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운명을 긍정하라 : 소수자의 철학(2)

운명을 긍정하라 : 소수자의 철학(2)

 

 

1. 안명(安命) :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라!

 

왕태에게 사람들이 몰려온 이유를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나가는 자세. 모든 삶의 폭풍을 견딜 수 있는 유연함 그 고요함. 이 고요함은 다른 사람을 불러들인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의 삶 자체가 타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비추어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배울 수 있게 해주는 경지인 것이다. 비운 채 가서, 채워서 돌아오게 해 주는 건, 삶에 대한 의연함이다.

 



공자는 노나라 애공에게 애태타를 사랑하게 만든 근본은 애태타의 외형이 아니라 외형을 움직이는 것에 있었다고 말해준다. 이것이 바로 재능이 온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애태타는 재능이 온전했기 때문에 크게 좋은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큰 공적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공자는 '재능이 온전한 상태'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삶과 죽음, 빈곤과 부귀, 현명과 어리석음, 헐뜯음과 기림,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런 것은 일의 변화[事之變]이며 운명의 흐름[命之行]이다. 이런 것들이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마음속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즐거움을 잃지 않고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경지, 이 경지가 바로 재능이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살면서 사고로 외발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양생주에 나오는 우사가 그렇다. 공문헌이 오랜만에 우사를 만났는데, 우사의 한쪽 발이 없어졌다. 공문헌은 “하늘이 한 일이오, 인간이 한 일이오?”라고 묻는다. 자연적 사고인지, 아니면 인위적인 사고인지를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해 우사는 답한다. “하늘이 나를 낳을 때 외발이 되게 했소. 사람의 모양은 본래 두 발을 갖추는 것. 이로 보아도 외발은 하늘이 한 일이지 사람이 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소.” ‘전신(全身)’을 중시하는 장자의 주장에 비추어 본다면 외발이 된 것은 분명 양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물론 장자는 몸을 보존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겠지만, 그렇다고 삶에 치명적인 사태들에 눈감으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회의 가치를 거부하고 다르게 살다 외발이 되었다면, 외발의 상태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외발임을 긍정해야 한다. 이것이 외발인 자들의 양생이다. 우사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외발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일어난 결과다. 그러니 그놈의 사회 혹은 조직 때문이야, 아니면 그 인간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우사는 분명 형벌을 받아 외발이 되었을 텐데도 사고사처럼 생각한다. 아니 사고사라도 원망하기 십상일 텐데 하늘의 일이라고 말한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죽기를 각오하고 일을 벌였음에도 죽지 않고 살 수가 있고, 살기를 도모했음에도 죽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결과는 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결과는 운명이다. 운명은 어쩔 수 없음(不得已, 自然:저절로 그러함/스스로 그러함)이요, 목적으로서의 필연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필연이다. 그래서 우사는 외발을 원망하지 않는다. 외발임을 수긍한다. 외발인 상태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양생이다.

 

 

삶과 죽음, 빈곤과 부귀,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와 같은 일들은 인간들이 맞닥뜨리는 객관적 사태들이다. 이 객관적 사태들은 '일의 변화와 명의 작용'이라 말해지는 그야말로 ‘운명’에 속하는 것들이다. 운명은 인간이, 아니 존재들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우주 전체의 인과요 섭리다. "운명은 우리가 원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서 우리에게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다. 번개에 맞아 죽는 것이 운명이 아니라 번개의 물체적 운동, 그 사람의 신체적 변화 등 그 운동을 지배하는 인과가 운명이다." (이정우, 『삶․죽음․운명』, 거름) 존재들의 우발적 부딪침 그 자체가 운명이다. 무수한 원인들의 부딪침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결과가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흔히 운명을 거론할 때는 우리의 희망과 욕망을 좌절시키는 사건들, 하늘의 섭리 혹은 천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에 맞닥뜨렸을 때이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나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터졌을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등과 같은 불운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운명 운운한다.

