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읽고-쓰고-살아간다,『천 개의 고원』을 몸으로 통과한 한 청년의 이야기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의 저자와 만나다!



'청년백수의 『천 개의 고원』 사용법'이라는 부제에 눈길이 갑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니지요? ^^)  어떤 연유로 청년백수가 되었고, 또 『천 개의 고원』을 만나게 되었는지 궁금한데요, 먼저 하루 일과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표지 앞에 ‘청년백수’라는 이름표가 달려 있는데요, 저도 표지를 보고서 이에 대한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사실 이 정체성에 엄청난 의미부여를 한 건 아닙니다. 제가 다들 ‘백수’ 하면 떠올리는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열일곱 살 때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그 이후로 지식인공동체 ‘남산강학원’에서 쭉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자퇴했을 당시, 저에게는 대학에 갈 계획도 없었고 취직할 계획도 없었어요. 그보다는 공동체생활을 경험하고 또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픈 욕망이 훨씬 더 컸어요. 그랬더니 공식적으로 내걸만한 이름표(대학생, 노동자, 실업자, 기타 등등…)가 없어지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에잇, 내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차라리 ‘백수’를 표방해버리자! 실업자와 취직자 수를 파악하는 통계청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제가 저를 ‘백수’라고 지칭할 때의 뉘앙스는, 대학교에 못가고 취직을 못하는 ‘루저’의 느낌보다는 하나의 정체성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 ‘규정 불가능한’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제 일상은 단순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연구실로 출근합니다. 연구실에 도착하면 카페의 커피머신을 가동시키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죠.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을 쓸 때 저는 카페 매니저였거든요.) 점심저녁으로 사람들과 함께 밥 먹고 산책합니다. 이외의 시간에는 모두 세미나를 하거나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한 공부를 합니다. ‘공부’가 연구실 생활리듬의 중심축인 거죠. 세미나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튜터 없이 자발적으로 꾸려가는 ‘일반세미나’도 있고,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책을 몇 달 동안 강독해나가는 ‘강학원’, 또 1년이라는 긴 호흡을 가지고 학인들끼리 멤버십을 키우며 공부하는 ‘대중지성’도 있습니다.
 

『천 개의 고원』은 ‘강학원’ 프로그램에서 만나게 된 책입니다. 일주일에 한 챕터 씩, 꼬박 15주 동안 이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워낙 어렵기로 악명 높은(?) 책이기도 했고, 처음 읽어보는 철학책이라 긴장도 많이 했었어요. 책을 펴보니까 역시나 외계어를 대면한 기분이었어요. 매 챕터마다 세 번 이상은 읽고 노트 정리까지 해야 이미지 하나라도 겨우 잡혔습니다. 그것도 잘못 짚은 경우가 태반이었지만요.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책이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책의 개념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에너지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게다가 뭔가 직감적으로 촉이 섰죠. 이 책이 내가 지금껏 고민하던 문제들을 타파해줄지도 모른다는……!





와! 정말로 일상이 '공부'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요?


공부에 뛰어드는 동기는 사람들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원래부터 책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연구실 공부스타일에 적응하는데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웃음). 누구는 연구실에 넘치는 ‘간식의 힘’으로 공부한다고도 하고, 누구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일이 좋아서 공부한다고도 해요. 하지만 공부를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건 제가 공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의미부여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가 저에게 선물해주는 ‘힘’ 때문이에요.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를 기준으로 삼았다면 저는 이 책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철학에 완전 초짜이고 미숙한 건 사실이니까요(ㅎㅎ). 하지만 『천 개의 고원』을 공부하는 과정은 저에게 ‘능숙함-미숙함’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어요. 그건 지금까지 제 삶과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즉 ‘인식패턴’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죠. 이 순간이 가져다주는 놀라움 때문에 공부를 멈출 수 없는 것 같아요. 철학개념은 절대 관념의 영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삶에서 직접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이에요.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진척시켜보는 좋은 기회! 철학책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열의만 있다면 누구나 이것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개념 중에 ‘나무’와 ‘리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무’가 하나의 뿌리를 중심으로 잔가지들을 고정시키는 패턴이라면, ‘리좀’은 중심이 없는 대신 여러 줄기들이 접속하면서 계속 증식해나가는 운동이에요. 이 개념은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책은 책, 나는 나라고 따로 생각한다면 그건 철학을 나무의 패턴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이 나에게로 오는 과정, 또 내가 책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이내믹하게 일어나는 ‘변화’에 중심을 실으면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리좀이 됩니다. 리좀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공부가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천 개의 고원』을 읽기 전과 읽은 후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을 쓰기 전과 쓰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나’라는 자의식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자 덩달아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와 같은 고민들도 사라졌어요. 그 대신 훨씬 더 전면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관계’에 대해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요.




