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양생(養生), 자연의 결대로 살기

양생(養生), 자연의 결대로 살기

 

 

1.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회의

 

자연을 거스르고 자연을 자신에게 맞추는 것, 이를 인위라고 한다. 장자가 보기에 바로 이 인위가 자연의 산물들을 부자연스러운 죽음으로 몰아간다. 특히나 인간들은 자신을 최고라 간주하며 혹은 자신의 자리를 완성된 상태라 여기며 다른 존재들에게 '인간적 은혜'를 베푼다고 착각한다. 물론 타자들에게 들씌워진 이 은혜는 너무나 인간적인 '굴레'에 불과하다.

 

무엇을 하늘의 자연[天]이라 하고, 무엇을 사람의 작위[人]라 합니까? 북해약이 대답했다. "소와 말에게 각기 네 개의 발이 있는 것, 이것이 하늘의 자연이오. 말 머리에 고삐를 달고 쇠코에 구멍을 뚫는 일, 이것이 사람의 작위요. 그래서 '인위로 자연을 파멸시키지 말라. 고의로 천성을 망치지 말라. 덕을 명성 때문에 희생시키지 말라'"고 하오.

─추수

 

말은 발굽이 있어 서리나 눈을 밟을 수 있고, 털이 있어 바람이나 추위를 막을 수 있다. 마음대로 풀을 뜯고 마시며 깡충거리고 뛰논다. 이것이 말의 본성이다. 높은 건물과 화려한 궁전이 있대도 말에게는 소용이 없다. 백락에 이르러 “내가 좋은 말을 만들겠다.” 하여 말의 털을 지지고 깎으며 발굽을 깎아내고 인두를 대고 하여, 굴레와 다리 줄로 묶어 늘여놓고 구유와 마판을 만들어 나란히 모아둔다. 이래서 말의 2, 3할은 죽는다. 먹이를 주지 않고 물도 안 준 채 달음박질시키고 명령대로 잘 움직이게 만들며, 앞에는 재갈과 가슴 받기가 달리고 뒤에는 채찍의 위협이 따른다. 이래서야 말의 반수는 죽고 만다. 도공은 “나는 흙 만지는 솜씨가 뛰어나다. 둥근 것을 만들면 그림쇠에 착 들어맞고 네모진 것을 만들면 곱자에 꼭 들어맞는다.”고 한다. 목수는 “나는 나무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굽은 것을 만들면 그림쇠에 착 들어맞고, 곧은 것을 만들면 먹줄에 꼭 맞는다.”고 한다. 흙이나 나무의 본성이 어찌 그러한 척도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대대로 이어가며 백락은 말을 잘 다룬다. 도공이나 목수는 흙과 나무를 잘 다룬다고 칭찬한다. 이 또한 천하를 다스리는 자의 잘못이다.

─마제


인간적인 유용성으로 자연물을 다루는 것, 틀림없는 인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발로 서 있는 소와 말은 자연이다. 소의 코를 뚫고, 말머리에 고삐를 매는 건 인위이다. 인간사회에서 쓰기 유용하게 자연을 다스리고 변용하는 모든 도구와 기술이 인위이다. 일반적으로 백락이 없었다면 명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칭송하지만, 장자가 판단하기에 백락은 말의 본성을 해쳐 말의 개체 수를 줄인 장본인이다. 명마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나쁜 인간이다.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나 흙을 잘 다루는 도공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입장에선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문명적인 행위지만 그러나 자연의 입장에선 너무나 반자연적인, 반생명적인 행위다.

 

백락: 중국 주(周)나라 때 사람으로 말(馬)의 감정을 잘하였음


 

『장자』에서 인위는 자연물에 대한 반자연적인 혹은 문명적인 사태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눈 밝은 것을 기뻐한다면 아름다운 색채에 혹하게 되고, 귀 밝은 것을 기뻐한다면 음악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며[聰明], 인을 기뻐한다면 덕에 정신이 어지럽혀지고, 의를 기뻐한다면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 예를 기뻐한다면 기술을 조장하게 되고, 음악을 기뻐한다면 지나친 탐닉을 북돋우게 되며, 성인을 기뻐한다면 속된 학문을 권장하게 되고, 지혜를 기뻐한다면 시비의 상처를 벌려놓게 된다.