 

그러나 장자가 말하는 운명은 우리 앞에 불쑥 솟아오르는 어찌할 수 없는 사태들 모두이다. 피할 수 없이 솟아오르는 사건들이 존재들의 운명이다. 이 운명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애태타와 같은 소수자들은 '운명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자가 공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운명을 긍정하고, 이 운명에 주저앉지 않는 자들이 뿜어내는 불굴의 기운이다. 이는 운명에 편안[安命]한 상태를 말한다. 운명을 긍정한다는 것은 운명에 무조건 대결하여 패하거나, 운명을 피하거나[거부하거나], 운명에 무조건 복종하다 쓰러지는 사태가 아니다. 장자는 어떤 운명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운명에 편안하며 담담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이되 이 운명을 결핍이나 모자람으로 평가하거나 승인하지 않는 자가 진정 신인이요, 지인이요, 성인이다.

 

세상의 주류적인 기준에 편승하면 우리는 운명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의 잣대를 버리면 운명을 탓할 필요가 없다. 운명은 어쩔 수 없이 존재에게 솟아오른 사건이다. 사건이라는 하나의 단일성은 우주의 흐름 전체로 볼 때 한 매듭일 뿐이다. 그러니 운명은 잘잘못이 없다. (운명은 선악, 시비, 유무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는 하나다. 만물은 똑같다. 그래서 도추(道樞)로써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운명은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또한 누구에게나 운명은 불완전하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완벽한 운명을 타고나거나, 원하는 운명으로 삶을 바꾸지 못한다. 사태가 이렇다면 한탄과 원망과 저주는 무의미하다. (스토아학파의 2대조인 클레안토스는 권투선수로 청빈하게 99살까지 살다, 99살에 굶어 죽었다. 자살로 운명을 앞당겼다)

 

외발을 긍정하고 편안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는 외발을 비정상이라 보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자유로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애태타는 자기 얼굴을 편안하게 여기는 순간 세상의 추남이라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들은 자신의 형체에서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자유롭다. 이들은 운명을 떳떳하게 받아들이고 운명에 다가간 자들이다. 만약 두 발이기를 바라고, 미남이 되기를 꿈꾼다면 이들은 세상의 속박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을 긍정하자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따라가지 않고, 주류의 욕망을 따르지 않게 된다. 세상의 가치에 초연해지자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게 된다. 존재의 특이성을 긍정하는 순간 소수자로서 기죽지 않고 자신의 소수성을 지키며 다르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생사에 태연하다는 것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나와 맞지 않는 삶의 어떤 조건에도 맞서 싸울 수 있다. 자연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삶의 조건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운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다음엔 운명에 맞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세상이 쳐놓은 그물망(한계 지대) 안에서 살지 않고 그 그물망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다른 삶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2. 운명의 차별에 저항하고, 운명에 맞게 삶을 조직하라!

 

신도가(申徒嘉)는 발 하나가 잘린 사람인데, 정나라의 자산과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삼았다. 한 스승 아래서 공부하는데도 자산은 대신이라 높은 체하며 신도가를 업신여긴다. 자산은 『논어』에도 거명되는 정나라의 유명한 재상이다. 자산은 신도가와 한자리에 앉기를 거부하고, 함께 나가기를 거부한다. 신도가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자산의 잘못을 지적한다. "선생님의 문하에 본래 대신이라는 따위가 있었던가? 자네는 대신이라는 직위를 좋아해서 남을 깔보는 모양일세. 이런 말이 있지. 거울이 밝은 것은 먼지가 앉지 않아서고, 앉으면 흐려진다. 오랫동안 현인과 함께 있으면 잘못이 없어진다고 하네. 지금 자네가 소중히 여길 것은 선생님의 도일 텐데 아직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잘못이 아닌가?" 자산이 말했다. "자네는 이미 그런 꼴인데도 아직 요 임금보다 훌륭해지려고 하고 있군. 자네의 덕을 생각해 보고 스스로 반성할 수가 없겠는가?" 신도가가 대답했다. "스스로 잘못을 변명하며 발 잘린 것이 부당하다고 뇌까리는 자는 많아도, 그 잘못을 변명 않고 발이 온전한 것이 부당하다고 하는 자는 적다. 어쩔 수가 없음을 알고, 그러한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 운명을 따르는 것은 덕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활 잘 쏘는 명인)의 사정거리 안에서 놀고 있다면 한가운데는 화살이 명중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명중하지 않는다면 운이다. 세상들 사람 중에는 그 두 발이 온전하다고 해서 내 온전하지 못한 발을 비웃는 자가 많다. 나도 발끈 노하지만 선생님께 가면 깡그리 잊고 평상시로 돌아온다. 선생님이 훌륭한 덕으로 나를 씻어 주셨는지 모르겠다. 나는 선생님과 19년 동안 교유해왔지만 한 번도 내가 외발이란 것을 인식한 적이 없었다. 지금 자네와 나는 정신적으로 사귀고 있을 텐데 내게서 외형적인 것을 찾다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자산은 조심스레 낯빛을 고치고 말했다. "자네 이제 그만해 주게." (「덕충부(德充符)」, 『장자』)

