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하워드 진, 미국이여, 이곳은 정말 괜찮은 '국가'인가?


인간성 對 인간들 (2)

: 하워드 진과 뉴욕




뉴욕의 빨갱이, 혹은 휴머니스트


하워드 진. 그의 이름은 고향 뉴욕에서조차 불편하게 들린다. 진을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얼굴부터 찡그리고 본다. 그가 뉴욕 태생이라는 사실은 여기서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 탓이다. 바로 ‘빨갱이(!)’다.


네 전 아닙니다만....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난다. 이것이 1980년,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가 출판되자 쏟아진 비난이었다. 냉전 시기가 한창이던 당시, 민중(People)이라는 단어는 곧바로 공산주의의 노동 계급을 연상시켰다. 이 책은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침묵 당한 사료를 위해서 쓰였다고, 진이 아무리 주장해도 소용없었다. 참 진부한 에피소드다. 20세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실체 없는 죄명 아래 마녀 사냥 당했는가. 이 무지한 비방은 21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진은 2010년 타계하기 전까지 미국의 중동 개입을 비판하다가 또 욕을 먹었다. 테러 옹호자라고. (평생 욕을 먹어서 그런가, 편안히 장수하셨다^^.)


헌데, 이데올로기적 낙인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미국민중사』에 무조건 감정적으로 동조하더라도 똑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진은 출판 이후로 비판뿐만 아니라 ‘휴머니티의 수호자’ 혹은 ‘역사학계의 정의파’로 뜨겁게 추앙받기도 했다. 하지만 비판과 찬사는 한 끝 차이다. 양쪽 모두 책 제목의 ‘피플(People)’에 상응하는 동질적인 집단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로동자 인민’이냐, ‘휴머니티 대상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들(People):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은 주인공


이 두 집단은 『미국민중사』의 주인공도 아니고, 도덕적 정당성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책을 자세히 읽어보자. 망라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간들이 이 땅에 발을 딛었다. 인민, 민중, 군중. 사람, 인간. ‘피플(People)’을 어떤 뉘앙스로 번역하든, 이 가상의 보편 집단은 대답이 될 수 없다. 콜럼버스가 쿠바에 첫 발을 딛었던 1492년부터 오늘날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았던 인간들은 한 번도 동일한 다수 집단에 속한 적이 없었다.




진의 문제는 휴머니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그리는 휴머니티의 ‘잡다한’ 초상화가 흉하다는 것이다. 휴머니티(Humanity)는 그대로 번역하면 인간의 성질, 즉 인간성(人間性)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인간성은 탁월할 수도 있고, 추악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영원히 정의내릴 수 없는 성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아도취에 탁월한 우리 인간들은 어쨌거나 이 단어를 ‘아름답게’ 사용하고 싶어 한다. 인간성의 지표는 우월하다는 것, 또 이 지표는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성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학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자아도취의 폭력성을 고발했다. 우선, 그 누구도 ‘모든 인간’을 참된 차원에서 인식할 만큼 시야가 넓지 못하다. 그런 제한된 시선으로 인간성의 지표를 고정시키는 순간, 이 지표 밖에 서 있는 타인은 졸지에 ‘인간도 못한 존재’로 강등된다. 인류애는 인류증(憎)으로 타락하고 만다.


누구나 이 타락을 경험한다. 남미 우루과이 소설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Horacio Quiroga)의 「목 없는 닭(La Gallina Degollada)」이라는 단편 소설이 좋은 예시다. 사랑에 넘치는 한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육아에 대한 숭고한 사명을 믿었다. 그런데 줄줄이 낳은 사형제가 모두 부부의 기대에 못 미치는 “머저리(Idiot)”인 게 확인되자 사랑은 증오로 바뀐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태어난 막내딸만이 모든 사랑과 헌신을 독차지한다. 소설의 결말에서 이 부부의 위선은 처절하게 복수 당한다. 바보 사형제가 가정부가 닭 잡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때 마침 마당에 들어선 어린 여동생을 닭처럼 ‘잡고’ 만 것이다. 이 끔찍한 결말은 부모 사랑의 한계를 폭로한다. 머저리는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상(想) 앞에 배제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리하여, 사랑이 깊을수록 증오도 깊어갔음을.


