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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24절기 이야기

언 땅이 녹는다, 우수(雨水)

by 북드라망 2012. 2. 19.
얼음도 녹고 내 마음도 녹이는 시절

김동철 (감이당 대중지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나는 비 맞는 소, 우수(牛水)! 우수(雨水)랑 헷갈리면 곤란하단 말이여!^^


3개의 비단 주머니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동오(東吳)로 장가들러 떠나는 유비(劉備)의 경호대장 조자룡(趙子龍)을 부른다. 그에게 3개의 비단 주머니를 내놓으며 분부한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만 끌러보고 그 지시대로 행하라’. 동오에 건너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조자룡은 비단주머니 안에 담긴 계책대로 유비를 위기에서 탈출하게끔 돕는다. 제갈공명의 자로 잰 듯한 어시스트와 그것을 어김없이 골로 연결시키는 조자룡의 결정력. 환상의 콤비 플레이다. 문득 그런 비단 주머니가 있다면, 급할 때마다 끌러보고 애매한 순간에 도움을 주겠다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조자룡에게는 단지 3개의 비단 주머니가 전부였으나, 우리에겐 자연이 선사한 24개의 비단 주머니가 15일마다 하나씩 주어진다. 옛 선인들은 24절기로 자연의 변화를 예측하고 실생활에 적용했다. 요컨대 그들에게 있어 절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바로미터였던 셈이다. 스물 네 개 중, 두 번째 비단 주머니를 천천히 열어본다. 짙은 묵향이 코끝을 자극하며, 반듯이 쓰여져 있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우수(雨水)’이다.

얼음이 녹는 시절

신문을 펼쳤다. 스포츠 면에는 프로야구 팀들의 스프링캠프 소식이 실렸다. 겨울 동안 굳었던 몸을 스프링마냥 탱탱하게 가다듬는다. 훈련에 합류한 선수들은 한 숨 돌렸다고 할 수 있다. 작년 한 해의 성적에 따른 계약이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계약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먹고 살 길이 결정되기에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냉혹한 계약과정을 마치고, 한결 가벼워진 기분은 그 즈음의 자연변화와도 맞물린다. 옛날 시골 가옥에는 마당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곤 했다. 대야에 물 받아놓고 바깥에서 세수하던 기억이 난다. 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수돗물도 2월 초순에 들어서면 더 이상 잘 얼지 않는다. 시골의 어르신들은 꼭 우수날 밤 12시만 되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저절로 터지는 경험을 말씀하시곤 했다. 우수수 터져 나오는 수돗물을 바라보며 생각이 스친다. 아, 해빙(解氷)이로구나.

보통 봄의 상징을 꽃이나 푸른 새싹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는 것이 있다.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녹아야 꽃이든 싹이든 돋아날 수 있다. 그러니 봄의 첫 징조는 얼음이 녹는 것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그것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때가 바로 우수이다. 왜 하필 이름이 우수인가? 우수는 말 그대로 비와 물이다. 얼음을 녹이는 봄비인 동시에, 지열이 상승해 얼음이 녹은 물이기도 하다. 그걸 뭉뚱그려 우수라 한다. 둘 다 ‘녹이는 데’ 한 몫 한다. 우수에 숨어 있는 의미는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옛 사람들은 우수 후 5일을 달제어(獺祭魚) 혹은 달착저(獺鑿底)라 불렀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두 손을 항상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수달이기에, 마치 물고기를 잡아 바위에 늘어놓은 모양이 천지 신명에게 감사 드리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겨울은 살기 힘들다. 특히 요즘과 같은 강추위라면 어땠겠는가? 겨울을 무사히 지낸 건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과 같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혹한을 지나 어느덧 얼음이 녹고, 초목이 서서히 싹틀 조짐을 보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하늘에 넙죽 절이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니, 수달을 보고서도 그렇게 느낄 법 하다. 그만큼 우수는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단비와 참 어울린다. 실제로 이 즈음 봄비도 내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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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입기(入氣) 후 10일에는 후안북(候雁北) 혹은 홍안래(鴻雁來)라 하여 철새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간다. 한번 날아오르면 수 만 Km를 비행하는 철새의 여행. 그 장대한 여정에서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해본다. 긴 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행장이 간소하다. 아마추어들이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쓰지도 못한 채 버리기 일쑤다. 철새에게 필요한 건 그저 가벼운 날개가 전부다. 봄이면 새로운 시작, 설렘으로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한다. 아! 마치 쓰지도 않을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처럼... 철새의 날갯짓에는 오직 여행을 완주하려는 한 마음뿐이다. 우수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오직 한 마음을 먹는 때이다. 기대하거나 낙담하지도 않는 담담한 자세로, 긴 여행을 오직 자신의 두 날개로 완주하려는 기백이 필요한 시간이다.

