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천재, 초인적으로 배우는 자들

천재, 초인적으로 배우는 자들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나는 호날두보다 메시가 좋다. 호날두가 초인적인 신체능력과 기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느낌이라면, 메시는 필드를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도 경기 전체를 손바닥 안에 놓고 노는 느낌이다. 메시는 플레이메이커인 동시에 스트라이커이고, 가장 창의적인 패스를 하는 선수이면서 골 결정력이 제일 높은 선수이기도 하다. 메시의 플레이를 보노라면, 그는 눈앞의 ‘적’들과 싸운다기보다는 효율적으로 공을 골대에 가져가기 위해서 동료와 적, 경기장을 모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시의 골 영상을 한 번 찾아서 보라. (호날두와 달리) ‘우겨 넣는다’는 느낌이 드는 골은 하나도 없다. 메시는 다른 선수들과 같은 ‘축구’를 하고 있지 않다. 다른 선수들이 상대팀을 꺾으려고 악을 쓰는 동안 메시는 경기 전체의 흐름 위에서 춤을 춘다.




나는 천재들이 좋다. 메시 같은 ‘타고난’ 천재들. 음악으로 치면 비틀즈가 그렇다. 이를 악물고 악조건을 극복해서 뜻을 이루는 짠내나는 성공스토리에는 별로 감화되지 않는다. 타고난 천재가 자신의 재능을 향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훨씬 즐겁다. 메시에게는 ‘비장함’이 없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전 훈련하는 것, 플레이하는 것, 그리고 승리하는 것을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죠."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런 천재들 중 하나였으면’ 하고 망상하기도 한다. 내가 메시의 축구재능이나 폴 매카트니의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런 재능은 내게 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빠르게 단념한다. 그래,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조용히 살다 가는 거지.


나는 감히 ‘천재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메시나 매카트니 같은 천재들은 평범한 나와는 종(種)이 다르다. 그러니 그들처럼 되고자 꿈꾸는 것은 허망하다. 헛된 망상을 품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자. 그런데 이는 사실 ‘긍정’이 아니라 체념 내지는 무시에 가깝다. 그렇게 될 수 없으면 그만이지 뭐…… 그러면서 나 자신이 ‘천재’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재능 있는 인간이라는 수세적(守勢的)인 허영심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해본다. 이런 나의 허영심을 보호하려, 천재는 ‘되는’ 게 아니라고, ‘타고나는’ 거라고 집요하게 되뇌었던 것은 아닌지. 쟤들은 나와 ‘종’이 달라!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162절)


니체는 천재 예찬의 핵심이 우리 범인들의 찌질한 허영심과 자기애에 있다고 보았다. 재능을 신격화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되어간 과정’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이나 그에게 ‘계시처럼’ 찾아온 듯한 영감만을 강조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들을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로 만들어야 자신의 사소한 비겁과 나태가 모두 정당화되니까. 나도 니체가 비판한 천재 숭배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천재를 은밀히 꿈꾸면서도 그들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로 간주했다. 도무지 그들처럼은 될 수 없을 거라는 이유로 지금 내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폄하했다. ‘천재’에 대한 환상과 ‘범인’이라는 자기규정. 이는 겸손도 현명함도 뭣도 아니다. 내 뒤틀린 허영심과 게으름이 만들어낸 자기도피의 수단이었을 뿐.



‘될 놈은 된다’ : 쿨하지 못한 냉소주의


19세기 말, 니체는 신의 자리에 ‘천재’를 올려 놓은 인간들을 비판했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에게서 “은총의 빛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재능과 영감만을 보려고 했다. 그들이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면서. 니체가 보기에 당대의 천재 예찬은 위대해지려는 의지를 상실한, 더 없이 ‘미적지근한’ 자들의 예찬이었다. 미지근한 물에 몸 담그기 좋아하는, 자기 안에 안주하려는 자들. 이들은 천재를 신성시하면서 그들과 자기 자신 사이에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수립하고, 그로부터 약자적 평온을 구성했다. 그렇게 천재를 우상화함으로써 무리 속으로 도피했다.