진은 명분과 폭력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분열을 잘 알고 있었다. 뉴욕 토박이였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휴머니즘의 한계가 매 순간 시험 당한다. 이곳은 사람이 사람에 치이는 곳이다. 인구 구성도 너무나 다종다양해서 어떤 이데올로기나 미화된 휴머니즘으로도 타자의 불편한 존재감을 감출 수 없다. 뉴욕이 ‘다양성의 휴머니티’를 실현하는 도시라고? 뭐, 가끔은 그렇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호감은 어느 선을 넘는 즉시 강력한 적개심으로 뒤집힌다. 이 반전은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벌어진다. 내 마음 속 ‘휴머니티’ 주거단지에 살지 않는 ‘종류’의 사람들이, 지하철 칸에서 나를 앞뒤로 꽉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남미 아저씨의 땀 냄새, 개념 없이 크게 울려 퍼지는 인도 발라드, 차이니즈 포장 음식 냄새, 멱살 잡고 소리치는 흑인 아줌마와 백인 아줌마의 싸움……. 이방인이 야기하는 짜증 및 공포는 필요 이상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저 인간들’을 싸잡아 비하하고 싶은 욕망으로 결론난다. (“역시, XX인들이란!”) 뉴욕 콩나물 지하철은 매 아침마다 휴머니티를 시험한다. 다양성을 포용(해야)하는 민주국가를 찬양하는 그대여, 모던 도시의 뉴요커를 자칭하는 그대여. 당신은 정말 ‘괜찮은 인간’인가?




진은 이 질문을 그대로 확장시킨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라고 자칭하는 미국이여, 이곳은 정말 괜찮은 ‘국가’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민중사』의 주인공들은 아메리카의 위대한 서사시에서 항상 무시당해온 자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다운 휴머니티’에 일조할 만큼 숭고한 자들도 아니다. 이들의 정언 명령은 언제나 아메리카 땅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삶에서 일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이념도, 선악도 아니다. 그냥 삶 자체다. 삶의 방식이 엇갈릴 때마다 인간들은 상상을 뛰어넘도록 잔인해졌고, 어떤 상황에서는 우정 어린 연대를 형성했다. 진은 책 첫 장에서 “이런 갈등의 세계, 희생자와 가해자의 세계에서 알베르 카뮈의 표현처럼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이 할 일”[각주:1]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피해자의 고정된 실체를 설정하지 않았다. 미국 역사 내내,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자가 끔찍한 가해자로 뒤바뀌는 일이 벌어져 왔으니까. 그렇다면 휴머니티는 누구의 기억에, 누구의 이익에, 누구의 배고픔에 호응해야 하는가.



국가의 휴머니티는 이데올로기다


이런 유동적인 일상과 분리된 채, 휴머니티가 ‘보편 영역’으로 흠 없이 출현했다고 해보자. 답은 하나다. 국가 정책이 개입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물리적인 경계(국경)를 이용해 휴머니티를 구획하는 데 최초로 성공했다. 다수 평민을 위한다는 민주주의의 이념과 약간의 물질적 보상을 이용해서 ‘국민’이라는 명분을 탄생시킨 것이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아메리카! 그러나 사이드의 비판을 잊으면 안 된다. “누군가 인류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인류를 대변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인류가 희생되었기 때문”[각주:2]이다. 즉, 미국의 휴머니티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비미국인’ 앞에서 휴머니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와해된다. 사람들도 납득한다.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 보편적 기준을 따른 결과 아니겠는가.


여기가 바로 타락이 제도화되는 지점이자, ‘미국 역사’가 시작되는 장소다. 국가가 존재감을 갖기 위해서는 영토로서의 국가(State)뿐만 아니라 정체성으로서의 국가(Nation)도 필요하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두 번째 층위의 국가, 즉 민족주의(Nationalism)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통일된 이야기를 만들고 배포함으로써만 등장하는 “상상된 공동체”라고 정의했다[각주:3]. 국가가 공인한 역사 교과서는 그 완벽한 예시다. 역사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먼저 주인공이 필요하다. ‘태초에 이 땅에 인간적 가치를 세운 자들이 있었노라.’ 국가의 창시자들은 자연스럽게 휴머니티의 모델이 된다. 아메리카의 건국의 아버지, 즉 백인 남성이다. 그와 동시에 흑인, 여성, 빈민은 미국 내 ‘비미국인’이 된다. 이 배제는 정체성의 형식으로 포장되고, 무의식에 스며든다. 국가의 휴머니즘은 강조되면 될수록 투명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래서 진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나는 나의 견해를 이념의 시장에 내놓을 권리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각주:4]고 비꼰 것이다.)


