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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소설 읽는 수경

제임스 설터, 『어젯밤』- 어제, 밤 우리에게도 일어난 일들

by 북드라망 2017. 7. 21.

제임스 설터, 『어젯밤』

- 어제, 밤 우리에게도 일어난 일들



제임스 설터의 소설집 『어젯밤』을 읽었다. 이 이름이 낯선 이들이 많겠지만 설터는 이미 해외에서는 최고의 문장을 쓰는 작가로 인정받는 80대의 노작가다. 국내에 소개된 건 『어젯밤』과 『가벼운 나날』 단 두 권뿐인데 듣기로는 그의 다른 작품도 현재 번역 중이라고 한다. 미국의 단편 소설가. 이 말만으로 떠오르는 몇몇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헤밍웨이, 카버, 존 치버와 같은 설터라는 이름을 그 계보 끝에 달아두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어젯밤』에 실린 열 편의 단편을 보건대 그는 군더더기가 될 만한 것들을 다 거둬내고 오직 핵심만을 보여주는 데 있어 발군의 실력을 지녔다. 이는 하드보일드의 대가로 이름을 떨친 헤밍웨이나 미니멀리스트로 손꼽히는 가버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설터는 간결함으로 승부하는 앞선 선배작가들과 달리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작가이기도 하다. 표제작 「어젯밤」을 보자.




어떤 기억은 갖고 가고 싶다고, 마리트는 생각했다. 월터를 만나기 전 어렸을 때의 기억, 이 집이 아니고 그녀의 어린 시절, 침대가 있던 원래 집. 그 오래 전 겨울 눈보라를 바라보던 층계참에 난 창문, 허리를 굽혀 굿나잇 키스를 하던 아버지, 램프의 불빛에 손목을 비추며 팔찌를 차던 엄마.

그 집뿐이었다. 나머지는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삶을 꼭 닮은 장황한 소설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 어느 날 아침 돌연 끝나버리는. 핏자국을 남기고.


이렇듯 짧은 문장들을 통해 선명한 이미지를 아로새기는 것이야말로 설터의 특장기 중 하나. 이에 마리트의 머릿속인 양 우리 눈앞으로 불빛 속에서 한 여인이 팔찌를 채우고 있는 흰 팔목이, 이튿날 아침의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 마룻바닥 위에 굳어 있는, 그녀의 삶을 닮은 마리트의 핏자국이 영사되는 것이다. 


어쨌든 그날 밤 절망과 고독감 속에서 마리트에게 주사 바늘을 찔러 넣은 월터는 (아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의 정부 수잔나와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마리트가, 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다음 날 아침 멀쩡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온다. 그녀는 어젯밤의 그 모든 과정을 다시 밟아야 한다는 데 절망하고 있다.

작품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난다.


그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수잔나는 방으로 가서 옷을 챙긴 후 현관으로 나갔다. 그게 수잔나와 월터의 마지막이었다. 그의 아내에게 들킨 그 순간으로, 그가 우겨서 그 후에도 두세 번 만나기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게 무엇이었든 두 사람이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냥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문장이야말로 설터와 카버, 존 치버가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들의 단편은 모두 무언가 중요한 것의 상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사건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그런 순간이 되면 우리가 미사여구로 포장해온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것들의 숨겨진 맨얼굴 하나가 드러난다. 그때의 서늘함을 독자가 감당하도록 내버려두고서 이야기는 그렇게 끝. 이게 내가 그들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어젯밤」에서 나는 한 방이 아니라 두 방을 맞았다. 처음으로 나를 강타한 것은 바로 위 대목. 이 작품의 마지막이 할애하는 이야기가 마리트가 아니라 월터와 수잔나의 돌이킬 수 없게 변한 관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현재 월터에게는 간밤에 자신이 찔러 넣은 주사바늘에 의해 마리트가 숨을 거둔 것, 그리고 사고(!)로 그녀가 다시 살아난 것보다는 갑자기 상실해버린 수잔나와의 관계가 더 중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 마리트가 계단을 밟고 내려왔을 때 그것이 죽음에 실패한 아내와 남편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현장을 목격한 아내와 허둥대는 '불륜남'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그래서 생경하고 또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젯밤 마리트는 거실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월터를 만나기 전의 어떤 기억이야말로 죽어서까지 간직하고픈 기억이며, 그 이후의 삶은 장황한 소설 같은 것에 불과했다고.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마리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이고, 또 월터에게 있어 그것은 수잔나라는 건데..., 아니 그럼 금슬 좋게 함께 산 저 오랜 시간은 그들에게 있어 무슨 의미인가? 애초에, 도대체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와 함께 시간들을 지나온다는 것이 개인에게 남기는 의미한 얼마만 한 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존재는 결국 현재 내 삶이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와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나?


앞선 선배작가들이 남성적 문체를 통해 모종의 진실을 보여주고자 한 반면 설터는 훨씬 섬세하고 우아한 표현법으로 이를 해냈다. 그는 우리 삶에 자리한 보기 싫은 면모를, 칼끝처럼 날카롭고 정교한 빛살로 비춰 보인다. 그런 설터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가 어딘가에서 말했던 것처럼 햇빛에 비추어 본 "잎맥"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보이지 않고 연약한, 어떤 핵심을, 하지만 그 진실을 두고 태연한 어조로 아름답다 칭송할 이가 몇이나 있을까? 이제 막 벌어진 환부에서 피 냄새가 솔솔 피어나길 한창인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더 기막힐 노릇은 이와 비슷한 일들이 실은 어젯밤 내게도 일어났었다는 사실이다.


글_수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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