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뉴욕 : 도시와 지성

진정한 '세계문명화'를 위한 노력 : 뉴욕과 에드워드 사이드 (2)

by 북드라망 2016. 5. 27.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문화를 위하여 (2)

: 뉴욕과 에드워드 사이드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재인용,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2년, 445쪽


이 아포리즘을 읽으면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아쉬움 없이 고향을 등지는 방랑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선언하는 결연한 표정. 이 사람은 고향과 무슨 척이라도 지은 걸까? 아니다. 그는 지금 고향 땅이 아니라 고향이라는 표상이 제공하는 “감미로움”을 거절한다. 현재가 살기 팍팍하고 이해하기 힘들수록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고향은 익숙한 과거를 붙들어매는 정박소다. 사람들은 ‘그곳’에만 가면 과거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연명하여 하루하루를 버틴다. 여기에 대고 방랑자는 강력하게 선언한다. 그런 장소는 실재하지 않는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거짓 희망일 뿐이다!


 고향의 소멸, 다문화


방랑자는 책 『오리엔탈리즘』과 뉴욕 도시에서 모두 핵심 캐릭터다. 얼핏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중동에 대한 연구 서적이 이 첨단 모던 도시와 뭔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뉴욕과 『오리엔탈리즘』에는 거부할 수 없는 공통 벡터가 있다. 고향을 떠나고자 하는 방랑자의 욕망이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정신의 고향, 정신의 정박소가 있다. 바로 문화다.

뉴욕은 다문화의 도시라 불린다. 뉴욕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은 다들 깜짝 놀란다. 고향에 온 것처럼 너무 편안해서다. 뉴욕에는 어느 문화권이든 각자 나름대로 발전시킨 커뮤니티가 있다. 플러싱에는 차이나타운, 미드 타운에는 코리안타운, 아스토리아에는 그리스인, 그린 포인트에는 폴란드인, 잭슨 하이츠에는 인도인과 남미인...... 이 커뮤니티에 접속하기만 하면 음식, 의상, 가치관 모든 것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렇다보니 영어를 하지 못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영어가 공통어이긴 하지만, 중요한 행정일에서는 통역도 제공된다. 지하철 공익 광고도 다섯 개 언어(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 러시아어)로 하는 곳이니 말이다. 한마디로 뉴욕은 만인의 고향처럼 보인다.




그러나 뉴욕에 좀 더 오래 머무르면 알게 된다. 다문화는 만인의 고향이 아니라 거꾸로 고향의 소멸이라는 것을. 이 차가운 도시에는 어느 그룹에도 속할 수 없다는 이방인의 감각이 깔려 있다. 왜냐고?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문화 단위’가 가짜라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뉴욕에 한인 타운, 중국인 타운, 러시아 타운이 있다고 해서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말 한국, 중국, 러시아를 대표하는 모습인가? 당연히 아니다. 지난 호에서 비판했듯이, 다문화는 항상 피상적으로 오해된다. 외부의 시선 속에서 정의되고, 박제되고, 유통되는 문화-이미지를 여러 개 모아 놓은 후에 그것을 ‘다문화’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화는 끊임없이 변한다. 새 풍토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변하고, 다른 문화와 접하면서 변하고, 세대가 바뀌면서 변한다. 뉴욕의 한인 사회가 오늘날 한국일 수 없고, 한인 사회가 기억하는 30년 전 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고로, 다문화란 여러 문화의 사이좋은 공존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인간이 수많은 문화 충돌 속에서 겪는 ‘문화분열증’이다. 수많은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어느 항목에도 속하지 않고, 수많은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이런 복합적 문화 경험은 뭐라고 명명해야 할 지조차 모르는 상황. 이 혼란에 휘말린 자는 존재하지도 않는 뿌리와 고향을 찾아 더욱 헤맬 것이다. 그러나 소외를 제대로 직시하는 자는 말할 것이다. 돌아갈 수 있는 ‘고향(문화)’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고향의 박제와 부재. 뉴욕의 문화 공간은 이 양극 사이에서 기기묘묘하게 뒤틀린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여기서 피어난다. 오리엔탈리즘』의 핵심 주제는 중동이다. 18세기 이후 유럽이 공공연하게 오해해온 ‘중동 문화(Orientalism)’란 유럽을 중심으로 박제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드가 궁극적으로 반문하는 것은 문화라는 개념이다. 그는 문화란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 ‘중동 문화,’ ‘유럽 문화,’ ‘중국 문화,’ 이런 식으로 문화를 지리적 단위로 묶는 것 자체가 이미 작위적이라고 생각한다. 각 문화 속에 파헤칠 수 있는 본질이 있다고도, 한 문화를 소유한 인종이 따로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문화가 형성되는 시간은 한 개인이 정체성을 구축하는 시간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이다. 그 느린 시간 속에서 문화들끼리 서로 연동되고 변화한다. “정말 보편적인 것은 이동입니다.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횡단이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각주:1] 