진이 겨냥하는 타깃은 이 무색무취의 이데올로기다. 즉, 『미국민중사』는 휴머니티의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것은 ‘미국인’이 아니라 어쩌다 아메리카 대륙에 떨어진 잡다한 인간들의 생존기다. 너무 생생해서 비위가 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한’ 순간에, 국가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비로소 균열이 생긴다. 못생긴 진실들이 숨 쉴 구멍이 열린다. 이것은 뉴욕이 위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뉴욕은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도시다. 하지만 이곳에서 ‘앵글로 색슨 백인 남성’이 이 도시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멍청이는 없다. 최소한, 뉴욕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갑-을의 이분법을 넘어서


뚜껑을 열어보자. 미국을 아래에서부터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미국민중사』를 초지일관 꿰는 대명제는 이러하다. 미국은 착취의, 착취를 위한, 착취에 의한 국가다! 진에게 착취란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너무 자명한 현실이었다. 진 자신의 아버지가 그 산 증거였다. 공장 노동자, 웨이터, 창문닦이, 눈 청소부 등등, 몸을 혹사하며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브루클린 삼형제를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진의 가정사는 미국의 건국 초기부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반복되었다. 미국은 유럽의 불평등한 왕정제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유럽의 불평등한 사회 관계는 사라지는 대신 부가 분배되는 과정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귀족은 갑부가 되었고, 엘리트는 상인이나 정치가가 되었으며, 평인들은 쥐꼬리만한 하인 월급을 받았다. 노예와 인디언은 사람 취급도 못 받았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나름 부유했던 뉴욕조차 “18세기 중반 (...)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 빈민원에 400명이 모여살”[각주:5] 정도였다. 즉, 이 땅에는 시작부터 빈자와 부자가 있었다. 진은 한마디로 못 밖는다. “이 나라는 ‘자유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노예와 자유민, 하인과 주인, 소작인과 지주, 부자와 빈자로 태어난 것”[각주:6]이다. 단지 유럽과 달랐다고 해서 미국의 시작을 아름답게 그려서는 안 된다.


하워드 진의 아버지만해도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몸을 혹사시켰지만, 단 한번도 아들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그런데 착취의 대명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주된다. 맑스의 계급 투쟁 이론은 피지배자와 지배자를 극명하게 가른다. 그러나 『미국민중사』에서 이 분할선은 점점 다양하게 분기한다. 그리하여, 한 개인이 지배자인 동시에 피지배자가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동부에서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독립운동가가 서부에서는 인디언 학살자가 된다. 고용되기만 해도 감사해야 하는 최약자 이민자들은 동료의 임금 투쟁을 무화시키는 파업분쇄자가 된다. 인종차별 철폐를 지지했던 국회의원은 자기 속옷을 빨아주는 아내의 참정권에 대해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혁명을 부르짖던 노동조합원들은 미국이 아프리카 및 아시아 국가에서 착취한 부를 즐긴다. 그렇다. 이것을 갑과 을이 이분법으로 맞서는 형국이라고 볼 수 없다. 착취의 사슬은 사방팔방으로, ‘너’와 ‘나’ 사이에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


이제 문제가 복잡해진다. 더 이상 ‘악독한 부자‘의 착취에 맞서 싸우는 ‘빈자’가 옳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잘잘못을 어떻게 따져야 하는 것일까? 모두가 모두에게 죄의식의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 걸까, 야니면 세상은 원래 약육강식이라고 결론지어야 할까? 진은 둘 다 반기지 않는다.


내 말의 요점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가해자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향해 던져진 눈물과 분노는 현재를 위한 우리의 도덕적 에너지를 고갈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구분선이 항상 분명하지도 않다. 장기적으로 보면 압제자도 결국 희생자이다. 단기적으로는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는 단기로만 이루어져 왔다) 스스로가 자포자기하고 자신을 억누르는 문화에 오염된 희생자들이 다른 희생자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하워드 진, 유강은 역, 『미국 민중사 1』, 이후, 2010년, 33쪽


진이 제시하는 첫 번째 스텝은 시야를 “장기적으로” 넓히는 것이다. 선악이라는 이분법은 너나 할 것 없이 맹목의 영역으로 내몬다. ‘나는 피해자다, 고로 나의 요구는 옳다’는 자기정당화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늘 반쪽 짜리 진실이다. 피해자인 나는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다. 역사적 시력이란 이 착취의 사슬 위에서 자신의 좌표를 객관적으로 찾아내는 힘이다. 그래서 진이 역사 공부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전쟁을 끝내고 고향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후 발견한 것은 자부심이 아니었다. 남의 피가 묻은 자기 손이었다.