21세기 한국. 우리 시대에 예찬 받는 ‘천재’가 있기는 한가? 아, ‘천재’ 대신 ‘될놈될’이라는 말이 있다. ‘될 놈은 된다’는 뜻이다. 될 놈은 정해져 있고, 단 그 될 놈은 내가 아니라는 것. ‘노오력’ 하면 성공한다는 낡은 신화에 대한 패배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안티테제. 우리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들에게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이나 ‘은총과도 같은 영감’을 발견하지 않는다. 대신에 ‘훌륭한 백그라운드’나 ‘빼어난 외모’ 같은 우월한 초기조건들을 발견한다. 뛰어난 예술가나 운동선수가 나타나면 그들의 ‘우월한 유전자(남다른 집안내력)’나 ‘특별한 가정교육’ 따위가 가장 먼저 가십의 소재가 된다. 그들이 ‘될 놈’이었음을 입증하는 지표들을 발견하고 우리는 안심하는 것이다. ‘그래, 저들은 출발점부터가 달랐어. 역시 될 놈은 정해져 있어.’ 재능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넘사’인 조건에 대한 체념 섞인 인정.




‘될 놈은 된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단념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원한이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될 놈’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바꿀 수 없는 현실임을 굳게 믿는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 따위는 이제 공허한 슬로건일 뿐이다. 그렇지만 ‘될 놈’들을, 그리고 내가 될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저히 ‘쿨하게’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단지 부모를 잘 만났을 뿐’이라는 식으로 그들을 깎아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될 놈은 된다’라는 냉소에는 사실 ‘될 놈들’에 대한 무력한 증오심이 담겨 있다. ‘어차피 우승은 송민호’라는 식의, 비열하게 상대의 힘을 무력화하는 비난. 21세기 대한민국은 ‘될 놈’들을 질투하고 증오하는, ‘안 될 놈’들의 세상이다. 더 이상 모두의 경탄을 자아내는 천재는 없고, 불공평한세상과 ‘가진 것 없는’ 자기 자신에 화가 난 루저들만이 넘쳐난다.


희한하다. 히어로무비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고, 아이돌 팬덤문화는 사회현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영웅’, ‘천재’, ‘우상(아이돌)’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될 놈’들에 대한 증오와 질시가 만연해 있다.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더 이상 ‘천재’를 믿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의 민중들처럼 천재들에게서 ‘신적인’ 무엇을 발견하지 않는다. 대신에 능력 있는 자들이 ‘소유한’ 것들에 우리의 정념과 환상을 투사한다. 그의 배경, 외모, 일상 …… 그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질 수 있다면! 그런 조건만 주어진다면 나라고 너만 못할쏘냐! 그런 점에서 《아이언맨》과 《어벤져스》를 만든 마블 스튜디오의 히어로무비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는다. 마블은 인류의 운명을 홀로 짊어진 메시아(슈퍼맨)나 ‘정의란 무엇인가?’ 따위의 실존적 문제로 고뇌하는 반영웅(배트맨)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쿨’하고 유쾌한, 우리가 쉽게 이입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캐릭터들을 제공한다. 그들이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자들과 함께 싸우는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그들이 소유한 것들에 우리의 환상을 투사할 뿐이다. 초능력, 재산, 닳지 않는 자신감…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것들.