문제는 이런 변화와 횡단을 부정하는 문화 연구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대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단순히 유럽이 중동에 대해 쌓은 지식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중동이라는 문화에 “하나의 플라톤적인 본질”[각주:2]을 찾아내고 싶어 했다. 중동 문화 속에 모든 역사를 통틀어 변치 않는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했고, 그 시스템 ‘때문에’ 과거에는 위대했을지 모르나 오늘날 유럽 문명에 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중동 문화는 박제되었고 정작 중동의 현실에서는 부재하게 되었다. 오늘날 중동이 어떤 문화적 변화를 겪었는지 누구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이런 왜곡은 근대화를 통과한 비서양권 문화라면 모두 겪어보았다. 사람들은 세상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자기 이미지를 발견하지만, 고향 땅에서조차 그 이미지에서 소외된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김치를 먹고, 케이팝을 좋아하고, 유교적인 가족 문화?) 뉴욕의 다문화-분열증은 오늘날 글로벌 세상의 초상화다.




 표상과 문-맹(問-盲)


왜곡이 심해질수록 문화분열증도 병적으로 악화된다. 최근 다문화를 표방한 선진국이 반이민주의 폭력에 물들고 있다. 왜일까? 고향에 대한 망상과 갈증도 그만큼 심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 문제 없이’ 완벽하게 소속될 수 있는 어떤 집단, 그 가상의 영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고향이 사라진 이유를 외부인에게 화살을 돌린다. ‘너만 없으면 이런 분열증 따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물론 이는 피해망상이다. 굳이 탓하려면 시대를 탓해야 한다. 이동은 16세기 대항해시대부터 시작된 세상의 흐름 아니던가? 몇 세기 전에는 백인들이 주로 이동했던 반면, 오늘날은 너나 나나 모두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고향이 눈이 멀어서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다문화가 진정한 고향-문화의 소멸을 의미한다면, 현대 문명은 다문화를 이루기에는 한참 멀었다!


이런 무지는 왜 생길까? 표상에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표상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은 스테레오타입을 떠올리는 것이다. 인종, 성별, 옷차림 같은 외부 조건만 보고서 전제 조건을 다는 것이 스테레오타입이다. ‘저 사람은 흑인이니까,’ ‘아시아인은 원래 다 그래,’ ‘여자는 얌전해야지,’ 등등. 이런 고정관념이 만물로 넓어진 것이 바로 표상이다. 그러나 표상을 버리는 것은 단순히 고정관념을 깨야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을 인식할 때 본능적으로 패턴을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패턴을 인식하면 그것이 원래 그런 모습이라고 믿어버린다. ‘컵’은 항상 컵일 수밖에 없고, ‘개’는 개일 수밖에 없고,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사물이나 생명체가 다른 관계로  ‘다른 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다. 이것이 표상이다. 표상은 세상은 계속 변한다는 진실을 가려버린다.


『오리엔탈리즘』은 한 표상이 완성되기까지 무지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있어 왔는지 촘촘히 까발린다. 시대가 흘러도 오리엔탈리즘의 내용은 항상 똑같은 시스템을 통해서만 해석되었다. 중동을 유럽의 아류 혹은 변종 상태로 보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정보수집은 이 오만한 인식 시스템을 점점 더 굳건히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무지는 점점 더 치밀해져갔다. 사이드에 따르면 여기에는 중동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과거에 워낙 침략을 자주 당한지라, 인식의 차원에서라도 “보다 두렵지 않은 동양”[각주:3]을 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유럽이 18세기 이후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에 성공하면서부터였다. 유럽은 이 성공에 너무 심취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중동에 대해 (두려움을 애써 감추면서) 계속해 온 평가절하가 옳았음이 증명된 것 같았다. 마침내, 드디어! 유럽은 중동을 ‘완벽하게’ 알았다고 확신했다.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중동은 어렴풋한 표상에서 확실한 표상이 되었다. 이 표상은 너무나 자명한 나머지 ‘지적 소유물’로까지 느껴졌다. ‘주인’이 ‘소유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어차피 중동은 자신을 잘 모르지 않았는가? 이런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유럽이 제국주의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이해할 만 하다.


