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대서, 습기와 더위로 사는 법

대서, 더위의 중심에서 서늘함을 외치다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무더위, 습(濕)의 계절


불볕더위의 준말인 불더위에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 따갑게 느껴진다. 불더위에 상대되는 물더위도 있다. 본래 무더위는 물(水) + 더위의 합성어이다. 무더위에는 물기가 배어 훈증된 열기로 끈적끈적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샤워를 해도 그때뿐이고 도무지 쾌적하지 않다. 큰 더위인 대서는 무더위의 시절이다. 이맘때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불쾌해진다. 불쾌지수가 오르는 데는 습기가 한 몫 한다. 뜨거운 열기는 어떻게도 참을 수 있지만, 끈끈하고 꿉꿉한 느낌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대서는 여름철임에도 불구하고 여름의 화(火) 기운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이때를 지배하는 기운은 습(濕)이며, 여름 하(夏)와 구별해 장하(長夏)라고 부른다.


장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불같은 여름이 아니다. 뜨거운 여름도 아니요 그렇다고 서늘한 가을도 아닌, 눅눅한 습기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애매한 계절이다. 습기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성이 있다. 반(半)은 열기를, 나머지 절반은 한기를 띤다. 두 기운이 서로 어우러져야 비로소 습기가 생긴다. 열기만 있으면 말라붙고, 한기만 있으면 얼어붙는다. 이처럼 상반된 기운을 포용하고 조화하는 기운은, 오행으로 보면 토(土)에 해당한다. 토에 속하는 장하의 계절은, 봄여름과 가을겨울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라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생겨나는 것이 바로 습이다. 습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불더위 때인 하지 즈음만 해도 한낮에는 뜨거운 햇빛으로 힘들지만, 해 떨어지면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그러나 무더위인 대서에는 습기가 야간에도 대놓고 침투해 열대야를 일으킨다. 보송보송한 잠자리는 이래저래 기대하기 힘들다.


한의학에서는 습의 특성을 중탁(重濁)하다고 말한다. 습에 상하면 몸이 무겁고 피곤해서 축 처진다. 끈적끈적한 습기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사지가 나른하고 머리는 싸맨 듯하며, 한밤중에도 일어났다 잠들기를 반복한다. 또한 습은 점체(粘滯)의 성질이 있다. 점(粘)은 끈끈하고 미끄러우며, 체(滯)는 달라붙어 정체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샤워를 해도 고작 몇 분 못 가 금세 끈적이는 것은, 습이 지닌 한번 들러붙으면 잘 떼어지지 않는 특성 때문이다. 이렇게 습이 잘 순환하지 못하고 고착되면 습사(濕邪)가 되어 질병을 일으킨다. 그럼 습은 해로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습은 만물을 화(化)하는 힘이 있다. 생명체는 생장화수장(生長化收藏), 즉 태어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거두고 죽는다. 이는 오행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와 각각 짝을 이룬다.


생장(生長)은 자라는 국면을, 수장(收藏)은 줄어드는 양상을 띤다. 가운데 자리한 화(化)는 상반된 두 양상을 결합하는 고리로 작동한다. 만일 화(化)가 없다면 어떨까? 생장하기만 하는 것은 암(癌) 덩어리의 무한 증식과도 같다. 그것조차 결국 숙주를 파괴함으로써 언젠가는 소멸한다. 화(化)는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순환의 주기를 형성한다. 그 순환은 지속적이다. 화(化)가 이뤄지는 대표적인 장소는 습지이다. 흔히 늪과 같은 습지를 생태계의 보고라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선 끊임없이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활발히 지속되어, 기름진 토양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습을 단순히 끈적거린다고 내쳐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내 몸이 끈끈한 것은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화(化)가 이뤄진다는 신호가 아닐까? 즉, 어떤 배치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습은 습사가 될 수도 있고, 생명을 순환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자나!^^ 습(濕)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건 인정해도... 습기는 너무해~~^^


버리고 떠나보내라!