불안한 동거: 집주인, 이방인, 무명인


두 번째 스텝은 연대다. 진은 책 첫 장부터 대놓고 말한다. 이 복잡다단한 착취 구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연대 뿐이라고. “덧없이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힘을 모으며, 때로는 승리한 잠재력을 보여준 과거”[각주:7]가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잠재력을 잊으면 안 된다.




아, 참 낭만적인 대목이다. 진의 선한 심성이 오롯이 드러난다. 하지만 진의 진정성과 상관 없이 이 낭만이 ‘올드하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혁명과 연대를 연결시키는 사유는 20세기 중후반에 크게 유행했다. 그럴만도 했다. 때는 세계적으로 시민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진은 이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다. 1960년 대 미국 남부 흑인들이 민권 운동을 벌일 때 혼신의 힘을 다해 도왔고, 인종과 계급의 장벽을 뛰어넘어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상황이 변했다. 미국 내 시민운동은 거의 소멸되었다. ‘사회’는 제도적으로 더 진보했을지 모르겠으나, 개개인 사이에는 무관심과 무기력이 팽배했다.


이 허무한 반복은 『미국민중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분명히 뜨거운 연대의 순간들이 있었다. 인디언 사회에 섞여 ‘인디언’으로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백인들. 대지주를 향해 함께 분노를 표출했던 흑인 노예와 백인 빈민. 인종의 장벽을 가로질러 활활 타올랐던 성적인 이끌림. 언어와 민족의 장벽을 가로질러 미국 전역에 뿌리를 내렸던 노동 조합. 이들은 자신들을 배제하는 국가의 ‘휴머니티’에 힘을 합쳐서 항의했다.


헌데, 그 다음 순간 열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미국은 물질적으로 격동적으로 변하는 사회였다.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제1명제를 따르며 혁명보다 이 실질적인 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누군가 불의를 외치고 투쟁을 시작해도 “국가적인 관심은 새로운 드라마와 거짓말로 옮겨갔다.”[각주:8] 이 무관심은 국가가 사람들의 반발을 받아들여 제도를 ‘진보적으로’ 업그레이드 한 이후에 특히 극심해진다. 1950년대 할렘 르네상스가 일어날 무렵,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는 「할렘(Harlem)」이라는 시를 쓴다. 이 시는 영원히 유보당하는 흑인들의 꿈을 신랄한 문체로 전한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평등법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왜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한가?


유보된 꿈은 어떻게 될까?


햇볕 속 건포도처럼

말라 비틀어질까?

아니면 종기처럼 곪아 흘러내릴까?

썩은 고기처럼 악취가 날까?

아니면 끈끈한 단 것처럼

딱딱해져 설탕이 될까?

어쩌면 무거운 짐처럼 축 늘어지겠지


아니면 폭발해버릴까?


보통 미국 역사는 진보사관으로 이해된다. 처음에는 소수에게만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민중들의 투쟁을 통해 점점 평등과 자유와 권리의 사회로 나아갔다고. 그러나 이런 일직선 사고방식으로는 휴스턴의 시를 음미할 수 없다. 어째서 반동은 혁명의 그림자처럼 반드시 뒤쫓아 오는지, 왜 희망과 배신이 계절처럼 끝없이 반복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한다. 공식적으로 타자를 받아들인 사회는 ‘다양성의 휴머니티’를 실현시킨 게 아니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을 잘 대접하는 집주인의 마음가짐에 다름 아니다. 이 환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주체성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집주인은 이방인을 대접함으로써만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방인이 손님의 예를 따르지 않고 인하무인 격으로 군다면, 집주인은 자기 손님의 손님이 되고 만다. 그때 호의는 적의와 혐오로 바뀐다. 따라서 환대에는 아주 조심스러운 규칙이 필요하다. 일단 이방인은 집주인과 동일한 ‘언어’로 환대를 청해야 한다. 또, 자신이 누구인지 ‘신원’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주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집주인이나, 머무를 곳이 필요한 이방인이나, 이 까다로운 ‘환대 의식’을 멈출 수는 없다. 이렇게 둘 사이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다.