─재유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깨어 있다고 자만하여 아는 체를 하며 군주라고 우러러 받들고 소치는 목동이라고 천대하는 따위 차별을 하오. 옹졸한 짓이오. 

─제물론

 

견오가 광접여를 만났을 때 광접여가 물었다. “전에 중시는 네게 무슨 말을 했느냐?” 견오가 대답했다. “제게 말하기를 '사람들의 군주 된 자가 자기 생각대로 갖가지 규범이나 법도를 지어낸다면,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따르고 교화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광접여는 말했다. “그건 거짓 덕이다. 그따위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바다를 걸어서 건너고 강을 손으로 파헤치며 모기에게 산을 지게 하는 짓이다.”

─응제왕



 

장자에겐 사회와 문화를 구축하는 근간들이 모두 인위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멈추게 한다는 국가, 사회를 질서화하고 안정시키는 신분제도,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인의예지의 도덕, 공평성을 위해 고안된 도량형과 형벌제도, 인간들의 문화적 고양을 위한 음악, 색채 등 모든 것이 인위이다. 장자는 이러한 인위적인 문화와 제도가 인간적일지는 몰라도 인간에게조차 분명히 반생명적이며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본다. 너무나 인간적인 문화와 제도들은 오히려 인간이라는 주체의 생명의지를 무력화시킨다. 장자는 문화와 제도라는 인위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성인을 근절하고 지혜를 내버리면 큰 도둑은 없어진다. 옥을 내던지고 구슬을 깨버리면 좀도둑은 생기지 않는다. 어음을 태우고 도장을 부숴 버리면 백성은 소박해진다. 되를 쪼개버리고 저울을 분질러 버리면 백성은 다투지 않는다. 온 천하의 성법을 깡그리 없애면 백성은 비로소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육률을 흩뜨려 놓고 피리나 거문고를 태워 없애며 사광의 귀를 막아버리면 비로소 온 세상 사람이 듣는 힘을 안에 간직하게 된다. 무늬를 없애고 이주의 눈을 갖풀로 붙여버리면 비로소 온 세상 사람이 보는 눈을 안에 지니게 된다. 그림쇠나 먹줄을 부숴버리고 그림쇠와 곱자를 내버리며 공수의 손가락을 분지르면 비로소 온 세상 사람이 재주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뛰어난 재주는 서툴게 보인다.'라고 하는 것이다.

─거협

 

인위적 시스템들은 인간들에게 매우 유용한 질서와 혜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천하를 어지럽히고 사람의 본래적 재능(타고난 신체적, 감각적, 정신적 능력)을 퇴화시킨다. 그런 까닭에 장자는 우리에게 인위적인 제도, 문화에 대한 의타심을 버리기를 권유한다. 인간은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다. 아니 존재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잠재 태를 간직하고 있다. 인간사회를 규율하고 조정하는 제도들, 인간 사회를 공평하게 만들어주는 법도들이 없어도, 이것을 버려도 인간은 타고난 본성 안에서 공명하며 살 수 있다. 인간사회는 저절로 화평해지고, 인간들은 보고 듣고 만드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한다. 장자는 그렇게 믿었다.

 

 

2. 양생 오직 양생!