19세기 민중들이 예찬한 천재와 21세기의 우리가 시기하는 ‘될 놈’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천재는 없다. 우리는 ‘신적인 존재’로서의 천재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에 평온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우리는 천재의 자리에 ‘될 놈’을 세웠다. 신적인 재능 대신에 훌륭한 백그라운드를 지닌 ‘금수저’들을.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경탄하거나 경외감을 느끼는 대신 입을 삐죽거리며 그들을 질투한다. ‘네가 특별한 건 네가 가진 것들 때문이야’라는 약간의 경멸을 섞어서. 그리고 될 놈들에 대한 질투 섞인 선망은 이내 냉소와 패배감, 자기비하로 되돌려진다. 기이한 숙명론이다. 천재란 ‘타고나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있던 나, ‘타고난 천재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나. 그런 나 역시 내 나름의 방식으로 ‘될놈될’ 담론을 반복 재생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좀 우습기도 하다. ‘될놈될’을 외치는 사람들은 종종 사회구조적 문제를 들먹여가며 짐짓 진지한 얼굴로 현실을 진단한다. ‘양극화’니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면서. 그런데 왜 그 모든 말들에서는 반동적인 힘만 느껴지는 걸까? 원한, 냉소, 채념, 자기비하만이 감지되는 걸까? 어른스러운 척해봤자, 결국 문제는 게으름이다. 숙명론과 게으름은 늘 짝지어 다닌다. ‘될 놈’이 되고자 노력하자니 허들이 너무 높아 보이고, 그렇다고 ‘될 놈/ 안 될 놈’의 구도를 깨고 새로운 가치를 입법하기에는 ‘될 놈’의 삶에 스스로 투사한 환상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될놈될’ 담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러기도 저러기도 싫은 자들이 만들어낸 옹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애 같은 투정에 다름 아니다. 악취가 난다.



아, 메시...!


니체는 ‘천재’란 없다고 말한다. 천재성에 덧씌워진 모든 환상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을, 생성중인 것이 아니라 완성된 것만을 보려는 자들의 무지와 나태의 산물이다. 천재들의 비범한 작품, 남다른 성과, 위대한 업적으로부터 출발해서 거기에 걸맞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그들로부터 발견하려드는 것이다. 분명 비범한 사람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비범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도, 그가 가지고 태어난 우월한 초기조건도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천재란, “자신의 사고를 한 방향으로 활용하거나 모든 것을 소재로 이용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적인 삶을 진지하게 관찰하며 여기저기에서 모범과 자극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자기의 수단으로 짜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162절, 책세상)이다. 천재가 우리와 다른 것은 그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열정과 관심을 지녔기 때문이다. 천재는 우리가 온갖 곳에 쏟는 관심과 에너지를 자신의 일에 온전히 투자한다. 메시에게서 느껴지는 비범한 아우라의 정체도 바로 이 점에 있는 게 아닐까? (호날두나 네이마르와 달리) 그에게서는 별다른 ‘야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이 말한 그대로, 훈련하고 플레이하고 승리하는 것 밖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축구가 노동이자 유희이고 삶 자체인. 그에게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안에서 온전히 만족을 향유하는 사람 특유의 천진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 메시!


요컨대, 천재와 범인을 가르는 것은 바로 삶의 태도다. 사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난다. 한두 시즌 정도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선수들은 많다. 그들과 메시를 구분해주는 것은 ‘꾸준함’이다. 꾸준하다는 것은 권태를 모른다는 것아다. 재능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고 시도한다는 것. 데뷔 초 작고 빠르고 센스 있는 드리블러였던 메시는 피지컬을 갖춘 골게터로 변신했고, 또 신체능력이 저하되고 있는 요즘에는 간결한 드리블과 창의적인 패스능력을 갖춘 플레이메이커로 변신하고 있다.




천재는 단순히 ‘주어진 것’을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는 자는 권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천재는 주어진 것 안에서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라, 주어진 관점과 싸우고 주어진 방식을 거부하면서 자기만의 방식대로 실패하는 자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 다수적 코드와 싸우는 자. 그런 의미에서 천재란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하고, 자신이 습득하고 있는 주어진 가치나 관점을 가볍게 여기고, 예측하지 못한 자기 자신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자, 주어진 것을 넘어가는 자다. 니체적 천재는 슈퍼맨(superman)이 아니라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자기를 극복하는 자다.


