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니체’라는 음악을 듣기 위하여

‘니체’라는 음악을 듣기 위하여




설명충의 비애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일 년에 소설 한 권을 읽으면 기적일 정도로(해리포터는 논외로 하자^^). 그러다 처음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중학교 시절 내가 동경했던 ‘형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렸다. 하긴, 그러니까 중딩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만난 ‘형들’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심지어 ‘사회’를 논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지적인 것’이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매력일 수 있다는 걸(즉 여자들에게 먹힌다는 걸) 알게 됐다. 좋은 건 냉큼 습득해야 하는 법.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책을 한 권 빌려 한 달에 걸쳐 읽곤 했다. 유시민, 홍세화, 우석훈 같은 작가들의 인문교양서들이나 《위대한 개츠비》, 《동물농장》, 《이방인》 같은 ‘유명한’ 소설들이 내게 간택된 책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독서는 좀처럼 ‘이 정도는 읽어 줘야 한다’는 의무감 이상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내게 책은 가까이 있지만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물건, 혹은 늘 같이 다니지만 막상 단둘이 있으면 좀 어색한 친구 같은 존재다. 갈수록 독서량도 늘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의 범위도 넓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독서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편하고 자연스럽지는 않다. 책만 펼치면 머리를 쥐어뜯게 되고, 뒷목이 뻐근해져온다. 지하철에서는 책보다는 스마트폰에 더 쉽게 눈이 간다. 내게 독서란 여전히 시간을 내서 ‘각 잡고’ 해야 하는, 중대하지만 부자연스러운 활동이다. 특히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나는 언제고 음악을 듣는다. 길을 걸을 때,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밥을 먹을 때, 샤워할 때. 언제 들어도 불편하지 않다. 듣던 음악에 질리거나 이어폰 때문에 귀가 아파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음악 듣기가 꺼려지는 일은 없다. 그에 비해 책은 어떤가. 나는 분명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낸다. 그렇지만 음악을 듣는 것처럼 편하지는 않다. 어째서일까? 우선, 책 읽기에 너무나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음악을 왜 듣느냐고 물으면 그냥 좋아서 듣는다는 정도의 대답을 하고 그 질문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책을 왜 읽는지 묻는다면, 그때부터 내 실존을 건 고민이 시작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으려 하고 책 읽기의 ‘의미’를 고민한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편안하게 떠들 수 있지만, 책에 대해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신성한 것들’의 권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내가, 어이없게도, 나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텍스트’를 신성시하고 있었는지도. 왠지, 다른 모든 것들과 달리 책만큼은 ‘느낌’의 차원에서 접근해선 안 될 것 같다. 책을 읽을 때에는 ‘객관적’이어야 할 것 같고, 없던 이성이라도 발휘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물론, 모든 책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아니다. ‘가벼운’ 책들, 예컨대 내가 좋아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나 폴 오스터 같은 작가들의 잘 읽히면서도 세련된 소설들과 에세이들은 편안하게 음악 듣는 마음으로 읽는다. 다만 ‘고전’이나 ‘철학’으로 분류되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은 책들 앞에서는 유독 무거워진다. 독서와 다른 활동들을 구분했던 것만큼이나 책들 사이에도 위계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인가.(도대체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믿었던 ‘나’는 뭐지??)


글을 쓰면서부터 알게 된 건데, 나는... ‘설명충’이다. 무언가를 읽고 글을 쓰려고 보면 ‘내 생각’에 이르지 못한 채 자꾸만 읽은 책을 설명하려고 하는 나를 만나게 된다. 남들을 이해시키려고 드는 ‘진지한’ 사람들을 비웃었는데, 나름대로 나 자신이 ‘감각적’이라고 믿었는데, 세상에 설명되어야 할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하며 가벼움을 가장했던 나인데.... 그런 내가 설명충이었다니! 물론 내가 ‘지적인’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에는 내가 ‘지적’이라는 규정에 갇힐 만큼 진부하고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이상한 믿음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지적인 것’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그것의 특권성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영화 보기, 기타 치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좋아한다’는 건 뭘까?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이유 없이 그냥 하고 싶고 하게 되는 것들, 좋고 나쁨을 따지기도 전에 이미 하고 있는 일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활동들. ‘좋아하는 일’이란 그런 거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 읽기를 충분히 ‘좋아하고’ 있었나? 그러기도 전에 그것에 너무나 많고도 큰 ‘이유’들을 덧붙여 놓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독서’에 너무나 많은 ‘모래주머니’들을 매달고 있었던 거다. 음악 듣고 영화 보듯 책을 읽을 수는 없을까? 나의 ‘즐거운 독서’는 불가능한 걸까?



