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마루야마 겐지,『소설가의 각오』 - 작품보다 재미있는, 작품의 뒷편

마루야마 겐지,『소설가의 각오』 

- 작품보다 재미있는, 작품의 뒷편



고백하건대, 나는 '소설'보다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빠져나온다. '이야기' 속에서 나왔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이 조금 난감하다. 어쩐지 끌려나온 것 같기도 하고, 이야기가 끝나버린 것이 너무 아쉽기도 하며, 어떤 때는 이 이야기가 끝이 나긴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이야기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거나, 아예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 그래서 소설 한 작품을 읽고 다음번 작품을 읽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반면에 작가들의 에세이는 그렇지가 않다. 몇 편이라도 계속해서 읽을 수 있다. 이건 마치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어제 만나고, 오늘 만나고, 내일 또 만나고 그렇게 계속 만나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요즘 글이 잘 안 써져'랄지, '내가 어쩌다가 소설가가 되었냐고?'랄지, '글을 쓸 때마다 그만 둬버리고 싶어'랄지,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친구가 하나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소설이 끝났을 때 느껴지는 그런 '난감함' 같은 것도 없다. 그저 약간 '아쉽다'랄까. 아쉬워서 견디기가 힘들면 그 '친구'의 작품을 찾아서 읽으면 된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도 그런 책이다. 1968년부터 1991년까지 쓴 산문들을 (골라) 모은 산문집이다. 데뷔하게 된 사연부터, 유명한 작가가 된 후에 쓴 글들까지, 그가 어떻게 작업하고,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시시콜콜한 온갖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러나 초고를 쓸 때는 여전히 작은 사이즈의 원고지와 볼펜을 사용하고 있다. 멋진 원고지에 멋진 만년필로 쓰면 내용마저 멋지게 느껴져, 불필요한 문장을 손질할 결심이 서지 않아 곤란하다.

- 118쪽


마루야마 겐지의 초고는 작고 볼품없는 원고지에 볼펜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만년필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었다면 만년필 수집 여행이나 다니면서 인생을 보내는 건데" 같은 망상으로 자주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는 몹시 뜨끔한 말이다. 그렇지만, 잠시 '뜨끔' 하면 그만이다. 나에겐 '문학에의 열정'보다, '만년필에의 열정'이 크니까. 여하튼,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듣는 것은 매혹적인다. 작품에는 드러나지 않는 '작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기분이랄까. 생각해 보건대, 작품을 자주 읽고 감상하는 사람일수록 저쪽(작품 자체)보다 이쪽(작품의 비밀)에 관심이 많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감상자'는 '창작자'를 지향하는 법이니까. '창작자'를 지향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에세이를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한번 써볼까'하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나도 한번 써볼까' 하는 그 마음을 품고 실제로 빈종이 앞에 앉아 '창작'을 한다고 해보자. 정말 멋진 일이다. '창작'이야말로 '독자'가 갈 수 있는 '극한'이다. 이 극한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 지점에서 '독자'로서의 '나'가 어떤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에 있다.


『소설가의 각오』를 읽게 된다면 또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마루야마 겐지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인데,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가 타고난 기질이랄지, 성품이랄지 그런 것이 참 부러웠다. '옛날 사람'인데다가, 대책없는 마초이며, 꼬장꼬장한 것으로는 일본 제일을 다툴 법한 성격이지만, 매사에 '떳떳'함을 잃지 않고, 일단 몸으로 부딪히고, 결과의 성패에 두려움이 없는 그의 일관된 태도들은 대부분 나에게 결여되어 있는 요소들이었다. 놀라운 점은 그렇게 굵고 거친 느낌을 주는 성품과 함께 작가로서의 '섬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생애에는 어떻게 하더라도 그런 인간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테지만, 다음 생애에 굳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소설가란 얼마만큼 개인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의해 승부가 결정됩니다. 그것도 고독을 사랑한다든가, 고독에 굴복한다든가 그런 형태가 아닙니다. 고독 그 자체를 직시하고, 그것과 맞붙어 거기에서 튀어오르는 불꽃으로 써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강인한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는 문학의 광맥을 파낼 수 없죠. 일거리가 없으면 먹고살기가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소설가로서는 아주 당연한 고독에 시달리는 짜증스러움, 자신없음, 그런저런 원인으로 서로 떼를 짓고는 네 소설이 좋으냐 내 소설이 좋으냐 깐죽거려 봐야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런 일로 무슨 단련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개성과 파워를 상실하는 반문학적 행위지요.

- 297쪽


그의 '작가관'이랄까, 그리고 동시에 '인생관'이랄까, 그런 것이다. 독자의 끝에서 경계를 넘어서고 싶다. 경계 밖의 '고독' 속에서도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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