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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다른 아빠의 탄생

그와 그의 아버지의 무인도

by 북드라망 2018. 10. 26.

그와 그의 아버지의 무인도




군대 가기 전이었던 그는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졌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을 모두 알아버린 젊은이인양 그는 이상한 글들을 써 내려갔다. 제목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신이 있기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든지, 지금은 매장당하고 남을만한 여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의 글도 있었다. 있어 보이는 척했으나 실상은 실험적이고 독창적이라고 ‘자뻑’했던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그의 첫 번째 글은 기억난다. 제목은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


가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게 다라고.

그러자 라는 마라며 바했다.

하지만 사는 아를 자로 보고

차가 카인줄 몰랐다.

타만 파했으니, 결국 하인 셈이다.

      

시인 이상도 울고 갈 거라던 그의 천재적인 망상은 뒤로하자. 당시의 정신 상태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를 보고 문득 ‘무인도’를 떠올렸다.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지 않을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굵어진, 그러나 실은 두상이 큰,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 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유로운 아버지는 어디로 가고 싶을까? 너무도 많은 가족관계, 직장관계에 둘러싸인 여기를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아마도 ‘무인도’에 가고 싶지 않을까,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그는 왜 그의 아버지에게 스스로 짐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어릴 적 명작동화의 위인들이 아닌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게 왠지 부끄럽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도 되고 싶은 무엇이 없었고 나중에 스무 살이 되어서도 별다른 꿈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거나 고치는데 재주가 있던 그의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커서 아버지만큼만 되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인도에서 갔더라도 손재주가 많아 로빈슨보다 잘 살았을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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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본행을 선택했던 그의 아버지. 그는 아버지가 없는 듯 살았으나 순간순간 그의 아버지는 불현 듯 그 앞에 떠오르곤 했다.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는 아버지 대신 그의 할아버지가 대부분 등장한다. 그가 뒤늦게 그의 아버지를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형제 집안 사이에서 풀어야 할 숙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집안에서 그의 아버지의 생사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와 만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미 일본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그는 일본으로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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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에게선 두 가지 냄새가 났다. 담배냄새와 기름냄새. 군대에서 담배를 배운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손가락에서 아버지의 냄새가 나는 걸 알고는 기뻤다. 그의 아버지가 팔베게를 하고 커다랗고 굵은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 나는 냄새였다. 군대에서 아무리 삽질을 해도 그의 손가락은 그의 아버지보다 굵어지진 않았다. 대신 담배냄새는 엇비슷하게 나는 듯 했다. 습관 외에 그가 흡연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담배가 타면서 나는 것도 아닌, 입으로 내뿜는 것도 아닌, 살을 맞대야 맡을 수 있는 구수한 냄새, 라고 그는 생각했다. 

제대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는 그의 아버지 공장에서 1년 반 정도 일하게 되었다. 때마침 나라경제도 안 좋아 일하던 직원도 그만둔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누전차단기에 들어가는 황동이나 청동의 ‘가동자’ 부품 등을 만드는 작은 프레스 공장을 운영했다. 그는 거기서 납품용 물건을 포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금형조립, 연마, 용접 등을 배웠다. 두 대의 프레스 기계를 돌리면서 소리만으로 물건의 불량유무를 알게 될 무렵, 그의 손가락에도 기름때가 끼게 되었다. 지문 사이와 손톱 밑의 기름때는 칫솔로 문질러도 잘 안 벗겨진다. 그제야 그의 손에서 담배냄새 위에 기름냄새도 함께 묻어나게 되었다. 그는 공장에서의 에피소드를 종종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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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듣다보면 굉장히 아찔하거나 슬픈 이야기인데도, 이미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상처가 아물어서인지,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웃게 된다. 그래서 그의 슬픈이야기는 우리의 웃픈이야기가 된다. 그가 어렸을 때 이야기다. 

심부름으로 자전거에 짐을 싣고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두워졌다. 안전하게 큰 길로 돌아오면 되건만 그는 가로질러오는 저수지 둑방 지름길을 택했다. 가로등도 없었지만 늘 다니던 길이라 쌩쌩 달렸다. 그러나 아뿔싸. 억!! 하는 순간 그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르더니 자전거 바퀴가 반으로 접히는 걸 보자마자 그 역시 땅으로 꼬꾸라졌다. 큰 돌이 빠졌을까, 커다란 웅덩이에 자전거는 구겨져 있었다. 그의 몸도 땅에 구겨져 있었는데, 어깨라 다행이지 만일 머리가 먼저 떨어졌다면 목이 반으로 접혔을 거라고, 껄껄껄 웃는다. 