나의 읽기, 니체의 읽기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책과 함께 보내고 있는 나. 나는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음, 우선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일련의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커피나 차를 타오고,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화장실도 한 번 갔다 와야 비로소 책 읽기가 시작된다. 읽는 동안에는 주변의 소리들이 나의 가장 큰 적이 된다.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집중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카페나 지하철에서는 잘 읽지 못한다. 그렇다고 집에서 잘 읽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집에는 누울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도 나를 조금 긴장시키고 불편하게 하는 공간에서야 비교적 책 읽기에 집중할 수 있다.(그런데 그런 공간은 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 아무튼 그렇게 어렵사리 시작하고서도 책을 좀 읽으려고 들면 온 몸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승모근이 뭉치고, 목이 뻐근해지고, 눈이 아파온다. 책 읽기를 지겨워하고, 남은 페이지 수를 자꾸만 확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새 읽기가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정말로 ‘일’이 되어버린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잡다한 워밍업이 필요하고, 금방 지겨워지는데다가, 그 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 이는 모두 노동의 표식이 아닌가? 인정하기 싫지만, 이 모든 신체적 징후들은 음악을 들을 때보다는 알바를 할 때 내게 나타났던 것들과 유사하다. 나는 ‘지식 노동자’였던 것인가.




노동과 노동이 아닌 활동의 차이는 뭘까? 돈을 번다고 다 노동은 아니다. 반대로 돈과 무관한 활동이라고 해서 꼭 노동이 아닌 것도 아니다. ‘노동’과 ‘활동’은 동일하게 무언가를 생산하지만, 그것을 생산하는 방식은 천양지차다. 우화 속의 개미와 베짱이를 보자. 노동자 개미는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서 ‘미래’를 위한 식량을 비축한다. 그의 노동은 ‘유용한’ 재화를 생산하지만, 행위 그 자체가 개미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그의 역량을 증대시키지는 않는다. 반면 베짱이의 연주는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포착되지 않는다. 베짱이의 연주는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이며, 자신과 듣는 이를 기쁘게 한다. 예술도, 노동도 결국은 같은 행위의 반복이다. 그러나 노동의 반복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피폐하게 만들면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를 재생산한다면, 예술적 활동의 반복은 스스로의 능동적인 힘의 구성으로 이어진다. 아니, 주어진 가치의 재생산에 종속되지 않는 활동에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있다.