 

그러나 따져보자. 인위적인 제도와 문화가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자보다는 동시대 맹자와 같은 유가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와 같은 유가들은 ‘사생취의(捨生取義)’하라고 말한다. 사람이 삶을 좋아하지만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여기서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의와 같은 도덕, 즉 인위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보편타당한 진리의 현현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인위 자체를 완전히 배격한 것일까? 장자는 계속해서 강조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이것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이 말에 의거한다면, 장자에게는 어떤 진리도 도덕도 생명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을 바꾸면,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진리를 수호할 필요는 없는 것이 된다. 이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다운 세상’에서 볼 때 굉장히 비겁하게 느껴질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생명을 우선으로 하는 사유가 정말 비겁한 것일까? 혹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장자는 진리, 도덕을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행위 그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자가 문제 삼는 바는 ‘사생취의’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이것을 절대 보편의 가치로 만들어놓고 모든 사람이 바로 이 명분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명분 때문에 죽어야 하는가? 명분보다는 자기 몸을 돌보는 게 우선이 아닌가?

 


모든 존재는 삶에의 의지를 갖는다. 사람이 어떤 가치를 만든 이유도 처음에는 삶에의 의지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어느덧 그 가치가 반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인 인위로 고착되는 순간, 다른 생명을 혹은 인간들끼리의 생명을 해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곧 인위적 가치들이 삶을 역습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장자는 삶이 우선이 아니라 인위적 가치가 우선인 전도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역습으로 이제 사람들은 생을 기르는 것을 잊어버리고 인위를 수호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장자는 “지금 같은 이 세상, 벌을 면하기 힘들구나”라고 외쳤다. 그렇지만 “오는 세상 기다릴 수 없고 간 세상을 되잡을 수는 없다.”(「인간세」)라는 자연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 오지 않은 미래나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존재는 지금 여기서 걷고 행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은 깃털처럼 가벼우나 들 줄을 모르고, 화는 땅처럼 무거우나 피할 줄을 모른다.”(인간세) 지금 당장 할 일은 ‘나’의 생명을 활발 발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이 가장 쉽고 절박한 일이다.

 

장자는 이 전도 망상의 세계 한가운데서 외친다. 오직 개체들의 생명, 그 외에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착하다는 일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 하지 마라.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保身),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全生),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養親),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盡年)” 장자는 세상의 가치이자 사람됨의 척도인 선악을 탈주하라고 말한다. 이는 선한 행위라는 명분에도, 악한 행위라는 이름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오직 생명의지를 거스르지 않는 행위를 할 뿐이다. 생명의지를 중시하는 세계에서는 선악 이분법이 작동할 수 없다.

 

“끝이 있는 삶으로 끝이 없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존재의 생은 한정적이다. 끝이 없는 생명은 없다. 그러니 자신의 생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개체들의 본성이자 책임이다. 그것 외에는 없다. 그런데 인간들은 온갖 존재들을 끝도 없는 지식으로 분별한다. 이 분별지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분할하고, 모든 것을 내 위주로만 한정하는 지식이다. 개체들의 삶을 생명의 소리가 아니라 분별지의 목소리에 복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별지는 위험하다. 진정한 지식이 아니다.

 

이른바 진지(眞知) 즉 진정한 지식은 생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생리학자나 의학도처럼 생명의 구체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연원, 생명의 근거를 이해하는 것이다. (왕보, 장자를 읽다, 바다출판사) 자연 전체에 대한 인식, 자연 전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인식, 즉 근원적 인식을 말한다. 생명의 근원을 통해 개체의 삶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에 대해 사유하면 자기와 타자, 자기와 환경, 인간과 동물 등 온갖 경계의 해체가 일어난다. 그래서 장자는 생명을 활발 발하게 하는 가치만을 가치로 여겼다.

 

 양생의 도란 생과 더불어 오는 것으로 지식을 기다리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성인은 생에 대해서 안배가 없고 취필(取必: 기필, 꼭 그래야 한다.)이 없고 요행이 없이 하늘에 맡겨 행하고 몸을 닦아서 기다리며 생의 자연을 순순히 따르지 조화공과 거슬리지 않는다.

─원굉도, 원중랑집5, 광장, 338쪽


글_길진숙(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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