앞으로 이 책과 만나게 될 독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릴게요. ^^

 

저도 한참 공부하는 과정이고, 그래서 『천 개의 고원』을 읽고 써내는 과정에서 여러 혼선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겪었던 혼선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책에 반영되었을 것 같은데(;;) 독자 분들께 미리 양해 말씀드립니다! (암만해도 이 자의식은 잘 없어지지 않네요!)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 ‘잘 쓰인 책’, ‘매끄럽게 읽히는 책’이라는 평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 책이 단 한 명에게라도 자기만의 ‘쓰기’에 도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저로서는 이 책을 쓴 목표가 충분히 달성된 셈이에요.
 

“살기는 쓰기다!”라는 모토를 내걸었을 때, 여기에는 글쓰기의 재료를 삶 밖에서 찾을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필요한 건 이미 다 갖춰져 있어요. 누구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누구나 쓰기가 가능합니다. 단, 이 관계를 통찰하고 또 새롭게 재구성해보려는 노력이 없다면 쓸 수 없어요. (이게 핵심이에요^^) 저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업을 퍼뜨리고 싶어요. 한편의 글을 쓰고 나면, 삶에도 필요한 건 이미 다 갖춰져 있다는 것 또한 긍정하게 되니까요. 중요한 건 얼마나 잘 쓰냐가 아니라, 쓰는 과정에서 투입되는 삶의 노력이 아닐까요. 바로 이 힘이 별 다른 지식과 재주가 없더라도 글과 삶 모두를 강렬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책이 결점까지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게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겠네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저도 했는데요! 앞으로 많은 ‘독자-저자’들의 글쓰기를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을 긍정하라, 삶을 창조하라, 삶을 사랑하라…… 이런 거창한 말들 앞에 서면 괜히 주눅이 든다. 도대체 어떤 슈퍼맨들이 이런 말을 하는가? … 그러나 앞서 길을 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펜과 붓으로 쏘아 보내려했던 화살은 바로 리토르넬로였다. '삶'이라는 표상이 아니라 '살아감'이라는 간주곡 말이다.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건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오고, 일상도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앞에서 우리가 가장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다. 일상과 일상,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리토르넬로의 간주곡을 만들어 내는 것. 나는 리토르넬로를 '쓰기'라고 이해한다. 특정 결과물을 써내는 것이 아니다. 삶을 다시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꼭 글쓰기가 아니어도 좋다. 음音-쓰기, 몸-쓰기, 밥-쓰기 등등,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쓰기'가 존재할 것이다.


─김해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283쪽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 10점
김해완 지음/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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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나디아 2013.12.04 16:57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정말 공감 공감 또 공감하는 글입니다. 공감하는 내용인데, 해완씨처럼 글로 표현해낼 내공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홍홍 계속 몸 쓰고 글쓰고 삶을 쓰면 되겠죠 뭐~ㅎㅎ

    • 북드라망 2013.12.04 17:35 신고 수정/삭제

      나디아님의 글은 나디아님만의 색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홍홍~
      앞으로도 계속 몸쓰고, 글쓰기를 하실 수 있도록, 응원의 기(氣)를 멀리서나마 보내드립니다요오~ >_<

  • 김소영 2013.12.06 15:21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백수에 대한 규정 맘에 듭니다 ㅎㅎ '루저'같은 자책감을 느끼면서 사는 청년들이 너무 많지요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와 같은 고민...
    보통 그에 대한 답을 자꾸만 찾으려고 하지 않나요? 어떻게 하면 자의식을 놓을 수 있는 것인지... (쓰기?!) 그걸 내려놓으면 무얼 의식하고 살게 되는지 궁금해요

    • 북드라망 2013.12.09 09:54 신고 수정/삭제

      김소영님의 말씀을 들으니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의 이 구절이 떠오릅니다. ^^

      "말은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거꾸로다. 삶의 경험이 새로운 말들을 길어 올리고 또 새로운 사유를 촉발시킨다. 쓴다는 것은 삶이 감추어 놓은 이 패스워드를 탐색하는 것이고, 이 탐색은 필히 나를 변하게 만든다. 누군가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쓰냐고 물었다. 하지만 역시 무엇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여자, 이십대, 학생, 이런 테두리 내에서 염전히 살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테두리를 개의치 않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쪽이 좋다. 나는 고정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은 이 과정에 대한 믿음이다. 이 변화과정에 계속 도전할 때, 거기서 비로소 나만의 문체(style)가 생길 것이다." (84p)

  • 김소영 2013.12.17 01:37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아 어렵다... 계속해서 여러번 읽으면서 의미 파악하려고 노력중이에요^^;; 제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구절인가... 알것 같으면서도 내가 이해한게 맞을까를 의식하면서요ㅎㅎ 그리고 글로 표현하려니 역시나 만만치 않네요. 어떤 테두리가 될지 고민하기보다는 살아가는 여정 중의 경험들로 저런 고민들에 대한 답 즉 나의 style을 찾으라는 말씀이신가...
    써주신 저 한 단락을 가지고 머리싸매고 공부 중ㅋㅋ

    • 북드라망 2013.12.17 17:39 신고 수정/삭제

      책의 일부만을 옮겨와서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
      찬찬히 읽어보시면 궁금해하시는 그런 지점들이 좀 해결되지 않을까 합니다. 호호호~~ (은근 책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