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호학(好學), 멈출 수 없는 배움

호학(好學), 멈출 수 없는 배움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의 학생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는가?”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사람이 배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고 같은 잘못을 거듭 범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가 없으니 배움을 좋아한다는 자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 「옹야(雍也)」편 2장


=글자풀이=

=관련주석=


요즘 배움을 다르게 말하면 ‘스펙 쌓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펙 쌓기는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스펙 쌓기’로서의 배움은 남들과의 비교를 전제로 하는 레이스다. 때문에 아무리 많이 스펙을 쌓아도 항상 나보다 더 높은 스펙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래서 배우면 배울수록 앎이 확장되고 자유로워지기보다는 자신의 열등감을 확인하게 되면서 불안이 증폭하게 된다.


유가에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끊임없는 과정으로서의 배움을 말한다. 그리고 배움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달아 완성된 인격에 이른 사람을 성인이라 한다. 이때 그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는 태도를 두 글자로 요약한다면 호학(好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학(博學)이 무분별한 잡지식을 섭렵하는 게 아니라 확장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배움인 것처럼, 호학(好學)은 단순히 호기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을 즐기는 태도다. 그래선지 공자는 자기만큼 충실(忠)하거나 신의(信)가 있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好學)은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만큼 호학은 드물고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 공자가 호학자로 인정한 유일한 제자가 안회다. 공자는 그가 죽어서 이제는 호학한다는 자를 들어본 적 없다지 않았는가. 대체 호학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말을 아꼈던 걸까?


공자는 안회의 호학을 불천노(不遷怒)와 불이과(不貳過)로 요약한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한 번 화가 나면 쉽게 삭이지 못할 뿐 아니라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화풀이를 한다. 이처럼 화를 옮기는 건 감정을 실체화해서 소유하기 때문이다. 즉, 감정이 금방 사라지고말 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 역시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한번 화에 지배당하면, 평소에는 웃고 넘겼을 장난들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고, 상대방의 호의도 조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고수하는 건 내가 이토록 화가 났음을 알아달라는 자의식의 발현이다.


주희에 따르면, 감정이란 외물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감정은 본디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 이러저러한 조건 속에서 나오는 일시적 작용이다. 우린 이걸 알지 못하고 ‘내가 슬프다’, ‘내가 화났다’와 같은 식으로 감정을 실체화한다. 때문에 감정이 발생하면 여지없이 거기에 휩쓸리고 만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감정을 외물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외물과 끊임없는 영향관계에 놓여있는 이상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가 문제 삼는 건 감정 자체가 아니라 “정서들을 제어하고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에티카》 4부 서문)으로, 그는 이러한 상태를 ‘예속’이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감정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에 예속당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감정이 발생하는 조건을 명확하게 알고 그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사유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윤리’다.


이런 맥락에서 안회의 불천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회 역시 화를 낸다. 그럼에도 안회는 감정이 외물에 응해 발생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화를 비롯한 어떤 감정들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며 평정심을 유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회는 조금이라도 잘못의 여지가 있으면 바로 그것을 고쳤다(不貳過)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는지를 알아차리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습관에 이끌려 잘못을 반복하기 일쑤다. 예를 들면, 난 항상 늦게 자고 어중간한 아침에 일어나서 피곤해 한다. 이런 내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고치려고 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걸 고치기 위해서는 너무 늦지 않게 자야 하는데, 당장 나에겐 그 시간에 하는 딴 짓들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정말 늦게 자는 것이 내 생활패턴을 망치고 결과적으로 내 삶을 망가트리는 습관이라는 걸 안다면 왜 계속 늦게 자겠는가? 이는 반복된 습관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태도일 뿐이다. 그렇다면 불천노와 불이과란 항상 마음을 단속하고, 습관대로 살지 않도록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을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안회의 불천노, 불이과의 태도가 숨막히게 느껴진다. 아니,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 말로는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고, 반성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어도, 실제로 그걸 어떻게 실천한단 말인가? 당장 화가 나면 혈기에 지배당하고 마는 것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습관을 고치고 마음을 수양한다는 건 그만큼의 결단과 각오를 필요로 한다. 이미 난 감정에 예속되고 습관대로 사는 데 익숙해져버렸다. 이걸 바꾼다는 건 익숙해진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내는 것과 다름없을 터다. 그러니 이를 실천한 안회의 불천노와 불이과는, 정이천의 말대로 극기(克己)의 학문이었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린 언제까지나 자신의 습관에, 감정에 예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감내하는 것보다 더 숨막히고 힘겨운 일이 아닐까?


다시, ‘호학’이란 무엇인가? 그건 곧 자유로워지기 위한 이 과정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발심’이 아닐까? 배움을 통해 타성(惰性)에 얽매인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리 배움의 과정이 지난하더라도 쉬이 그만둘 수 없으리라.


글_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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