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달, 공부할 거리가 무궁무진한 <동의보감>이라는 광산에 먼저 <이야기 동의보감>으로 접속해 주신 박정복 선생님에 이어, 11월부터 매달 둘째 목요일에는 정은희 선생님께서 '요가'로 <동의보감>과 접속해 주십니다! 요가와 동의보감의 만남, 기대해 주세요!
연재를 시작하며……
2017년, 3천여쪽에 달하는 『동의보감』을 읽는 세미나가 시작됐다. 감이당에서 장기강좌를 수강하면서 매 시간마다 듣고, 공부하고, 시험 봤지만, 가까이 하기엔 정말 먼 바로 그 책을 3년에 걸쳐서 다 읽어보는 원대한 세미나였다. 서당개도 풍월을 읊는다는 3년이 지나고 또 몇 년이 흘러서였을까? 신기하게 『동의보감』이 읽어졌다. 그 소리가 가진 의미와 뜻을 떠듬떠듬 짐작도 해보게 되었다. 하~~시간의 힘이, 졸면서 보낸 그 시간이, 외계어를 듣는 듯이 들었던 시간이, 그 시간들이 『동의보감』의 세계로 좀 더 쉽게 들어가게 해주었다. 마치 서당 앞에서 계속 한자 낭송하는 소리를 듣고 들은 바로 그 ‘서당개’가 풍월을 따라하듯이, 나도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들리기 시작하니, 그 다음에는 『동의보감』 첫 편인 「신형편」에서부터 말하고 또 말하던 바로 “양생(養生)”이 머리에 남았다. ‘양생은 생(生)을 잘 보살피고 기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어떻게 생을 기르며 살 것인가’를 계속 묻고 있었는데, 못 알아들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생을 길러서 바로 천지자연인 너 자신을 살게 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었다. 이제 그 답을 찬찬히 찾아가 보려 한다.
다행히 내게는 오래전에 만난 ‘요가’가 있었다. 나는 요가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답답했다. 요가를 배울 때, 정신과 마음에 관한 그리고 몸에 관한 좋고 새기고 싶은 말과 지식들을 배웠지만 내 일상에서 실천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내 일상과 내가 가르치는 요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동의보감』에서 생(生)을 기르는 여러 가지 원리들과 방법들을 읽어가다 보니, 내게는 바로 요가가 양생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하여 찬찬히 ‘요가와 양생’, 그리고 ‘동의보감과의 만남의 길’을 알아가려 한다. 이제 길을 나선다.
‘요가Yoga’, 내 안의 유동하는 에너지와 만나는 것 (1)
요가와의 만남
나는 요가 강사이다. 강사 생활을 한 지는 벌써 15년 정도 되었다. 아이를 임신하면서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후 꾸준히 요가센터에 나가게 되니, 지도자과정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다. 생각보다 지도자과정을 어렵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의 이론 수업을 들었고, 동작은 평소에 하던 대로 센터에 나가서 수련하면 됐다. 그렇게 1년의 과정이 끝나고 나니 요가 강사 자격증을 주었다. 자격증이 생기니 곧 수업이 생겼다. 마침 그때가 우리나라에 요가 붐이 불기 시작한 때라, 여기저기서 요가 수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문화센터에 기체조나 단학 수업은 다 요가 수업으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요가를 가르치러 나가게 되었지만, 배운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요가 철학이라고 배웠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인도 철학사와 함께 공부를 했다는 정도의 생각만 남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같이 수료를 한 동기들이 어딘가 딴 센터로 또 요가를 배우러 가고, 자격증을 딴다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나와 같이 이 정도의 공부로 요가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서 부담이 있었던가 보다. 그렇게 다른 센터의 요가 과정을 배우고, 또 배우는 몇 년의 시간을 보냈다. 이론과 동작을 보다 세밀하게 배운다면 요가 강사로 사람들을 만날 때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요즘 요가 강사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업계 정보를 들을 기회였다. 몇 년전부터 핫요가나 플라잉요가, 도구를 이용한 요가 등이 유행을 하는 것은 tv등의 매체를 통해서 알고는 있었다. 요즘 요가 강사를 하는 사람들은 먼저 기본이 되는 강사증을 따고 나서는, 다시 핫요가 자격증, 실버요가 자격증, 도구를 이용하는 요가 자격증 등등 이전보다 더 많은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이 많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강사 생활 해서 번 돈을 다시 다른 요가 센터에 갖다 주느라고 남는 돈이 없다고 말을 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구나 싶었다.