봄은 한 해의 골격을 세우고, 여름은 뼈대에 살을 바르는 시기이다. 봄에 기본기를 닦으면 여름에는 충실한 기본기를 조합해 화려한 기술을 선보인다. 만화『슬램덩크』에서 주인공 강백호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서태웅은 초고교급 농구선수이다. 그는 이미 완성된 플레이어이다. 패스, 드리블 같은 기본기와 그에 따른 3점 슛, 폭발적인 돌파 등 화려한 기술을 마스터했다. 요컨대 그는 봄의 기본기와 여름의 화려한 기술의 스텝을 충실히 밟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기적인 플레이로 한계에 다다른다. 지금까지는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팀을 유린할 수 있었다. 오직 여름의 생장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막다른 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을로 넘어가지 않는 여름은 그저 무한 증식만을 고집하는 암 세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결국 파멸만을 초래한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1:1 대결만 고집하다 무참히 당한 서태웅의 플레이와 닮았다.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앞두고 지금껏 벌여놓은 일들을 서서히 점검하고 응집할 시기가 왔다.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챙기려고 하면 무엇도 얻을 수 없다. 자신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가을은 결실을 허락한다. 여름의 지난 다섯 절기에서 우리는 역동적으로 일상의 윤리를 실천했다. 입하에 솎아내고, 소만에 욕 처먹고, 망종에 정점 찍고, 하지에 갱신하고, 소서에 음의 벡터를 따랐다면, 대서에는 그 모든 것을 결실을 위한 한 점에 모으자. 바로 집착을 버리는 일에.


『슬램덩크』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서태웅은 산왕공고의 에이스와 맞닥뜨려 1:1 대결을 펼치나 처참하게 당하고 만다. 농구실력으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으나, 그런 자신을 뛰어넘는 상대와 만나 고전하며 서태웅은 마침내 깨닫는다. 팀플레이! 동료에게 ‘패스’하기로 마음을 고쳐먹게 됨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바스켓볼 플레이어’로 거듭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는 엄청난 변화이다. 상대팀은 서태웅이 이기적인 플레이를 하는 것을 알기에, 그가 패스할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직 서태웅 하나만 신경 써서 수비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패스를 하게 됨으로써, 옵션이 하나 더 생긴다. 수비수는 서태웅의 공격과 패스,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때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득점을 성공시킨다. 팀플레이를 자각함으로써 그는 더욱 위력적인 플레이어가 된다. 이는 여름의 화려한 1:1 개인기만 뽐내던 것에서, 가을의 팀플레이로 결실(득점)을 얻고 수확(승리)을 거두는 일이다. 서태웅의 패스는 스스로를 여름에서 가을로 화(化)하는 문턱이었다. 이제 그에겐 화려함을 선보이겠다는 고집 대신, 온전한 결실을 보겠다는 한 가지 마음만 있을 뿐이다. 서태웅에게 집착을 버리는 일은 바로 패스였다.


패스. 농구 초짜들은 기본기를 익히고 나면 곧 패스 연습에 돌입한다. 어느 운동이나 그렇듯 농구도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편에게 안전하게 공을 전달하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 이 패스의 아름다움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집착은 곧 습사(濕邪)다


나는 어떤 것에 매달려 있는가? 하나에 매달려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그것은 집착이지 집중이 아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습사(濕邪)다. 머리가 무겁고 온통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며,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끈적끈적 산뜻할 수 없다. 그렇게 관계하면 서로를 망친다. 반면 떠나보내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생명의 원동력으로 작동한다. 그때 관계 역시, 습지에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처럼 풍부해진다. 내가 어디에 서있고, 어디로 가는지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집중할 수 있다.


서태웅은 1:1 대결에 매달릴 때 게임에 몰두하기보다, 상대방 에이스와의 승부에만 집착했다. 그래서 시야가 좁아졌다. 거기에서 빠져 나왔을 때, 비로소 그는 게임을 ‘지배’했다. 강백호의 마지막 ‘왼손은 거들 뿐’ 결승골도 엄밀히 보면, 서태웅의 어시스트 패스에서 비롯한 것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는 까닭은 스스로의 삶의 현장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꾸 집착하는 대상에 매달려, 거기에서 위안을 구한다. 결코 얻을 수 없는 위안! 피를 피로 씻는 것처럼, 습사를 습사로 덕지덕지 메울 뿐이다. 그 끝은 끈적거리고 질척이는 파멸이다. 자신의 삶의 현장을 외면하고 피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끈적이고 질척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직접 떠나보내야 가을로 향할 수 있다.


