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얼마나 벌’ 것인가? 아니! ‘어떻게 쓸’ 것인가?

‘얼마나 벌’ 것인가? 아니! ‘어떻게 쓸’ 것인가?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 寧固


공자가 말했다. “사치하는 사람은 겸손하지 않고, 절약하는 사람은 고루하다. 겸손하지 않은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 「술이(述而)」편 35장


= 글자 풀이 =

= 관련 주석 =

‘탕진잼’. 탕진과 재미가 합쳐진 말로, 요즘 청년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이다. YOLO족(You Only Live Once : ‘인생은 한 번뿐이다’)이란 말도 있다. 그럴 듯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모두 소비를 통해 현실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들이다. 고달픈 현실 같은 것과 거리가 있는 나도 ‘탕진잼’의 맛을 좀 안다. 그러나 소비가 주는 해소감은 소비하는 바로 그 순간뿐이다. 충동에 이끌려 산 물건들이 비좁은 공간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자괴감과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많이 사는 것도 아니고 만원 안팎의 돈으로‘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뭐 그리 나쁜 건가? 그나마 이러한 쇼핑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소박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언컨대, 난 한번도 내가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는 사치와 검소를 아예 다르게 사유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신분제사회였다. 사람들은 각각의 신분에 맞게 해야 할 행동양식들이 있었고, 신분에 합당한 분수(分數)를 지키는 게 중요했다. 분수에 맞는 정도(定度)를 넘어갈 때를 사치하다고 하고, 미치지 못할 때를 검소하다고 한다. 가령, 「선진」편 10장에는 안회의 장례식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안회의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 것이 좋을까? 공자가 그렇게나 애지중지하던 제자였으니 장례식이라도 성대하게 치를 법하다. 그러나 공자는 안회의 생전 신분과 부에 맞게 간소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공자가 생각하는 예(禮)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아꼈다고 하더라도 분에 넘치게 후한 장례를 치르는 것은 예에 맞는 게 아니다. 그건 정도에서 벗어난 것, 사치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는 미덕이다. 소비하기 위해 벌고,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 당당함 앞에 할 말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 ‘분수에 맞게 산다’는 건 뭘까?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얼마나 벌고 얼마나 쓸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지만, 공자의 말씀은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까 사치와 검소는 단순히 얼마를 벌고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 내가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내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마음의 차원에서 본다면, 사치함은 스스로를 과시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주위를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명품, 고급 레스토랑 등 온갖 것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치장한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려 자신들의 일상을 전시하고, 그런 과시적 삶을 통해 타인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가 하면, 검소함이란 관계 속에서 마음을 전부 내지 않는 것, 즉 자신의 소유에 애착을 갖는 것이다. 상위층만 산다는 고급 아파트에 살던 한 친구는 ‘절약’을 프라이드로 여겼지만, 사실 그 친구에게서 느껴진 건 검소함이 아니라 인색함이었다. 타인이 베푸는 건 당연한 듯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베풀지 않는 부자라니. 공자의 말씀대로 사치한 사람들은 오만하고, 검소한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다(固陋).



나는 어떠한가? 다이소, 편의점, 마트 등에서 소소하게나마 소비하는 즐거움을 누리던 건 사치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나는 ‘돈이 없는’ 내가 그런 ‘소소한’ 소비를 통해 만족을 누려온 것이 ‘검소함’의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사치다. 그리고 내가 ‘검소’라는 말로 정당화한 것은 많은 경우 타인에 대한 인색함과 융통성 없음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검소함은 매우 수동적인 태도였다. 차를 사고 전셋집을 얻는 친구들은 사치스럽다고 비난하고, 그에 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단칸방에서 살아가는 난 검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자에 따르면, 사치함과 검소함은 둘 다 중도(中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고루한 편이 차라리 낫다고 했다. 그 편이 남을 하대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예에서 덜 벗어난다는 얘기다. 현재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보면, 검소하게 사는 것이 그나마 소비에 덜 의존하는 것이고, 그래서 지금처럼 ‘소비=존재’인 시대에는 고루한 편이 그나마 더 주체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펑펑 쓰는 것이나 내가 돈을 아껴 쓰는 것이나 ‘돈을 쓸 줄 모른다’는 점에서, 즉 ‘돈’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동안 나는 사람들이 사치하는 걸 볼 때마다 고생하지 않고 자랐거나 개념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닌 척을 하려 했어도 내 욕망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풍요로운 소비’를 통해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토 진사이는 이 구절에 대한 주석으로 “인(仁)이 무르익고 의(義)가 정밀해지면 부유하건 가난하건 간에 어떻게 행동해도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부유함이나 가난함이 아니라 외물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 「술이」편 15장)”고 했던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처한 조건이 어떻든 간에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 사치에 대한 욕망도, 검소함에 대한 정당화도 없이, 지금의 관계 속에서 기쁘게 받고 기쁘게 줄 수 있는 능력. ‘소유의 쾌락’을 얻기보다는 ‘그 즐거움’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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