니체는 노동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읽고, 쓰고, 산책하는 것은 결코 다른 무엇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에 헌신하여 진리를 재생산하고 공고히 하는 지식노동자들을 경멸했다. 학문은 삶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철학자의 작업이 무엇을 위한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정직이란 자신을 위해 말하고 쓰는 일이었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학문적 이상에도, 독자의 기대에도, 인간적 전제에도 복종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자기 자신과 ‘미래의’ 독자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 그러기 위해 기존의 병적 징후들을 진단하고 비판하는 것, 이것이 니체가 생각한 철학자의 정직이다. 니체에게는 높은 이상을 ‘위해’ 철학을 한다거나 남들을 ‘위해’ 쓴다는 식의 의미부여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철학은 ‘모두를 위한, 그러면서도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것일 수 있었다. 철학은 누군가를 위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가 각자의 질문을 구성하게끔 한다. 질문이 삶의 구체적 조건 속에서 구성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근본적으로 ‘목적’과 ‘노동’에 반하는 일종의 ‘향유’다. 자기 변신과 자기 향유. 우리가 어떤 행위를 ‘목적’에 종속됨 없이 계속해나갈 술 있기 위한 조건이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과정을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 때 나는 그것과 더불어 신체적인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리듬과 코드 진행, 그리고 사운드가 귀에 익고 몸에 새겨지는 과정을. 니체 표현대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음악을 듣는 귀’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온갖 음악들을 찾아 듣고, 낯선 소리들이 주는 이질감을 견디면서 나의 취향을 실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생소할지라도 그 눈길과 표현을 참아내고, 그것이 지닌 기이함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인내와 훈련의 과정. 그런 자에게만 “결국 그것에 친숙해지고, 기대를 품고, 그것이 없으면 아쉬워하게 되리라고 예감하는 순간”(즐거운 학문, 334절)이 찾아온다. 음악을 늘 듣는 사람은 음악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음악 속에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다. 나의 독서에 결여된 것은 바로 그 같은 과정이었다.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고 낯선 형식과 문체를 견디면서 나의 취향을 실험하는 나는 과정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읽는 눈, 읽는 마음, 읽는 신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사실 니체를 읽으면서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기는 하다. 니체의 글들은 이상하다. 그의 구절들은 ‘주제’로도, ‘말하고자 하는 바’로도 환원되지 않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분명 니체는 특별히 복잡한 논리를 전개하지도, 미로처럼 정밀한 체계를 세우지도 않는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낯설고 심오한 개념들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글들은 늘 어떤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그의 글은 음악처럼 경험된다. 작년, 처음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을 때 나는 니체의 반복되는 ‘주제’들을 재확인했다. 기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 신체성의 복권, 신의 죽음, 가치의 평가와 창조 ……. 이러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중요해 보이는 구절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번째로 읽고 있는 지금은 니체가 그 주제들을 변주해내는 방식들에 눈이 간다. 독특한 단어선택과 구절들의 배치, 비유가 만들어내는 운동을 통해 니체의 사유가 구성되고 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매번 편곡이 다른 음악을 듣는 것과도 같은 체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라는 형태에 대한 습관적 거부감 때문에 나는 음악을 듣는 것처럼 니체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렇게 읽어야 한다’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신체적인 ‘느낌’들을 방해했던 것이다. 신체가 보내는 기호들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니체의 논리와 개념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당연하게도, 니체를 읽었지만 니체가 ‘읽히지’ 않았다. 그의 강력한 구절들을 그대로 가져와봐야 공허할 뿐이었다. 이젠 음악처럼 니체를 읽고 싶다. 니체를 듣고 만지고 더 잘 느끼고 싶다. ‘읽는 신체’가 되고 싶다.


사실 니체는 훌륭한 ‘독서가’이기도 하다. 가령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을 보자. 그리스 비극을 다룬 이 초기 저작에서,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어떠했다는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문헌을 참고하여 그리스 비극을 최대한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은 니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문헌들에 대한 ‘읽기’를 자신의 현재적 문제를 돌파하는 ‘힘’으로서 전유한다. 즉 텍스트로부터 ‘저자의 의도’ 따위가 아니라 고유한 힘(=해석의지)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러한 힘들을 또다시 ‘해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변용시킨다. 그러한 능동적 독서의 결과로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학문적’ 저술에 국한되지 않고, 온갖 힘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예컨대, 《비극의 탄생》에서는 기독교적인 힘과 그리스적인 힘, 소크라테스적인 것과 바그너적인 것, 그리고 책을 쓸 당시의 젊은 문헌학자 니체와 1886년에 덧붙인 서문에서 ‘자기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니체 사이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그 전쟁의 결과 니체는 앞으로 펼쳐질 ‘니체들’이 되었던 것이다. 니체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니체에게 ‘읽기’는 ‘책’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소화’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렇게 하듯, 책을 씹고 삼키고 분해해서 우리 신체에 작동하게끔 하는 것. 니체가 자신의 독자에게 명료한 이성이 아니라 “튼튼한 이와 튼튼한 위장”(즐거운 학문 “농담, 간계 그리고 복수” 4절)을 요구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니체의 모든 구절은 해석을 요한다. 해석되기 이전에 어떤 고유한 본질을 지닌 채로 존재하는 구절은 없다. 그것을 해석하고 자기화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니체라는 힘을 취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읽기의 본질이 아닐까. 우리는 ‘책’이 아니라 ‘읽기’와 더불어 구성되는 우리 신체를 경험한다. ‘읽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텍스트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감각, 충동, 욕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책으로부터 몇 개의 언어적 명제들을 취하는 일에 국한 되지 않는다.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우리 신체를 변용시키는 일이며, 관점의 변환을 겪어내는 일이다. 니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니체의 논리를 되풀이하거나 그의 개념을 설명해낼 수 있게 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니체와의 마주침을 통해 ‘다르게 느끼게’ 되는 일이다. 니체를 읽다보면 나의 유치함을 자각하게 되곤 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식의 후회 섞인 회고와는 다른 감각이다. 내가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나 생각들과만 관계 맺으면서 스스로 견고하게 구축해놓은 나의 알, 나의 어항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유치함에 대한 자각은 환멸뿐만 아니라 기쁨도 가져다준다. 내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다는 데서 느껴지는 기쁨, 더 많은 것들과 관계 맺고 더 많은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게 된 데서 비롯되는 기쁨. 읽기의 즐거움이란, 즐거운 읽기란 텍스트와의 마주침으로부터 비롯되는 역량의 증대에 다름 아니다.



