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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세계 타인들의 집합소, 브루클린에서 탄생한 휴머니티, 하워드 진

by 북드라망 2016. 2. 26.


인간성 對 인간들 (1)

: 하워드 진과 뉴욕




“뉴욕에서 무엇이 가장 재미있나요?” 뉴욕에서 손님을 맞을 때마다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재미’라는 것은 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내가 관광객으로서 누렸던 흥분은 단 몇 개월 만에 끝났다. 이제는 학교, 집, 사무실을 왕복하는 데 하루를 다 쓰는 생활인이 다 되었다. 생활인에게 관광지란 인파가 많이 몰리는 기피대상에 불과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나 타임스퀘어에서 빵 한 쪽을 얻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인파를 뚫고 거기까지 가나?




이 낙 없는 유학생에게도 끊임없이 활력을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 구경이다. 이렇게 말하면 돌아올 반응이란 뻔하다. 사람은 서울에도 차고 넘친다고, 고작 사람을 보려고 여기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지하철에 가보세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뉴욕 지하철은 극한의 공간이다. 이 도시에서 언더그라운드만큼 자극적인 곳은 없다. 일단, 너무 더럽다. 선로에 쌓인 쓰레기 때문에 화재가 난 횟수가 일 년에 100회를 웃돈다. 냄새는 또 어떤가. 하수구 냄새, 햄버거 냄새, 땀 냄새, 노숙자 냄새가 몽땅 섞여 있다. 기차 안팎으로는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공연하느라 귀가 따갑고, 쥐가 지나가면 새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게다가 정말로 삶의 극한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다. 노인이 라이터로 몸에 불을 붙인다던가, 흑인 노숙자와 백인 노숙자가 멱살 잡고 뒹굴 기도 한다. 가끔 찾아오는 평화로운 순간에도 이 긴장감은 옅어지기만 할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곳이 지하철이라면 그다지 놀랍지 않다.


뉴욕이 이런 모습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다. 어떤 미디어도 지하철을 뉴욕의 명물로 감히 대놓고 다루지 못한다. 그렇다. 이런 풍경은 부티 나는 월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너무 심난하다. 지하철은 뉴욕의 명성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돌연변이쯤으로 취급된다. 지하철은 상징적인 ‘언더그라운드’이기도 한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런 곳을 뉴욕의 명물이라고 추천하느냐고? 이 극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뉴욕의 명성과 지하철의 악명은 똑같은 지지대 위에 세워졌다. 바로 인간들이다. 뉴욕에는 참으로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다종다양이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체감해야 하는 영역이다. 말소리, 땀 냄새, 표정, 피부색, 패션 센스, 그 외 모든 것이 잡탕이 되어 익숙한 감각 영역을 침범한다는 뜻이다. 이 경험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누구도 이 감각의 파노라마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지하철이 통제 불능 상태인 까닭이다. 24시간 동안 온갖 종류의 타인이 부딪히는 공간이 어떻게 ‘평화’가 가능하겠는가.


'평화' 뿐입니까? '로멘스'도 없습니다. 그건 TV에나 있는거죠...



그런데 역설이 있다. 이 긴장 상태가 없다면 뉴욕은 뉴욕다움을 잃어버린다. 뉴욕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먹히는 까닭은 다양성(diversity) 때문이다. 지난 200년 동안 온갖 이민자와 유랑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면서 이 도시를 독특한 무국적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말인즉, 뉴욕이 글로벌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인 한 이곳은 필연적으로 더러워보일 수밖에 없다. 깔끔하게 포장된 곳에서는 이종(異種)이 서로 섞일 수 없다. 지하철은 말한다. 더러운 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뉴욕이라고.