설마 내 몸도 이렇게~~!! 습기, 너 대체 뭐니! 나보고 어쩌라고~~!!




사람들은 보통 눅눅함을 질색한다. 그것을 피하고자 생겨난 말이 바로 피서(避暑)다. 여름휴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도 대서 즈음이다. 요즘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빵빵 터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으로 피서를 할 수 있다. 덕분에 몸에 들러붙어있던 습기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화(化)가 사라진 신체! 그럼으로써 얻는 대가는 자명하다. 한여름에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는 냉방병에 걸리기 쉽다. 겉으로 보기엔 번들번들 거리고 끈적이지 않고 멀끔하지만, 속으로는 뒤틀린 꼴이다. 생명의 순환이 파괴된 것이다. 몸에 붙은 습기를 말살하는 일은, 습지를 들어내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붓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자연파괴라고 여기지만, 정작 자기 몸에 자행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작정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위에 대처하는 전략의 수정이 요청된다.

더위, 내 맘속에 있소이다


옛 선인들에게 피서라는 개념은 다소 생소했나 보다. 물론 그 당시에도 피서라는 말을 쓰기는 했으나, 지금처럼 먼 곳으로 휴양을 떠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서 대신 그들은 망서(妄暑) 즉, 더위를 잊는 방법을 택했다. 어디를 가도 눅눅함과 끈끈함은 있게 마련이다. 피한다고 피할 수 없다. 잊는다고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잊는다는 것은 실제로 몸을 움직여 피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그렇게 고쳐먹는다는 뜻이다. 마치 더위를 못 느끼는 양, 마음을 다스리는 게다. 그저 ‘덥다 덥다!’하고 더위 그 자체에 집착하기보다, 더위를 잊고자 삶의 현장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덥다고 여기면 더욱 덥고, 그것은 습사(濕邪)처럼 들러붙어 일상을 잠식한다. 누가 그랬는가? 바로 내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여름날이면 모든 사람들이 피서를 떠난다지만, 이 산천 어디에 간들 더위가 없을 것인가? 다만 산과 바다가 더위를 식혀줄 뿐이다.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폭염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더위는 피해 다닌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피서(避暑)보다는 망서(妄暑)가 훨씬 수행자적인 자세가 아닐까. 그래서 올 여름은 수행의 현장에서 땀 흘리며 더위를 잊고 지낸다.

-현진,『오늘이 전부다』, 클리어마인드


초원의 동물은 더위를 피해 물을 찾아 대이동을 한다. 물을 구하는 그들의 여정은 거룩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더위가 찾아와도, 내가 있는 자리를 섣불리 떠나지 않고 마음가짐을 되새긴다는 데 있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더위를 다루는 힘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점이리라.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정신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대서에 할 수 있는 윤리이다.


혹시 이런 거?^^ 아니다 아니야!!^^ 이 더위와 습기 또한 지나가리라~~~ 오늘로부터 15일이 지나면!! 기다리면 된다~~


※ 임진년 대서의 절입시각은 7월 22일 오후 6시 30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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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고차리 2012.07.24 17:46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이 끈적끈적한 불쾌에는 이유가 있었군요~ 그럼에도 위로가 되네요. 15일만 견디면 되는 거니까요. ㅋ

    서태웅의 일대일 옹고집에서 오행의 원리가 접목되는 부분에서는 희열이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어쨌든, 내 안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특히나 토기운이 없는 저는 더더욱 그렇네요~

    눈에 쏙쏙 꽂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

    • 동철군 2012.07.24 18:20 신고 수정/삭제

      지금도 땀을 줄줄 흘리며 괴로우나, 이 습덩어리들을 다 생명이 화(化)하는 걸로 여기니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 ^^ 고차리님의 댓글로 저 역시 희열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