당연히 바로 이 '지위'까지 도달 할 수 없다.


집 앞 마당에 은밀한 동거자가 한 명 더 있다. 무명인이다. 무명인이란 집주인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자기 신분을 밝히지도 않아서 이름조차 없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환대받지 못하는 자다. 그는 휴머니티의 경계 밖에 있다. 그러나 분명 존재하기는 한다. 따라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방인은 아무리 ‘잘’ 대접받아도 집주인이 될 수 없고, 이방인이 ‘잘’ 대접받을수록 무명인은 더욱 가시권 바깥으로 극심하게 밀려나게 된다. 환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동거는 불안해진다!


미국의 역사는 이 역설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경우다. 연대는 혁명을 일으켰고, 혁명은 타자를 향한 환대로 이어졌다. 백인 남성 중심이었던 사회는 흑인, 황인, 여성, 빈자와 같은 ‘이방인’을 받아들였다. 인디언과 같은 ‘무명인’은 어쩔 수 없이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진실을 직시하자. 다양한 인간군이 휴머니티의 영역에 합류했다고 해도, 이 다양성 자체가 ‘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집주인은 집주인이고, 이방인은 이방인이다. (무명인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사회의 소수 약자들이 제도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해도, 보호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고 해도, 이 보호 제도는 그들을 영원히 ‘소수자 이방인’에 묶어놓는 환대의 규칙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보인가? 진보할수록 집주인, 이방인, 무명인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는 게 아닐까?



함께 살아가기—그 영원한 질문


자, 이것이 그토록 진보적이라는 미국의 한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이백 년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실험-삶은 이제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 걸까?


진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 진도 솔직히 몰랐으리라. 그는 사람들이 절망을 이겨내리라는 희망을 초지일관 간직했지만, 이 희망은 지적 결론이라기보다는 삶의 태도였다. 그의 『미국민중사』는 희망도 절망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땅에 존재했던 삶의 충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독자들이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내기를 내심 바라면서 말이다. 결국 진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스스로 고민하라고. 내가 사는 자리에서, 내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고민을 시작하라고.


이 고민을 치열하게 시작하고 싶다면 뉴욕에 오라. 뉴욕은 미국의 태곳적 모습을 아직도 간직한 장소다. 가장 근대화 된 도시임에도 그렇다. 결국 이 도시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다. 상식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상천외한 인간 군상이 뉴욕을 가장 특별한 도시로 만든다. 여기, 이 도시 한복판에 서 있으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낯설고 울퉁불퉁한 존재인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론과 환상을 모두 내려놓고, ‘집주인+이방인+무명인’라는 관념을 뛰어넘어, 개개인의 환원 불가능한 특이한 기운부터 먼저 느껴보는 것이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내려오면 한 가지 길은 보인다. 생명력이다. 생명은 뒤섞여야 산다. 이것은 호불호를 넘어선 진리다. 설령 싸우고 물어뜯더라도 그마저 생명을 유지시키는 자극이 된다. 그렇다면 뉴욕은 (미국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집안싸움(?)이 끊이질 않더라도 말이다. 함께 사는 게 쉽지는 않지는 않다. 하지만 함께 살 타자가 있는 이상 계속 질문할 수는 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이 절대적인 휴머니티에 대하여!


글_김해


  1. 하워드 진, 유강은 역, 『미국 민중사 1』, 이후, 2010년, 32쪽 [본문으로]
  2. 에드워드 사이드, 최영석 역, 『권력, 정치, 문화』, 마티, 2012,, 58쪽 [본문으로]
  3.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Verso, 2006, p.33, [본문으로]
  4. 재인용, 데이비스 D. 조이스, 『하워드 진』, 안종설 역, 열대림, 2006, 294쪽 [본문으로]
  5. 하워드 진, 유강은 역, 『미국 민중사 1』, 이후, 2010년, 102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103쪽 [본문으로]
  7. 같은 책, 33쪽 [본문으로]
  8. Martin Duberman, 『Howard Zinn: A Life on the Left』, The New Press, 2012, p.1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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