우수의 마지막 5일에는 초목맹동(草木萌動), 즉 초목 깊숙한 곳에 싹을 틔우고 물을 거슬러 수액으로 끌어 올리는 시기이다. 이때 흡수한 물은 한 해 동안을 지탱하게 하는 근원이 된다.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살펴보면 입춘과 우수는 한 쌍을 이루며 인월(寅月)에 속한다. 십이지(十二支) 중 인(寅)은 ‘물이 나무에 스며드는 인(演)’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른 봄 대지로부터 물을 빨아들이는 고로쇠나무를 연상하면 된다. 괘의 모양은 3양과 3음이 서로 어울려, 양기가 절반을 얻은 때이므로 추위가 물러가기 시작한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양기가 비로소 세(勢)를 얻으니, 그 신호탄으로 초목이 불쑥 솟아오르는 것이다.

마음 장(醬) 담그는 때

장은 담가서 먹는데 까지 보통 6개월 정도 소요된다. 그 출발점은 겨우내 입동(立冬)이며 본격적으로 담그기 시작하는 때는 우수이다. 우수에 장을 담가야 맛과 색이 변하지 않기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장 담그기가 행해졌다. 친구와 장맛은 오래 될수록 좋다는 말처럼, 진득하게 기다리며 공을 들여야 한다. 최상품으로 치는 간장은 무려 60년 동안 묵혀, 거의 고체화된 물질이라 한다. 우수에 장을 담그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장맛도 이때부터 숙성된다. 예부터 된장은 오덕(五德)이라 하여, 다섯 가지 덕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단심(丹心) : 다른 맛과 섞여도 제 맛을 낸다.
둘째, 항심(恒心) : 오랫동안 상하지 않는다.
셋째, 불심(佛心) : 비리고 기름진 냄새를 제거한다.
넷째, 선심(善心) : 매운맛을 부드럽게 한다.
다섯째, 화심(和心) : 어떤 음식과도 조화를 이룬다.

─ 윤숙자 외,『재미있는 세시음식 이야기』, 질시루

장에 담긴 다섯 가지 덕성은 한 해를 살아가는데 품어야 할 마음가짐에 다름 아니다. 단심으로 자신의 색깔을 빛내고, 항심으로 꾸준히 지속하고, 불심으로 대동단결.. 아, 아니.. 탁한 마음을 정화하고, 선심으로 까칠한 마음을 다스리고, 화심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린다. 지금이야 장을 쉽게 사다 먹지만, 선인들은 어디 그랬겠는가? 장 담그기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그야말로 아주 된(hard) 일이었다. 그런 만큼 다섯 가지 마음은 완숙한 장맛을 내는 데 반드시 요청되는 품성이었던 셈이다. <Yes, Chef!>라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 요리사들의 세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주방 막내는 청소 등 허드렛일을 도맡고, 좀 짬밥을 먹으면 그제야 칼을 집고 재료를 다듬는다. 주방장이 맡은 일은 다름아닌 양념장의 제조. 아무리 재료가 좋아도 양념장에 따라 음식 맛은 천차만별이다. 양념장은 바로 음식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이렇게 중요한 양념장을 어떻게 담그느냐에 따라 한 해의 맛이 좌우된다.