나는 천재를 늘 상대적인 구분 속에서만 생각했다. 나보다 글을 잘 쓰고 공부를 잘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저편에 있다고. 그런데 이러한 나눔의 방식에는 나보다 못한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허영심이 작동하고 있었다. 내가 범인인 것은 이런 방식으로밖에는 나의 힘에 대한 긍정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재들의 고귀함과 숭고함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있지 않다. 그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이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니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의 경쟁 속에서가 아니다. 배우고 훈련하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기쁨이다.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보라. 그는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아킬레우스와의 전투를 회피하지 않는다. 헥토르에게 있어 자신이 아킬레우스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헥토르는 오로지 헥토르의 방식으로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량, 자신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 그런 점에서 아킬레우스가 천재라면, 헥토르 또한 천재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천재성은 그들이 역량을 펼치는 모습에서 보여주는 ‘고귀함’으로 드러난다. 범인(凡人)이 범인인 것은 지금 자신의 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나 자신을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고귀하도다, 배우는 자들이여


“배움.―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연구를 보았고, 자신에게서는 자연적인 본성을 보았다. 그리고 라파엘로에게서는 배움을, 자신에게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았다. 그러나 위대하지만 옹졸한 자[미켈란젤로]에게 전적으로 경의를 표하며 말하는데, 그것은 옹졸한 견해다. 도대체 천부적인 재능이란 우리의 선조 혹은 훨씬 더 이전의 단계들에서 배움, 경험, 연습, 동화, 섭취의 더욱 오래된 부분을 가리키는 것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또한 배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재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배우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며 단지 선한 의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배울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예술가의 경우에는 시기심, 혹은 낯선 것을 느낄 때 곧 자신의 가시를 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우려는 자세 대신 방어 자세를 취하게 하는 자존심이 그러한 배움에 저항한다. 라파엘로는 괴테와 마찬가지로 시기심도 자존심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위대한 학습자였으며, 선조들의 역사의 체에 의해 깨끗하게 걸러진 저 광맥의 단순한 착취자가 아니었다. 배우는 자로서 라파엘로는 그의 위대한 경쟁자가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 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동화시키는 동안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가장 고귀한 도둑이라 할 수 있는 라파엘로는 매일 그러한 자연적인 본성 중 일부를 가져갔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540절, 책세상)


니체에 따르면, ‘천부적인 재능’과 ‘배움’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한 미켈란젤로의 견해는 옹졸하다. ‘재능’이란 선행된 배움, 경험, 연습, 동화, 섭취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능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잘난 척하는 것만큼이나 옹졸한 짓이다. 재능이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힘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생산되고 펼쳐지는 현행적인 역량이다. 달리 말해, 배움이란 끊임없이 재능을 구성해가는 과정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낯선 힘들을 능동적으로 자기화하는 일이다. 비유컨대, 배움이란 광맥을 파헤쳐가며 원석을 골라내고 다듬는 지난(至難)한 과정인 것이지, 누군가가 잘 다듬어놓은 보석을 착취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위대한 학습자’는 고난을 마다 않으며, 지난한 시간을 기꺼이 견딘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학습자’는 시기심과 자존심이 없는 자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타인과 비교하거나 ‘나’라는 규정에 얽매여 자신의 영토를 고수하는 대신, 매일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훔쳐냄으로써 자신을 자연 자체로 만들어나간다.


결국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배움의 역량’이다. ‘될놈될’이라는 진부한 명제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는 모든 곳에서 ‘주어진 것’만을 재발견하면서 배움의 기회, 즉 변신의 기회를 걷어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늘 나 자신을 중간 정도에 위치시키기를 좋아했다. ‘이 정도면 봐줄만 하다’는 수동적 긍정을 되풀이하면서. 그러나 이는 단지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나를 고수하겠다는 오만과 무능력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메시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겸허함 -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고귀한 겸허’는 완성된 자기 자신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 담담한 열정이 빚어낸 조형물이 아닐까. 그는 뻔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서 매번 새롭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축구를 잘 하는 자에서 축구를 사는 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아, 나도 메시처럼 글을 쓸 수 있을까. 그처럼 화려하게가 아니라 그와 같이 겸허하게.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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