뉴욕의 진정한 언더그라운드, 진정한 지지기반은 인간들이다. 월가 빌딩은 뉴욕을 잠깐 스치고 가는 관광객을 위한 랜드 마크일 뿐이다. 뉴욕 길바닥에서 시간을 죽여본 사람이라면 안다. 타인의 열기만큼 이 도시에서 강렬한 것은 없다.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이고, 제일 흥미로운 것도 사람이다. 뉴욕에 산다는 것은 콘크리트 빌딩 정글 이전에 이 기묘한 ‘인간 생태계’에 둘러싸이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감각적으로 터득한 이야기꾼이 있다. 하워드 진(Howard Zinn)이다. 하워드 진은 미국 내에서 극좌파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자니 무정부주의자니 하는 오명(?)도 자주 썼다. 그러나 진의 <미국 민중사>는 진보-보수라는 시시한 이분법으로 요약되기에는 너무나 빛이 난다. 그가 쓴 미국사는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에 이 땅에 살았던 인간 집단의 존재감을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때로는 더럽고 때로는 놀라운, 평범한 자들의 아메리카 생존기. 진이 책을 쓰면서 무슨 ‘의도’를 가졌다면 답은 하나 밖에 없다. 그가 뉴욕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Howard Zinn): 브루클린의 아들, 총을 얻다


진은 브루클린의 자식이었다. 브루클린은 뉴욕 시의 다섯 개 보로우(Borough) 중 하나다. 원래는 하나의 독립적인 도시였지만, 1898년에 행정 구역 상 뉴욕 시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같은 뉴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루클린 브릿지는 뉴욕의 두 얼굴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한 쪽은 월가를 위시하여 자본이 2세기 동안 포장해온 땅이다. 다른 한 쪽은 그 2세기 동안 뉴욕을 찾아 빈털터리로 온 이민자들을 흡수한 땅이다. 독일인, 영국인, 아일랜드인, 이탈리아인, 유대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중동인, 중국인, 그 어떤 이민자 물결이 밀려와도 “아메리카의 고향” 브루클린은 가장 만만한 집이 되어주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 브릿지.



진은 1922년에 동유럽 출신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당연히 브루클린이었다. 그러나 빈민촌이 자동적으로 그를 ‘좌파’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년 진은 군인이 되려고 했다. 때는 1940년 대였다. 세상은 전쟁 통이었고, 브루클린은 생존의 싸움터였다. 진의 가족은 이민자 1세대가 그러하듯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하다 “다쳐도 노동조합에 도움을 청할 수 없었는데, 조합비를 내면서 동시에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기 때문”[각주:1]이었다. 진은 책은 좋아했지만 학교는 싫어했다.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브루클린 해군 조선소에서 돈을 벌었고, 1943년에는 세계 이차 대전을 치르는 미 공군에 지원했다. 브루클린의 가난한 아들이 파시스트를 처벌하는 병사가 된 것이다.


<자니, 총을 얻다>라는 반전 소설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달튼 트럼보(Dalton Trumbo)가 1938년에 쓴 작품으로, 주인공 자니는 전쟁 통에 팔과 다리와 얼굴을 통째로 잃어버린다. 눈, 코, 귀, 입이 모두 날아가서 감각도 잃는다. 하지만 의식만큼은 생생히 살아 있다. 자니는 자살도 하지 못한 채 평생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야 한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고문 아닐까? 트럼보는 신랄하게 말한다.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적군이 아니라 인간 자체다.


진은 참전하기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진은 끝끝내 세계 이차 대전만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파시스트라는 적이 너무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진은 결국 징병 모집 포스터에 설득 당한다. 이 결정에는 ‘설마 내가 자니처럼 죽겠는가’라는 낙관도 한 몫 했으리라. 다행히 진은 부상 없이 제대했다. 그러나 청년 진이 끝내 깨닫지 못했던 것은, 자신이 ‘자니’가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진이 떨어뜨린 폭탄에 ‘자니’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훗날에야 진은 자신이 수행한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그의 상관이 사용하라고 했던 “젤리 가솔린”은 물로도 끌 수 없는 화염, 네이팜탄이었다. 항복하려고 했던 수천 명의 독일 군사와 천 명 이상의 일반인이 여기에 휩쓸려 죽었다. 임무의 목적은 단지 평화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최신 무기를 실험해보는 것이었다[각주:2]. 진실은 소설보다 더 끔찍했다.


영화화된 <자니, 총을 얻다>의 한 장면.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적군이 아니라 인간 자체다'



“양철통이 하나씩 지상에 떨어질 때마다 조그만 성냥불이 켜지는 듯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늘 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사를 통틀어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자신의 잔학 행위를 이렇게 합리화했을까.”