 



신도가는 자산의 차별에 맞서 싸운다. 한 스승 아래의 도반에겐 신분적인 구별도, 외형적 차이도, 형벌의 유무도 무의미하다. 신도가는 이 신념을 밀고 나가, 정자산의 무지를 깨뜨린다. 신도가는 스승 백혼무인과 함께 했던 19년 동안 외발이라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배움에는 차별화가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지적 평등, 배움의 평등은 모든 차

별을 넘어설 수 있는 지반이다. 자산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산을 가르치는 용기. 공자에게 배움을 청하러 갔던 외발의 숙산무지. 숙산무지는 "죄를 짓고 이 꼴이 되어 지금 와봤자 이미 늦었소"라고 말하는 공자의 경솔한 처사에 위축되지 않고, 도리어 공자에게 항변하며 공자를 깨우쳐 준다. 소수자의 삶이 결핍이나 결함이 아님을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고는 소수자를 결함으로 여기는 모든 사회 조건과 싸운다. 운명을 긍정하고 운명을 원망하지 않도록 삶의 조건들을 개척하는 투쟁 정신, 이것이 소수자 되기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한이 아니라 원한을 넘어 내 안의 소수성을 긍정하고 현실화하는 활동들이다. "모든 깨우침은 깨뜨림에서 온다. 통념이 깨지는 그 자리에서 사유는 일어나고 그 자리에서 삶의 투쟁은 시작된다." (고병권, 추방과 탈주)

 

『장자』에서 호명한 소수자들은 자신들을 비정상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들의 다름을 운명으로 긍정하며, 다름을 차별화하고 주변화하는 세력들의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이들은 세상의 시선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용감한 전사들이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존재들이다. 이들은 편안한 일상을 가로막는 장애물들과 용기 있게 싸워나갔다. 내 몸이 장애가 아니라, 내 몸을 장애로 인식하게 하는 문턱, 계단, 속도가 장애다. 그 장애를 제거하면 된다. 장애인들의 탈시설 운동도 이런 사유에서 나왔다. 외형이 달라도 따로 또 함께 살 수 있다. 시설에서 보호받고 사는 일은 존재의 다름을 장애로 보는 통념 때문이다. 이런 연민은 정상과 비정상을 견고하게 만든다. 시설이 장애를 고착화한다. 내 몸이 장애가 아니라 시설의 보호 속에서 살라고 명령하는 제도가 장애다. 탈시설 움직임은 불완전하면 불완전한 채로 홀로 서겠다는 소수자들의 운동이다. (고병권, 『부커진 R:소수성의 정치학』 1호 참조) 부하로 살지 마라, 명령에 따르지 마라.

 

내 안의 소수성과 타자의 소수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진정 해방된 세계다. 한 소수자의 자유가 오직 다른 소수자의 동등한 자유에 의해서만 제한받는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다. (이반 일리히, 『성장을 멈춰라』 참조, 미토) 소수성에 대한 긍정은 편견에 갇혀있는 세상을 해방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다른 존재들의 그 다름을 긍정하고 그 다름이 발현될 수 있는 터전을 함께 마련해야 세상은 '별천지'가 된다.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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