어두운데 천천히 좀 달리지 왜 그렇게 빨리 달렸냐고 누가 묻자 그는 저녁을 굶을까봐 그랬단다. 스무 명이 넘는 식구가 살던 그의 집에선 누가 누구의 밥을 챙겨주지 않았다. 구겨진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그는 어깨 아픈 것보다 밥 굶는 게 더 걱정됐다. 그가 나중에 공대를 선택한 건 밥을 굶지 않기 위한 기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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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첫 과외선생은 공대생이었던 그의 아버지였다. 자연스럽게 과목은 영어가 아닌 수학. 중학교 때 친구집에서 외박한다고 때 부리던 동생의 뺨을 후려치던 그의 아버지의 성격과는 달리 교육 중에 폭력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몇 번이나 알려줘도 문제가 풀리지 않자 그는 스스로 눈물을 흘렸다. 어리석음에 대한 억울함일까 아니면 칭찬받지 못한 조바심일까. 

그의 아버지는 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늘 버릇처럼 원리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반복할 뿐이었다. 한 번은 눈물을 닦으려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던 그가 갑자기 뛰쳐나와 알아냈다며 웃으며 정답을 적기도 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때리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지랄을 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수학을 잘 하진 못 했으나 싫어하진 않았고, 그 역시 공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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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이면서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무언가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못 쓰는 티브이에서 브라운관을 떼어내고 그 안에 병아리를 키웠다. 고추말리는 기계를 사는 대신에 안 쓰는 헤어 드라이기를 파이프로 고정하고 타이머를 달아서 사용했다. 집에서 필요한 것이나 고쳐야 할 것들, 선반이나 평상 등은 기본이고 주차장 차고나 창고 등도 그는 직접 만들어서 썼다.     좋은 자재보다는 대개는 안 쓰는 것이나 갖고 있던 것을 사용하다보니 역시 모양은 안 나지만 성능은 꽤 쓸만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일까, ‘전화기고장표시기’, ‘골프스윙연습기’, ‘흑판지우개털기’ 등의 디자인, 특허·실용신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손재주가 좋아 스스로 고생하는 팔자일지도 모른다. 


공대 졸업 전 어느 잡지사에 들어가 전공과는 거의 무관하게 기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건 분명 책을 좋아하고 한때 방송작가였던 그의 어머니와 무관하지 않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나름의 선택이유는 있었다. 잡지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기자생활 당시 기사와 관련한 자료사진을 늘 사진부에서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의 관심은 이제 사진으로 나아갔다. 잡지에 사용하려면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야 한다. 슬라이드 마운트와 루뻬, 라이트박스도 준비했다. 지나고 보니 충동적으로 선택했던 기자생활을 접었으나 사진은 접지 못했다. 이후 동대문 골목에서 흑백사진의 인화, 현상까지 배웠으나 지금 그는 중고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가 갖고 있던 아버지의 작은 사진 한 장과 일본이름만으로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와의 관계를 증명할 문서도 있었으나 일본 공무원에게 한국이름은 무의미했다. 게다가 사진 속의 인물이 일본인이라면 더더욱 개인정보는 공개할 수 없다는 태도는 완강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 않게 말 하듯 그는 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있는 그의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의 꿈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여기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는 나무 중에서 느티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나무껍질이 매끄럽고 나무형태가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옆에는 넒은 평상이 놓여있고 그 옆에는 평상보다 작아 보이는 구멍가게가 있다. 그는 그 구멍가게의 주인이다. 이야기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생각이 어려서인지 구멍가게 단골손님 아이들과 그냥 헤어지는 법이 없다. 아이들도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그는 구멍가게의 주인이지만 아이들의 고민이나 어려움들을 상담하거나 들어주는 일을 더 재밌어 한다. 부모와의 문제, 친구끼리의 다툼, 이런저런 공부의 방법 등. 그렇다고 아이들하고만 이야기 나누진 않는다. 동네사람들 모두가 오고가며 평상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하는 일은 평상을 잘 닦는 일이다. 구멍가게와 평상은 그 동네의 ‘공유지’인 셈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자유의 무인도가 있다면 그에게는 구멍가게 평상이 무인도인 셈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의 무인도에는 자유롭게 이야기가 흘러 다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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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목마름이라거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식으로 심리분석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다만 그의 아버지에게 필요하다 생각했던 무인도를 이제 그는 구멍가게 평상으로 옮기려고 한다는 점은 새겨둘만 하다. 그런 점에서 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진행형이다. 우리가 아직 듣지 못한 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굳이 전부 듣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건 나와 당신의 이야기로 이어질 테니까. 