“체계를 갖춘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은 글로 쓰여진 지식입니다. 하지만 세계 안에 놓여 있고 직접 세계를 향하고 있으므로 단순한 지식 이상이고 권력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은 근동 지역이 관련된 일에는 아주 효과적인 지식이고, 이 지식에 의해서 타자는 텍스트적으로 서구에 넘어가고, 서구에 의해 점유되고, 자원을 착취당하며, 서구에 인간적으로 억눌려지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 최역석 역, 『권력 정치 문화』, 마티, 2012년, 64쪽


유럽은 승리함으로써 역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들이 정말 눈이 멀어버린 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자기가 만들어낸 표상에 도취된 채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오늘날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선진국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몇 백 년 전 서양이 꿈꿨던 한 때의 무지를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문화가 과거에 누린 영광은 그 주변 타인들을 표상화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전혀 부각되지 않는다.


 ‘세계문명화’를 위한 고전 읽기



이것은 한 예시일 뿐이다. 유럽과 부딪혔던 문화는 중동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500년의 근대사에서 세상은 섞일대로 섞였고, 오리엔탈리즘이 저지른 무지의 만행은 곳곳마다 벌어졌다. 오늘날의 다문화는 이런 오해의 연장에 있다. 21세기, 테크놀로지 시대가 열리면서 세상은 더욱 빠르게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이 인간을 자연스럽게 무지에서 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잘못 했다간 문화 왜곡과 문화 분열을 더욱 빠르게 촉진시킬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21세기 뉴욕은 벽두부터 테러의 폭력으로 물들었다. 이 폭력은 현재 중동에서 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고로,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진정한 ‘세계문명화’다. 한 쪽이 다른 쪽을 교육시키는 문명화가 아니라, 모든 세계가 다 함께 문명화되어야 한다. 사이드는 에메 세제르를 재인용하여 말한다. “특정 인종이 아름다움, 지성, 힘을 독점할 수는 없다. 승리의 순간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각주:4] 사이드의 외침은 절박하고, 뜨겁다. 고국 팔레스타인이 갑자기 세상에서 ‘소거되었고,’ 중동 문화는 서양 담론에 의해 근본적으로 오해되며, 뉴욕에서조차 테러 교수라고 비방당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드는 세상을 향해 분별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문명이 무지에서 한 발 짝 깨어나는 방법은 한 명 한 명이 “승리의 순간”을 위해 자기 인식을 넓히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가 이 수행을 위해 믿었던 것은 고전 읽기 였다. 사이드는 말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말고 닥치는 대로 읽어야 한다. 인류의 정수를 읽어서 오늘날의 문화분열증을 감당할 만큼 마음 근육을 키우고, 오해가 불러 일으키는 폭력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수행은 모두가 함께 해야 의미가 있다. 고향은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의심하지 않았던 세계상, 언제 되돌아가도 익숙한 가치관. 그곳이 바로 당신의 고향이다. 글 맨 처음에 인용된 아포리즘을 썼던 사람은 12세기 성직자 성 빅토르였다. 12세기에는 고향을 떠나는 자가 “완벽하다”고 불렸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모두가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끔씩 나는 생각한다. 격동하는 세계사, 세계에서 물 밀듯이 변했던 지난 500년의 세계사 속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뉴욕에 뚝 떨어져 생활하는 동양 여자아이. 조선시대 유교 경전보다 남미 소설이 더 강렬하게 와 닿는 희한한 감성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라고는 ‘헬조선’이라는 비하 뿐이다. 나와 같은 청년 세대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먹고 살게 해달라는 외침이다. 이렇다 보니, 나 자신이 뿌리 없이 문화와 문화 사이에 끼어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원래 뿌리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잘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모두의 문화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수 밖에 없다. 세상이 유동한다면 나 역시 유동하리라.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권력이며, 문화에 정의되는 것은 내 일상, 내 정체성, 내 인간 관계다. 그러나 문화를 생산하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함께 하는 공부밖에 없다. 그 길의 와중에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잡탕 문화’가 탄생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속한 문화다.


『오리엔탈리즘』의 빡빡한 행간 사이로 방랑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뉴욕의 길거리에는 방랑자들의 발걸음으로 가득하다. 이들의 길은 쉽지 않다. 몇 백 년, 아니 몇 천 년 동안 쌓여온 오해를 뚫고 가야 한다. 기꺼이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고향에 온 것처럼 정말 편안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신포도 같은 것이 아닐까요. 찾으려 애쓸 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최역석 역, 『권력 정치 문화』, 마티, 2012년, 154쪽 


글_해완


권력 정치 문화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최영석 옮김/마티
오리엔탈리즘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교보문고


  1. 각주 1) 에드워드 사이드, 최역석 역, 『권력 정치 문화』, 마티, 2012년, 174쪽 [본문으로]
  2. 각주 2) 에드워드 사이드, 박홍규 역,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2년, 77쪽 [본문으로]
  3. 각주 3) 같은 책, 115쪽 [본문으로]
  4. 각주 4) 같은 책, 258쪽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