일 년을 시작하는 우리 마음의 장맛도 이때 제대로 담가야 ‘일상의 맛’이 신선해지지 않겠는가? 연초에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면, 장에 깃들어 있는 다섯 가지 덕성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체크해보자. 어떤 일을 할 때 단심이 없으면 그저 남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게 마련이고, 항심이 없으면 중도 포기하고, 불심이 모자라면 초심을 잃고 이익을 탐하며, 선심이 부족하면 까칠해지고, 화심이 약해지면 타인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처럼 다섯 가지 덕성을 잃으면 일상의 맛은 형편없어지고, 삶의 질은 저하되리라. 하지만 오덕(五德)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 당신의 한 해는 깊은 장맛처럼 은은하고 풍성할 것이 틀림없다. 장맛은 친구들끼리 서로 맛을 봐줘도 무방하다. 무언가 함께 시작하는 벗의 마음장맛을 봐주고, 돈독한 우정을 나누어도 좋은 일이다. ‘네 마음장맛은 항심이 모자라!’처럼.

사용자 삽입 이미지과거, 할머니들은 장독대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부엌 일선에서 물러났다. 장이 모든 음식의 기본이자 정성이며 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애지중지하던 장독 위에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기도했던 것도 그것이 그네들의 보물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우수에 대동강 물이 풀리듯

대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단순하기 그지없다. ‘우수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 절기에 대한 속담이다. 언 강물이 풀리듯이 우리 일상의 얼어붙었던 것을 찾아 풀어내면 그것이 바로 계절대로 살아가는 방법이다. 운동 부족인 사람은 몸의 뼈마디가 한 겨울 대동강마냥 꽁꽁 얼어붙어있으리라. 우수 때부터 찬찬히 해동(解凍)하지 않으면 나무인형처럼 뻣뻣한 채로 살아가거나, 나중에 우지끈 부러지는 변고를 겪을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것이 어디 몸뿐이랴. 마음에 응어리져 맺힌 것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봄을 맞이해 새로운 노트, 책가방, 컴퓨터 등을 장만하나, 정작 마음만은 ‘묵혀 문드러진 마음’을 그대로 가져가면 딱한 일이다. 돈 빌린 사람은 하루빨리 빚을 청산하고, 주변 사람과 냉전 중이라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보라. 묵힌 인연의 마음은 당신을 계속 주저 앉힐 뿐이다. 때는 이미 얼음이 녹는 우수이다. 영원히 얼어붙어 있을 것 같던 대지도 풀리는데, 당신의 마음도 언제까지나 굳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신을 가볍게 함으로써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봄의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촉촉한 봄물의 기운으로 몸을 유연히 풀어주고 굳은 마음을 적셔준다면, 삭막한 도시 한 복판에서도 우수의 시절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24절기 중 ‘빗물’이라는 절기가 있다는 건 얼마나 우리를 감성적으로 일깨우는가. 녹고 풀려야 할 것은 얼음 강만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언 손이 녹고 마음이 풀려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과 열등감, 두려움과 소외, 우리를 춥게 했던 모든 사슬들이 빗물처럼 풀려 흐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삼라는 훈훈해진다. 얼어붙고 응어리진 것들이 누그러진다는 것. 푼다는 것은 새로운 만남을 뜻한다. 그래서 봄은 언제나 하나의 푸른 문이 아니던가.

─ 김수우,『유쾌한 달팽이』, 해토

※ 임진년 우수의 절입시각은 2월 19일 오후 3시 17분입니다.
※ 계사년 우수의 절입시각은 2월 19일 오전 2시 59분입니다.
※ 갑오년 우수의 절입시각은 2월 19일 오전 2시 59분입니다.
※ 을미년 우수의 절입시각은 2월 19일 오전 8시 50분입니다.
※ 병신년 우수의 절입시각은 2월 19일 오후 2시 34분입니다.
유쾌한 달팽이 - 10점
김수우 지음/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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