이런 이야기들과 나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왜 그렇게 이름이 다른 여러 종류의 요가 자격증이 필요해졌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요가 강사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더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자격증 따고, 요가 수업의 수강생들은 여러 운동들 중에서 상품을 선택하듯이 요가를 고르고 있기 때문이다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요가를 수련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어색해졌다. 수련이라는 것은 인격, 기술, 학문 따위를 닦아서 단련하는 것을 뜻하는데, 요즘의 요가는 인격이나 요가 철학이나 요가 동작을 닦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마치 헬스클럽을 다니듯이 몸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포털사이트에 넘쳐나는 연예인들의 요가로 만든 늘씬하고 탄력있는 몸은 요가를 해서 살을 빼고, 몸매를 멋지게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나는 요가가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왔던 원래적인 의미를 한번 짚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간 요가를 가르치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인데, 요가의 원래적인 의미도 모르고 그냥 사람들과 요가를 나누고 있기에는 항상 답답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워서 멀리 치워버렸던 그 요가 철학부터 다시 한번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상키야 철학 위의 요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요가의 경전 『요가수트라』는 AD400∼450년 사이에 편찬되었다. 이것은 재편찬이기도 하다. 기원전 2세기에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파탄잘리가 최초의 편찬자로 알려져 있다. 보통은 이 『요가수트라』로부터 인도의 요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인도에서 요가는 인더스 문명(기원전 약 3300~1700년)부터 함께했던 오랜 전통이다.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에서 요가나 명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석상들을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요가가 정리되고 자료가 남기 시작한 것은 굽타 왕조 시대(320-550)에 힌두교를 6가지 철학의 종류로 정리하면서부터이다. 힌두교의 철학으로 포괄돼 있던 상키아 철학과 요가 철학은 그 이론 체계가 같다. 상키아 철학은 이론 체계를 보다 중시하고 요가 철학은 실천적 경험을 좀 더 중시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상키아 철학은 육파철학으로 명확하게 그 체계가 정리되기 전부터,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첫 시작은 기원전 600년~530년경부터 인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도 전체의 철학 체계에서 상키아 철학이 나타나기 이전, 인도에서는 『베다경전』에 근거했었다. 베다는 성스러운 찬가 또는 시로 사제들이 부르는 신들에 대한 노래들이다. 베다는 힌두교의 주요 경전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인도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신들에게 감사와 축원을 드리는 제의에 대한 절차와 방식들에 대해서 세세하게 정리되어 있는 경전이다. 제의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의식이다. 모든 정성과 물질적인 부를 바침으로써 인도인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생의 고난을 끊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1
상키아 철학은 이러한 인도인의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는 새로운 철학으로 등장한다. 상키아 철학에는 ‘신’이라는 개념이 없다. 상키아 철학은 “우주를 낱낱의 구성요소로 분석해 들어가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을 묘사” (카렌 암스트롱 지음, 『축의 시대』, 교양인 출판사, 325쪽)한다.
