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예술과 철학, 일상의 힘

예술과 철학, 일상의 힘




패터슨, 평범의 경이로움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은 시 쓰는 버스 드라이버 패터슨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아마추어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형적 영화들과는 달리 패터슨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주일을 담담하게 따라갈 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내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씨리얼을 먹고, 동료의 하소연을 듣고, 버스를 몰고, 폭포 앞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를 몰고, 기울어진 우체통을 고쳐 세우고, 반려견 마빈과 산책을 하다가 바에 들려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지극히 단조로운 일과의 반복. 가령 《위플래쉬》의 ‘광기어린 열정’이라든가, 《원스》 풍의 ‘인디감성’, 《인사이드 르윈》이 보여주는 ‘비루한 현실’같은 건 이 영화에 없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심심한 영화는, 아니 이 영화의 심심함은 내게 기묘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술이 저렇게 무미건조한 것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게 예술은 특별한 무엇이었다. 일상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엘도라도. 당연히 예술가들에게는 나 같은 범인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믿음 때문인지 한때는 작품 한 편 읽어보지 않은 위대한 작가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는 재미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작품보다 나를 더욱 매혹시켰다. 젊은 시절 대학을 관두고 무작정 유조선에 탄 작가도 있었고, 육체노동자에서 기자로 또 소설가로 변신을 거듭한 작가, 도서관 사서 생활을 하며 지하 서고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 작가도 있었다. 내게는 그 모든 작가들의 삶이 특.별.해보였다. 예술을 하는 친구들만 봐도 뭔가 남달라 보였다. 아니 ‘남다른 것들’만 보려했다. 예술가란 그런 존재이고, 예술이란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작업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패터슨의 이토록 ‘평범한’ 삶이라니? 그는 시를 투고하지 않을 거면 복사본이라도 만들어 놓으라는 아내의 애원에도 굴하지 않고 독자도 없는 시를 자기만의 ‘비밀 공책’에 묵묵히 써내려간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어떤 특별하고 비의적(祕義的) 영감의 산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성냥갑이나 할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 같은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그의 시가 된다.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는 인간의, ‘시적인’ 구석이라곤 없는 일상. 대체 이 뻔한 삶의 어디에서 시(詩)가 나올 수 있었던 걸까? 아니, 패터슨은 이런 내 질문을 전복시킨다. 왜 난 지금까지 시(예술)를 일상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환상은 일상을 잠식한다


나 역시 패터슨 못지않게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연구실로 향한다. 세미나가 있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동료들과 밥을 해먹으며 다른 세미나를 준비한다. 연구실 뒤쪽으로 짧은 산책을 다녀오거나 잠깐 기타를 튕기기도 한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 같이 공간을 청소하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대체로 음악을 듣는다. 지하철을 내려 집에 가는 중에는 종종 편의점의 유혹에 넘어가곤 하는데, 주로 라면이나 삼각김밥을 사먹는다. 집에 도착해서는 별일 없으면 씻고 유튜브로 영상을 보다가 잠이 드는 게 보통이다.


나의 일상 또한 패터슨 못지않게 단조롭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럴 거다. 패터슨은 버스회사에 나가고, 나는 연구실에 나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무실로, 공장으로 나가고 … 산다는 게 뭐 이런 거겠지. 그렇지만 나는 꽤나 오래, 실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 삶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반복과 패턴으로부터 자유로운 ‘즉흥적 삶’을 꿈꾼다. 프리랜서가 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여행을 자주 다니는 직업을 얻으면 될까? 아니야, 노동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가능한 걸지도 몰라... 공허한 꿈과 부질없는 질문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대체 나는 왜 반복과 패턴을 혐오하게 된 걸까? 누가 내게 그런 삶을 강요하는 것도, 직장생활을 경험해 본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겪어보지도 않은 삶에 대한 혐오와 그렇지 않은 삶에 대한 로망을 갖게 된 걸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뻔한 삶’을 살게 될까봐 두려웠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두려움에는 나도 결국에는 남들처럼 진부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체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뻔한 삶’의 반대쪽에 모셔놓은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삶은 너무나 특별하고 희귀한 것, 그래서 결코 실현가능해 보이지 않는 판타지였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나 철학자들만이 진부한 삶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소요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삶을 살기에 나는 너무나 평범하다는 자괴감. 나의 환상은 좇아가기엔 너무나 거대했다. 동시에 그런 삶을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내가 너무나 게을렀다. 하여, 화려한 로망과 폄하된 현실 사이에서 나는 브뤼당의 당나귀처럼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놓친 것은 ‘지금’ 나의 욕망, ‘지금’ 나의 능력,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었다.