재인용, 데이비스 D. 조이스, <하워드 진>, 안종설 역, 열대림, 2006, 46쪽


시선이 전환되는 순간, 온 세상은 갑자기 ‘브루클린’이 된다. 폭탄이 떨어지는 자리마다 누군가 죽어나간다. 죽은 자를 악당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죄의식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은 잘 안다. 그 어떤 ‘타인’이든 특유의 생의 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꾸역꾸역 밀려들어왔던 곳, 날마다 서로 징그럽게 싸우고 또 어울렸던 곳이 바로 진의 고향 브루클린이다. 진이 삼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던 땅이라고 어찌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어느 낯선 자라고 해서 그 삶이 비하될 수 있을까?


진은 참전을 결심했던 스스로를 배신하고 말았다. 브루클린의 아들은 파시스트를 처단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아들과 딸을 죽였을 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진이 마주한 진실은 너무나 뉴욕답다. 뉴욕에서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가해자-피해자의 견고한 사슬은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수많은 종류의 사람만큼이나 수많은 분별과 차별이 작동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피해자’와 ‘가해자’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된다. 오늘 이민자로 차별받던 사람이 내일 새로운 이민자를 차별한다. “[사회에]약간 융화된 이민자 한 세대는 그 다음 세대를 향해 증오심을 가지고 반응하고, 이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긴 열차처럼 계속 이어지는”[각주:3]것이다. 이 패턴을 읽고 나면 폭력을 합리화하는 당위 따위는 우습게 보인다. 누가 누구에게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발자취는 이 깨달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평생을 비폭력 운동과 반전 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이 길이 시작되던 자리에서, 그는 가해자였다. 그가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것도, 제대 군인 원호법(GI Bill)의 혜택을 입고 대학원 박사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어느 날 누군가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은 이 사실을 평생 한 번도 잊지 않았다.



휴머니티가 태어나는 자리


전쟁은 국가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이것이 뉴욕에서 나고 자란 진이 한평생 인종차별반대 운동과 반전운동을 통과하면서 깨달은 진실이었다. 그가 전쟁에 대항하여 사람들에게 호소한 것은 보편적인 휴머니티였다. “세상 어떤 깃발도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그 수치를 덮을 만큼 크지 않다(There is no flag large enough to cover the shame of killing innocent people)[각주:4]는 명언이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휴머니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논증하지는 않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는 인간성(Humanity)이란 대체 무엇인 걸까?




가장 평범한 정의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관상 보이는 인종, 성별, 민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동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명쾌해서 좋다. 너도 나도 존엄하다고 하니 듣기에도 좋다. 하지만 문제는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이 명제가 실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뉴욕에서는 어불성설이다. 뉴욕은 휴머니티 운동이 가장 거세게 일어나는 곳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곳에서 사람들이 그런 ‘공동성’을 느끼는 경우가 가장 희박하다는 것이다. 옆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배타성은 매일 같이 일어난다. 이것은 백인중심주의 국가에서 시행하는 차별 정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각종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신체의 경직성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휴머니티를 주장하는 것도 사람들이고, 직접 해치는 것도 사람들이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남을 무시할 권리까지 주장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진다.


하워드 진이라고 이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휴머니티를 정의하는 대신, 시종일관 이렇게 말한다. 보편적인 휴머니티는 그 테두리가 고정되면 안 된다고. 기존의 고정관념이 고수하는 ‘인간성’을 깨뜨리는 방식으로만 드러나는 휴머니티가 필요하다고. 그가 바라보는 휴머니티는 그의 역사책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그의 뉴욕다운 통찰은 다음 편에서 그의 <미국민중사>와 함께 이야기하겠다.


글_김해


  1. Martin Duberman, , The New Press, 2012, p.5 [본문으로]
  2. 같은 책, p.15 [본문으로]
  3. Howard Zinn, “No Human Being Is Illegal,” , A Seven Stories Press First Edition, 2006, p.14 [본문으로]
  4. Howard Zinn, , “Terrorism Over Tripoli”, Seven Stories Press, 2011, p37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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