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한강 『소년이 온다』 - 소년이 살았던 삶, 그리고...

한강 『소년이 온다』 

- 소년이 살았던 삶, 살았을 수도 있었을 삶



광주 이야기가 또 다시 소설로 나왔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그것이다. 신간 출간 소식에 처음에는 좀 시큰둥했었는데 그 이유는 더 이상 작가에게도 광주 이야기에도 큰 흥미나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다보니 책을 구입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그 책을 펼쳤다가 아주 혼이 났다. 자꾸 눈물이 났기 때문이다.


작품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저어기 80년 광주에서 살던 소년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서서히 다가오는 걸 경험하게 된다. 계엄령 당시 거리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던 소년, 그 후 도청의 다른 시민군 사이에서 지내기 시작한 소년, 그리고 잔혹했던 마지막 밤에 죽은 그 소년, 작가는 광주의 소년들이 살았던 짧은 삶을 조용한 어조로 들려주고, 또 소년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꿈꾼 미래-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광주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들이 살았을 삶을 그려 보인다. 그 삶은 지극히 평범하다. 평범해서 마음이 아리다.


교련복 칼라 속으로 들어온 선득한 빗물이 러닝셔츠를 적시고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혼의 눈물은 차갑구나. 팔뚝에, 등에 소름이 돋는다. 비가 안 들이치는 출잎문 앞 처마로 너는 뛰어 돌아온다. 도청 앞 나무들이 힘차게 빗발을 튕겨내고 있다. 계단 안쪽 끝에 쪼그려 앉아 너는 얼마 전 생물 시간을 생각한다. 볕이 나른하던 5교시에 식물의 호흡에 대해 배웠던 게 다른 세상의 일 같다. 나무들은 하루에 딱 한차례 숨 쉰다고 했다. 해가 뜨면 길게 길게 햇빛을 들이마셨다가, 해가 지면 길게 길게 이산화탄소를 내쉰다고 했다. 그토록 참을성 있게 긴 숨을 들이쉬는 나무들의 입과 코로, 저렇게 세찬 비가 퍼붓고 있다.

그 다른 세상이 계속 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 접속해 뉴스를 보기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나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권력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300명의 목숨보다 중할 수 있다는 걸 실제로 봐버려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 제일 많이 떠오른 건 그때 배 안에 있었던 소년소녀들. 마지막까지 조바심 속에서 기다리고 궁금해 했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고독했을 그 아이들 말이다. 그들이 살았던 삶, 때로는 신났고 때로는 지긋지긋했을 그 일상을, 그리고 일말의 의혹도 없이 그들이 그려보았을 앞날들 그들 대신 이제 내가 그려보곤 한다. 그러던 중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했고, 그 순간 나는 휘청거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중한 초기 몇 시간을 허비해버린 것도 모자라 민간잠수부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기 싫어 눈앞에서 배를 침몰시킨 군경이 아니라 청해진 해운이 이 모든 참극의 원흉으로 지목됐고, 대통령은 눈물 한 번 흘렸으니 제 할 일 다 했다 여기는지 해외로 다니기 바쁘고, 월드컵 시즌이 되자 사람들은 붉은 옷을 챙겨 입고서 노래 부르고 박수를 쳤으며, 발견되지 않은 열 구의 시신은 아직도 물 속 어딘가를 떠돈다. 그래서 나는 임형주가 고운 목소리로 부른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혐오한다. 나는 자유롭게 날고 있으니 이제 울지 말아라…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바람이 되었다… 그 위안과 따뜻함이 내게는 아주 나쁘게 여겨진다. 쓰디쓴 애도의 시간을 서둘러 건너뛰고 참사를 전 국민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이벤트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되었다는 식의 수사는 그야말로 정치인들이나 반길 법한 싸구려 중의 싸구려다!


이것이,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유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80년 광주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깨닫는다. 아울러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그런 유의 사건들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망각에 대한 저항이요 요약에 대한 의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남은 자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고, 생각하고 또생각해야 하며, 그래서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그 같은 생각이 작가로 하여금 ‘저기 소년이 온다’라고 쓰게 했을 것이다. 군인의 총에 맞아 순식간에 제 육신에서 빠져나온 소년의 혼이,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촛불처럼 파닥거리며, 지금 온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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