕이다. 한 번에 하나씩, 즉 One Shot, One Kill의 본능이 요청된다. 이것은 단순히 매를 흉내 내는 것에서 출발해 ‘매 되기’로 이어진다. 매의 눈으로 자신이 지금 이 순간 행하고 있는 산만함을 포착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것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결단!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매’라 할 수 있으리라. 정말 끊기 어려운 습관을 처서 절기 때 만큼은 끊어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천지는 가을의 문턱을 열어준다.

숙살지기가 왔다!


옛 사람들 또한 가을에 서린 매의 정신을 알았는지, 처서에 돌입해 지난 여름 농번기 동안 미루어둔 형벌을 집행하곤 했다. 이제 더 이상 봐주고 그런 거 없는 거다. ^^ 그래서 가을은 풍요로움과 혹독함의 두 얼굴을 지녔다. 한편에선 칠석(七夕), 백중(百中), 추석(秋夕)으로 이어지는 명절의 연속인가 하면, 다른 편에선 가차 없이 범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치러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을이 되면 지난 봄, 여름 동안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대체로 판가름 난다. 그래서 눈물 난다. 다만 그 눈물의 질이 무척 다르다. 한쪽에선 수확의 눈물이지만 다른 쪽에선 후회의 눈물일 뿐이다. 자연의 흐름은 이처럼 가차 없고 또한 지극히 공정하다. 아무리 봄여름 동안 꼼수를 부려도 피해갈 수 없다.


‘게으른 놈 (음력)7월에 후회한다’라는 속담이 말해주듯, 더욱 무서운 점은 이것이 초치기로 해결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루고 미뤄도 언젠간 심판(?)의 시기가 도래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신을 마주할 때 ‘아차’ 싶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숙살지기(肅殺之氣)는 가을의 쌀쌀하고 매서운 기운을 말한다. 즉 만물을 수렴하고 여물게 하는 힘이다. 간단히 말해 나무는 가을 즈음에 성장을 멈추고, 열매로 결실을 맺어 잎을 떨어뜨린 후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사람 또한 아침에 일어나 해 떨어지기까지 활동하다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것과 같다. 그래야 계속 순환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매 되기’와 형벌 집행 등은 굳이 구분하자면 숙살(肅殺)의 살(殺)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숙(肅)은 무엇인가?


이건 뭔가요~~^^. 요새 동물들은 아주 배째라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그렇게 여름을 지내고 가을을 보냈다가는 설사를 주룩주룩 하는 병에 걸리기 십상이다. 성숙에 앞서 육즙을 흘려야 몸도 마음도 단단해지는 법! 지금부터라도 고고씽~~

심판의 순간에 어떤 이들은 아예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냥 배 째라! 하는 게다. 그런 자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 죽는 건 그저 회피하는 일이다. 후회가 막심해도 그것을 다 떠안고 가는 것,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감당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숙살(肅殺)의 숙(肅)이다. 그런 태도야말로 엄숙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세상은 단 한 번의 사이클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가을의 숙살지기를 온몸으로 견뎠을 때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그 힘으로 겨울을 살고 봄을 열 수 있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가 말랑말랑하다면 땅에 떨어질 때 박살이 날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 수확할 때 열매의 껍질은 단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성숙의 숙(熟)과 엄숙함의 숙(肅)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가을의 성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태도가 엄숙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엄숙한 태도는 살(殺), 자신을 가차 없이 심판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그때 처서의 두 번째 절후(節候)인 천지시숙(天地始肅)이 열린다. 천지에 숙살지기가 그득한 시기이다. 숙살지기로 주변 일상을 꽉꽉 채우기 좋은 때에 돌입했다.

낭만에 대하여


찰리 채플린은 ‘인간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을 남겼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누구의 삶이나 행복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삶의 현장으로 침투해서 몸으로 부딪히면 팍팍하다는 말이리라. 여느 계절이 다 그렇지만, 가을만큼 이 말에 잘 어울리는 시절도 없다. 우리들은 가을에 단풍놀이다 뭐다 하며 즐기나, 사실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나무가 자신의 생살을 잘라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선, 쓸데없는 이파리들은 다 버리고 뿌리에 양분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풍놀이도 좋고, 가을의 낭만도 다 좋다. 하지만 우리가 절기를 배우고 그 리듬을 탄다는 것은, 내 주변의 천지만물을 밀접하게 들여다본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자신의 기대와 욕망 따위를 내려놓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가까이서 본 현실은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비극이다. 멀리서 보면 단풍은 그저 아름답다. 애초부터 아름다움을 보려고 하니, 우리 눈에는 그것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무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이는 낭만 따위와는 거리가 먼 눈앞에 닥친 현실일 뿐이다.


여기서 나무의 시선으로 본다는 게 무슨 자연보호 따위의 의미는 아니다. 나무가 가을에 낙엽을 떨어뜨리는 일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처지는 본질적으로 같다. 나무와 나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 나무에게 닥친 현실은 곧 내가 치러야 할 심판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인은 이미 절기의 리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그 변화 추이를 잘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무를 비롯한 천지자연은 인간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있는 그대로를 보기가 어디 쉬운가? 하지만 그것 없이는 단단한 땅조차 밟지 못한다는 것, 우리는 절기로부터 배운다.


현실이 비극이라 해서, 슬퍼하거나 허무감에 빠질 필요는 전혀 없다. 운명 혹은 인생무상처럼 비극 또한 ‘오염’된 낱말이 된지 오래다.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덮어놓고 비감해지기 쉽다. 가을하면 대개 쓸쓸함을 연상하게 마련인데, 왜 수확할 것은 생각지 못하는가? 아마도 이 계절이 그토록 쓸쓸한 까닭은 거둘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책임을 애꿎은 가을 탓하는 것일지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비극은 슬픔으로 덧씌워지지 않고 온전한 현실이 된다. 슬픔과 각종 낭만으로 치장된 감성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단단하게 영근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때 처서의 마지막 닷새인, 오곡이 솟아나는 농내등곡(農乃登穀)을 맞이할 수 있다. 숙살지기를 듬뿍 맞이한 당신에게 주는 처서의 선물이다.


※ 임진년 입추의 절입시각은 8월 23일 오전 2시 6분입니다.

신고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