내가 처음 니체에 끌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던 것 같다. 어린아이와 같은 유희정신을 말하는 니체, 모든 근거들의 무근거성을 통찰한 니체라면 절대 뻔하게 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니체를 공부하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니체는 더없이 단조로운, “거의 군인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니체는 평생을 병과 함께했다. 그리고 병이 악화된 이후부터는 죽기 전까지 ‘좋은 날씨’를 찾아다니는 방랑생활을 했다. 이 시기 니체의 일주일을 영화로 재구성한다면 어떨까? 아마 《패터슨》 못지않은, 진정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가 탄생할 거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술과 자극적인 양념이 배제된 가벼운 식사를 하고, 인사를 주고받는 상대 하나 없는 조용한 산책을 다녀오고, 드물게 책을 읽고 방문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병이 허락하는 동안 글을 쓰는 삶. 패터슨과 니체. 그들의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더욱 찬란해 보이는 자유로움. 그들은 내 환상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매일매일’의 시(詩)와 철학


“그대에게는 무엇이 매일매일의 역사인가? 그것을 구성하는 그대의 습관을 돌아보라! 그것은 무수히 많은 사소한 비겁과 나태의 산물인가, 아니면 용기와 창조적 이성의 산물인가?”(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308절, 책세상)


따지고 보면 우리는 ‘매일매일’을 살아갈 뿐이다. 전체로 주어진 ‘운명’이나 ‘인생’이라는 그림의 퍼즐조각을 채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패치워크처럼 미결정적인 삶을 실현해가는 중에 있다. ‘매일매일’이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지 역사가 ‘매일매일’을 규정하는 게 아닌 것이다.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삶을 동경하는 동안 내가 놓쳤던 것이 바로 이 매일매일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마음을 빼앗겼던, 그들의 독특한 색깔은 사실 그들이 살아낸 ‘매일매일’과 더불어 형성된 것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삶’이나 ‘자유로운 삶’이란 그 매일매일들이 구성해내는 선율에 다름 아닌 것이다.


‘베짱이의 역습’ 연재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각종 환상들과 마주해왔다. 우정, 사랑, 여행, 지식 …. 내가 정말로 온갖 것들에 대해 장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러한 환상들이 일상을 한없이 하찮은 것으로 폄하해 왔다는 것도. 내 일상을 한없이 권태롭게 만든 건 결국 나의 환상이었구나.




나처럼, 패터슨도 니체도 똑같이 ‘매일매일’을, ‘특별한’ 삶이 아니라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니체와 패터슨, 그리고 내가 구성하는 ‘매일매일의 역사’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똑같이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나는 니체와 패터슨에게서 어떤 ‘권태’나 ‘결핍’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니체는 분명 병과 고독 속에 살았지만, 그의 삶을 떠올릴 때 외로웠겠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다. 패터슨은 보잘 것 없는 일과를 되풀이하지만 지루해보이지도 삶에 찌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권태와 결핍을 허용하지 않는 어떤 뜨거움이 있다.


니체는 묻는다. 매일매일의 역사가 “무수히 많은 사소한 비겁과 나태의 산물”인지, “용기와 창조적 이성의 산물”인지. 비겁과 나태의 산물이 되게 하지 않으려면 그저 열심히 살면 되는 걸까?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너무나 알아서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가.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취직하고 열심히 일하고, 동시에 열심히 놀고 열심히 소비하고 열심히 연애까지 한다. 그런데 어쩐지 이러한 ‘열심히’에서는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가 똑같이 ‘열심’으로 동일한 것을 갈망하기 때문일 거다. ‘그럴 듯한’ 삶을 위한 조건들을 충족시킴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긍정을 주워섬기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반응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이고 강박적으로 ‘노오력’한다. 주어진 가치들에 의존하여 어떻게든 낙오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이것이야말로 사실은 ‘능동성’의 외피를 쓴 비겁과 나태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니체와 패터슨도 ‘열심히’ 살았다. 나는 아픈 니체보다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없을 거라고, 직장인 패터슨보다 더 열심히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런데 그들의 ‘열심히’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니체는 자신이 들이마시는 공기, 매일 먹는 음식, 신체상태,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잠시 머문 도시 … 간단히 말해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자신만의 느낌을 만들어냈다. 니체의 ‘열심히’는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순간도 삶을 ‘주어진 것’이나 ‘당연한 것’으로서 흘려보내지 않는 태도였다. 패터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과를 되풀이한다. 매일 정해진 코스를 운전하는 것은 얼마나 지겨운 일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이 권태로워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 공간들을 매번 다르게 감각했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온갖 이벤트들로 가득한 나날들이 몇 줄의 일기로 요약되는 반면, 패터슨의 단조로운 일과는 그가 쓰는 시와 더불어 변주된다.