상키아 철학은 이 세계가 순수의식이라고 불리우는 ‘푸루샤’로부터 우주의 질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동양에서 아직 아무 움직임도 없이 유일무이하게 에너지가 뭉쳐져 있던 상태(무극, 태극)로부터 음·양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푸루샤에서 어떤 움직임의 기미가 생기는데, 그것을 ‘프라크리티’라고 부른다. 아직까지 어떤 실질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우주의 물질이 생겨나려고 하는 그 기미를 말한다. 프라크리티는 3가지 주요 성질(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을 가지고 그 성분들을 섞어가면서 새로운 기운과 물질들을 낳기 시작한다. 한번 시작되면 끊임없이 낳고 낳는 과정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이 세계의 물질들과 우리의 몸이 만들어 진다. 이 반복되는 활동을 통해서 5종류의 에너지와 5대 원소로 분화된다. 5대 원소는 공간, 공기, 불, 물, 흙이라는 물질성을 가지면서 인간과 세계의 모든 생명의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형성한다. 2
샹키아 철학에서는 끝없이 낳는 이 에너지를 ‘샥티’ 라고 말한다. 프라크리티는 샥티의 발현이다. 그리고 이 분화의 과정을 인식하는 우주적인 지성을 ‘마하트’라고 부르고, 이 우주적인 지성이 인간 속에도 내재하는데, 그것을 ‘붓디’라고 부른다. 전체와의 연결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이며 지성이다. 이러한 분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물질성을 가진 다양한 창조물 중의 하나인 인간은 자신이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의식을 아함카라(에고)라고 부른다. 3
“에고는 본래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일련의 구분하는 생각들”(데이비드 프롤리 지음, 『요가와 아유르베다』, 슈리 크리슈나다스 아쉬람 출판사, 37쪽)이다. 즉 물질 분화의 과정에서 각각의 다양한 독립된 생명체가 갖는 의식이다. 하지만 에고는 우주의 전체의식인 푸루샤에서 프라크리티의 활동으로 하나의 생명체가 되었다는 본질적인 지성을 잊어버렸다. 때문에 상키아 철학에서는 신을 경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붓디를 깨우는 탐구의 과정을 통해 개인들의 눈을 뜨게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학파는 괴로움의 뿌리에는 욕망보다 무지에 있다고 믿었다. 우리의 괴로움은 진정한 ‘자아’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중략) 거룩한 삶의 목표는 프라크리트로부터 푸루샤를 분별해내는 것이다. 수도자는 감정의 혼란을 넘어서 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부분인 지성을 계발해야 한다.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91쪽, 카렌 암스트롱 지음, 푸른숲 출판사
상키아 철학에서는 프라크리티의 3가지 성질인 사트바, 라자스, 타마스와 5대 원소가 서로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세계 속에 5가지 감각기관과 5가지 운동기관을 가진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우주적 질서로부터 탄생한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렸다. 무지로 덮였다. 하여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라 여기며, 자연의 한 부분임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인간들의 괴로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괴로움과 감정의 혼란을 넘어선 생활을 하려면 프라크리티의 활동으로 분화되고 개체화되었다는 지성을 탐구해야 한다. 이 지성의 탐구가 바로 자신 안의 붓디를 발현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상키아 철학은 말한다.
더군다나 프라크리티와 5대 원소는 인간 안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물질과 의식을 낳는다. 또 외부세계에서 받아들이는 감각과 결합되어 또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요가는 바로 이러한 상키아 철학 위에서 만들어진 실천 체계이다. 인간 자신이 생성된 우주법칙을 알고, 자기의 본성과 자신을 구성하는 미세한 에너지를 알아가기 위한 철학이자 체계이다. 상키아 철학과 요가 철학은 이러한 분화의 과정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가는 것을 요가라고 불렀다. 요가는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변화를 인식하는 지성인 붓디를 발현시키는 실천의 과정이다.
글_정은희
(다음달에 2편으로 이어집니다.)
- 육파철학 인도 철학의 여러 학파. 정통 브라만 계통, 즉 브라만의 기본 성전인 『베다』를 어떤 의미에서든 인정하고 있는 학파이다. 상키야 학파, 요가 학파, 미맘사 학파, 바이쉐시카 학파, 베단다 학파, 니야야 학파로 나눈다. [본문으로]
- ·사트바-‘지혜·빛·지성’, 푸루샤에 가장 가깝다. ·라자스-‘열정’, 신체적 또는 정신적 에너지. ·타마스-물질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 힘. [본문으로]
- 샥티(산스크리트어: शक्ति Śakti, 영어: Shakti)는 신성한 힘 또는 신성한 권능이라는 문맥에서 "할 수 있는" 또는 "능력이 있는"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샥(Śak)"으로부터 유래한 낱말로, 힌두교에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고 여기는 우주의 활동적인 힘 또는 에너지를 지칭하는 낱말이다. 샥티는 철학적 측면에서는 우주의 여성적 창조력을 뜻하는 개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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