아내의 말을 빌자면 결혼을 안 했어도 난 혼자 재밌게 살았을 거라고 한다. 아마 잡다하게 이것저것 하고 있는 것도 많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그런 가 보다. 이런 잡다함이 재밌긴 한데 돈은 못 번다. 잘 사는 게 돈을 잘 버는 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어차피 돈을 못 버니 없어도 잘 사는 법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진 별일 없이 살고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 밑줄 대신 만화를 그리는 걸로 시간을 보내다 지금은 집 그리는 일을 밥벌이로 하고 있다. 전공을 살린 듯 하지만 만화도 집도 둘 다 조금씩 어정쩡하다. 그래서 심심할 때 조용히 혼자서 만화를 그리는 첫째아이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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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주에 방랑벽이 있는지, 어렸을 때부터 혼자 동네를 탐험했다. 말이 좋아 탐험이지 그냥 일없이 싸돌아다니는 거다. 그러다 누가 버린 거 괜찮다 싶으면 집으로 갖고 오기도 했다. 한 번은 버려진 칼라티브이를 낑낑거리고 주워왔는데 켜보니 오직 파란색 하나만 나왔다. 퇴근 후 아버지에게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스머프로 보이던 티브이를 그날 밤 다시 전봇대 밑에 갖다 뒀다. 방랑벽에 수집병까지, 튼튼한 리어카만 있으면 딱인데. 

제대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군대동기들을 찾아다닌 게 첫 무전여행이었다. 어머니들은 재워주고 먹여주고 돈까지 주셨다. 그 돈으로 차비를 했다. 두 번째는 대학 후배와 춘천까지 히치와 노숙을 겸비한 알뜰여행이었다. 마지막 찜질방의 하룻밤과 닭갈비를 위해 우리는 돈을 아꼈다. 지금은 집을 그리고 그 현장을 돌아다니는 걸 일로 하고 있다. 사무실에 앉아서 그리는 것보다 지어지는 현장 보는 게 당연히 즐겁다. 가끔 비슷한 직업군에 대해 멘토링을 할 때면 잡다함을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첫 조건으로 꼽는다. 


영화 혹은 영상에 대한 애정은 그때 주워왔던 티브이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영화감상을 취미로 안 적는 건 밥 먹는 게 취미가 아닌 것과 같다. 한때 직장에서도 퇴근 후 영화감상모임을 만들기도 했지만, (야근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나의 B급 취향은 몇 개월 넘기질 못 했다. 전남 광주 현장에서 막차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새벽 2시. 택시타고 집에 갈까 하다가 그 돈으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심야 마지막타임 걸 보고나서 첫 차고 집에 왔다. 아내는 새벽까지 고생했다며 아침을 차려줬다. 지금은 인문학공동체에서 청씨네, 인큐베이터, 필름이다 등의 이름으로 꾸준히 책보다는 영화를 편애하고 있다. 영화 보는 것만큼 사랑하는 건 음악듣기. 영화감상과 음악듣기, 뻔하고 뻔한 두 가지가 나의 취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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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누구를 미워하지 않는데, 아직도 나의 첫 ‘마이마이’를 훔쳐간 그놈은 놓친 게 한이 되고 있다. 라디오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기 위해 샀던 용돈을 모아 샀던 마이마이 카세트. 녹음 중에 제일 짜증나는 건 노래가 끝나기 전에 나오는 디제이의 멘트였다. 독서실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마이마이는 어디가고 없고 이어폰만 귀에 꼽혀 있었다. 그때 마악 독서실 문을 나가던 한 녀석이 보였으나, 비몽사몽 판단미스로 놓쳤다. 지금 내가 외이염에 시달리는 건 그때부터 꼽고 다녔던 커널형 이어폰과 흘러나오던 노래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 베이스만 잡힌다면 어떤 기기도 음악 들을 때 가리지 않는 편이다. 눈 뿐만 아니라 귀도 B급이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무한반복해서 질릴 때까지 듣는다. 12월 2학기 과제마감날 제도실에서 스피커로 밤새 들었던 곡은 황병기의 ‘춘설(春雪)’이었다. 그날 그 곡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후배도 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다르게 보면 지금까지 그냥 흘러 온 것 같다. 이십 대, 군대에서 큰 사고 없이 맞춰 살았고 아버지 공장에서도 별다른 불만 없이 맞춰 지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수용하고 거기에 맞는 모드로 살아왔다. 삼십 대, 아이도 낳고 인문학 공부도 하고 야근하며 일도 했다. 열심히는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질 않는다. 

가끔 글쓰기에서 수동적인 태도가 삶의 지향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애써 감추려는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다는 건 혹시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은 아닌지, 흘러가는 대로 살겠다는 건 혹시 어디로 나아갈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문제는 흘러가는 게 아니라 그걸 종종 불안해 한다는 거다. 그렇게 사십 대가 다가왔고 지금 흘러가고 있다.


글_청량리(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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