“용기와 창조적 이성의 산물”인 매일매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가 나를 찾아오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거나 방구석에 처박혀 낯선 세계를 꿈꾸는 일과는 무관하다. 창조적 이성이란 매번 마주치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변이해낼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내가 니체와 패터슨에게서 느낀 ‘뜨거움’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니체와 패터슨은 매번의 마주침 속에서 ‘변이’하는 역량을 통해, 즉 몸과 정신의 고집스러운 습관을 벗어나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매일매일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패터슨은 지금껏 자신이 써온 모든 시가 담긴 공책이 갈가리 물어 뜯겨도 잠시 동요될 뿐 다시 ‘빈 노트’에 시를 쓰기 시작한다. 니체는 차라리 죽는 게 편할 듯한 고통 속에서도 병을 저주하는 대신 병과 함께 사유한다. 이들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 이 ‘항상성’에 있었다. 어떤 파도가 와도 그 파도를 ‘탈’ 수 있는 유연함. 쉽게 절망하거나 희망하지 않는, 가볍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칭찬이나 비난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유동적 중심성. 그들은매일매일을 ‘빈 노트’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천재성, 영감, 행운 같은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텅 빈 여백’으로부터. 그 비어 있는 충만함으로부터, ‘매일매일’의 새로움으로부터.


니체는 말한다. “즉흥적인 삶”이란 실은 “가장 참을 수 없는 … 시베리아 유형(流刑)”(니체, 《즐거운 학문》 295절)에 다름 아니라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즉흥적 삶이 유형과 다를 바 없었다니! 따지고 보면,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유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어린아이나 죄수의 삶과 다름없는 것이다. 파도를 타기는커녕 매번의 조류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마는, 무능력한 삶. 내가 바라마지 않던 ‘자유로운 삶’이라는 환상은 이토록 초라한 것이었구나.



삶-공부를 위하여


나는 되지도 않게 어른스러운 척하며, 삶이란 본래 무의미한 것이라고 여겼다. 매일 세끼를 먹어야 하고 시간이 되면 자야 하고 온갖 욕구들을 해결해야 하는 지겹고 귀찮은 일과의 반복, 그게 사는 거라고. 그런데 사실 삶이 그토록 권태롭고 무의미해보였던 것은 내가 끊임없이 의미를 찾고, 무언가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삶, 충만한 삶, 얽매인 데 없는 삶. 나는 그것이 ‘완전한’ 삶이라고 생각했고, 그 환상은 ‘예술’로 수렴되었다. 내 관념 속에서 예술은 먹고 싸고 자는 일상과는 동 떨어진 신비로운 세계였다. 그런 환상 속에서 일상을 멸시하며 하루하루를 권태롭게 흘려 보냈던 것 같다.


"발로 쓰다.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은 아니다. 발도 항상 글 쓰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한다. 내 발은 확고하고 자유롭고 용감하게 들판을, 종이 위를 달린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농담, 간계 그리고 복수”〉 52절, 책세상)


니체는 발로 글을 쓴다고 했다. 손으로, 머리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발로. 니체의 철학은 그가 두 발로 걸어가는 이 세계 안의 것들, 즉 그가 만난 사람, 그가 걸었던 길, 그가 먹은 음식과 마신 공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떠나서는 그의 철학도 없다. 패터슨도 마찬가지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 바깥에서 영감을 구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겪은 매일매일이 그의 시를 이루는 전부다. 예술과 철학은 결국 누군가가 시도하고 실패하고 느끼고 좌절하는 일상의 산물이다. 일상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경험에 고유한 리듬과 양식(樣式)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철학인 것이다.




나는 비겁과 나태로 삶을 가득 채우고 싶지 않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부와 글쓰기를 또 하나의 환상으로 구축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공부란 욕망을 바꾸는 일이라거나 다른 삶을 시도하고 실험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매번의 세미나와 글쓰기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며 점차 그것들에 소홀해져갔다. 다시, 비겁과 나태. 이게 내 권태로움의 실체였다.


니체로부터 배운다. 사소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삶에는 어떤 의미나 가치, 섭리도 주어져 있지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의 어떤 순간도 사소하지 않다. 삶을 비하하거나, 삶을 정당화하는 공부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 자체인 공부를 하고 싶다.



글 _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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