니체를 듣고 쓰기


예전에 잠깐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3년 간 공부하면서 ‘읽고 쓰는 법’을 배운 것 같다고. 처음엔 뭔 소린가 했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온갖 강의를 듣고 세미나를 하고서 배운 게 고작 ‘읽고 쓰는 법’이라니.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글을 잘 쓰고 싶었던 나는 ‘쓰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한 글들이 있었고, 공부를 해서 낯선 사유들을 내 것으로 만들면 그런 글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도 했다. 그러나 좋은 말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대화를 잘 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좋은 인용구들을 알고 있다고 좋은 글이 써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소화하지 못한 말들을 ‘설명’하느라 급급하게 될 뿐이었다. 내가 ‘설명충’이라는 건 책을 온 몸으로 만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읽기로부터 충분히 ‘촉발’되고 있지 않았던 것.




사실 읽기와 쓰기는 따로 떨어질 수 있는 활동이 아니다. 이옥은 말한다. 읽기란 책에 취하는 것이고, 쓰기는 취하여 토하는 것이라고. 난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토가 나오기를 기대했었나 보다. ‘읽기’를 ‘지성적인 것’으로 특권화하는 동시에 나는 은밀하게 그것을 폄하하고 있었는지도. 글쓰기와 달리, 읽기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는 ‘주어진 길’을 그저 한 발자국씩 따라가는, 지극히 수동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읽기는 하나의 봉우리로부터 다른 봉우리로 건너가는 일이다. 잘 읽기 위해서는 긴 다리와 우람한 체구를 지녀야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를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짧은 다리와 왜소한 체구를 지닌 독자들은 책이라는 미로 안을 헤매며 숨겨진 의미를 찾고자 헛되이 노력한다. 반면 긴 다리와 우람한 체구를 지닌 독자는 텍스트로부터 또 다른 텍스트로, 그리고 자신의 현재적 문제지점으로 ‘점프’한다. 읽기로부터 ‘촉발’ 되어 ‘쓰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던 것은 이러한 ‘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잘 읽을 수 있을까? 우선 ‘이해’에 대한 망상을 버리자. 나는 자주 읽은 것으로부터 ‘말’을 취해 와서는 그것을 ‘이해’라고 착각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대충 질겅질겅 씹고는 곧장 삼켜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관념적 이해는 나의 읽기 습관을 유지보수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식의 관념적 이해가 강한 중력이 되어 읽기의 도약을 저지하는 것이다. 읽기란 텍스트와의 마주침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지점으로 사유를 분기하는 일이다. 책에 부여한 권위를 회수할 것. 권위를 지닌 책이란 없다. 나 자신이 그것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책과의 마주침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책에서 ‘읽어내야 할 것’이란 없다. 기쁨은 종종 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일들을 ‘그저 함’에서 발생하지 않던가. 니체는 불편하다. 생전 처음 듣는 음악과도 같다.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이 내가 몰랐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나 자신을 아프게 마주하게끔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니체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내가 니체를 쓰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