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과학이 가진 힘의 비밀은 '실험'에 달려있다?!

실험이란 무엇일까? ①


세계의 새로운 표정을 펼치는 실험



실험은 지루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아직 학부제도가 실시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이과생이라면 과(科)에 상관없이 1학년 때 필수적으로 물리실험과 화학실험 수업을 들어야 했다. 일주일에 1시간씩 있는 이 시간은, 한마디로 놀자판이었다. 실험에 관심이 있는 애들은 아주 소수. 대부분은 실험도구들을 가지고 이런저런 장난을 치기 바빴다. 제대로 실험을 하는 팀은 한 팀이면 충분했다. 뭐, 그것도 그다지 필요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실험은 이미 어떤 답이 나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실험을 한 팀도, 정답에 맞춰 실험결과를 조정하곤 했으니 말이다. 


실험이란 게 그런 거였다. 이미 정해진 답, 나와야만 하는 사실이 있었다. 실험은 이를 확인하는 정도라고 할까. 실험은, 그냥 책으로 배우면 되는 것을 귀찮게 몸을 써가며 배워야 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데서 오는 신기함도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실험은 그저 책의 내용을 똑같이 반복하는 작업일 뿐이었다. 그러니 실험이라는 게 지루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물리학자, 하면 왠지 <빅뱅 이론>의 쉘든이 떠오르네요.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과학에서의 실험을 이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자, 물리학자 한 명만 떠올려 보자. 아인슈타인? 파인만? 아니면 갈릴레오? 어떤 물리학자가 됐든, 그 과학자들의 이미지는 이론물리학자 쪽에 가깝다. 비상한 머리, 칠판 가득한 수식들, 어딘지 현실과는 거리가 먼, 괴짜 천재들. 이런 이론 물리학자에 비해, 실험 물리학자의 위상은 좀 낮게 느껴진다. 실험이라는 게, 천재적인 이론 물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사실들을 그저 증명하는 작업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실험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실험이란 이미 밝혀진 진실을 지지하는 증명이나, 사실을 재확인하는 그런 지루한 작업이 아니다.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여기는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운동장. 나는 친구들과 나란히 스탠드에 앉아 있고, 앞에는 응원단장이 서 있다. 응원단장이 파도타기를 하자고 소리친다. 어려울 것 없다. 응원단장이 달려가는 것에 맞춰서 나는 일어났다 앉으면 된다. 그럼 그 멋진 파도타기는 완성~.


파도타기 응원, 한번쯤 경험해보셨죠? ^^



갑자기 운동회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 상황이 물리학에서 말하는 ‘입자’와 ‘파동’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으로 달려가는 응원단장에 해당하는 것이 ‘입자’이고, 파도타기가 ‘파동’이다. 중요한 것은, 파도타기의 포인트가 그저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면 된다는 점! 스탠드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응원단장처럼 앞으로 달려 나갈 필요가 없다. 아니, 그렇게 달리면 파도타기가 안 된다. 우리는 응원단장이거나, 파도를 만드는 응원단에 있거나 둘 중에 하나의 상태에만 있을 수 있다. 이게 우리 경험이 말해주는 상식이다. 


양자역학 이전의 고전 물리학은 이런 경험과 잘 맞아 떨어진다. 고전 물리학에서 물질의 상태는 입자와 파동 두 가지로 나뉜다. 이를테면 고전물리학에서 빛은 파동, 전자는 입자로 여겨진다. 여기서 물질은, 응원단장과 응원단원처럼, 입자와 파동 한 가지 상태에만 있을 수 있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이 둘을 동시에 가진 물질이란 모순적 상태에 있어서 존재할 수 없다.


파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간섭 현상’이다. 파동의 간섭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40년 11월 7일 미국 타코마 해협에서 있었던, ‘타코마 다리 붕괴사건’이다.


바닷가 해협에 건설된 타코마 다리는 양쪽 교각에 연결한 케이블에 상판을 고정시켜 지은 현수교다. 폭이 좁고 길이는 853m에 이른다. 원래 초속 53m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으나, 붕괴 당시 불었던 바람은 초속 19m에 불과했다. 이 바람이 다리의 얇은 상판에 부딪히며 와류현상을 초래했고, 여기서 생겨난 진동수가 다리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하는 공진현상이 일어나면서 더욱 큰 진동이 발생했다. 결국 다리는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2011.07.12. 한겨레 인터넷 신문에서 인용


전해지는 바로는, 강풍으로 인해 다리 전체가 널뛰기를 하듯 들썩거리다 와르르 무너져내렸다고 합니다.


바람이 만들어내는 파동과 다리가 가진 파동이 공명하면, 파동의 크기(진폭)이 엄청나게 커져버린다. 이를 파동간의 ‘보강간섭’이라고 부른다. 타코마 다리는 보강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파동에는 이와 정반대 현상도 있다. 파동이 공명하면서 서로를 상쇄해 버리는 것이다. 이를 ‘상쇄 간섭’이라 한다.


이런 간섭현상은 물질을 입자와 파동으로 구별하는 기준 중 하나다. 간섭현상을 보이면 파동, 그렇지 않으면 입자다. 빛의 경우에는, 두 줄기 빛이 만나면 보강과 상쇄가 교차로 일어나면서 얼룩덜룩한 무늬가 생긴다. 그렇기에 빛은 파동이다. 반면에 전자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기에, 입자다. 그러나 고전 역학적 물질이 가진 입자-파동의 이런 구별은 양자역학에서 무너지게 된다.



입자냐, 파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인슈타인하면 상대성 이론이지만,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것은 1905년 발표한 첫 논문, <빛의 생성과 전환에 관한 발견적 관점에 관하여>였다. 이 기나긴 제목의 논문에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빛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빛은 파장이기는 하지만, 입자처럼도 행동한다. 빛은 입자처럼 작은 에너지 덩어리로 움직인다. 이렇게 입자처럼 행동하는, 덩어리진 에너지를 ‘양자’라 하고, 빛의 양자 상태를 ‘광자(光子)’라 한다.


파동인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우리 상식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 얘기는, 응원단장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면서 제자리에서 앉았다 일어나는 응원단원이기도 하다는 소리가 아닌가. 문제는 1924년 더욱 심각해진다. 드 브로이라는 물리학자가 전자와 같은 입자는 또한 파동처럼 움직인다는 물질파 개념을 내놓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파동은 입자로도, 입자는 파동으로도 활동한다는 것!


물질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이중슬릿실험’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실험 장치는 이렇다. 우선 전자를 총알처럼 쏠 수 있는 총이 필요하다. 그리고 두꺼운 도화지 같은 것에 작은 틈을 낸다. 이 틈을 ‘슬릿’이라 한다. 그리고 이 판과 적당하게 떨어져 전자총알을 한 발씩 쏜다. 그러면 슬릿을 통과한 전자 총알은 뒤에 흔적을 남긴다. 그 모습은 아래 그림 1과 같다. 


그림 1, 단일 슬릿 실험


이번에는 슬릿이 두 개가 나란히 있는 판에 총알을 쏴보자. 총알은 입자이니, 그림 2와 같은 모습이 찍힐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림 2, 이중 슬릿 실험(입자)


그러나 실험 결과는 이런 예측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슬릿 2개를 통과한 총알이 만든 결과는 그림 3. 입자인 전자들이 파동의 간섭현상과 같은 흔적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간 파동인 줄 알았던 빛 역시 이와 동일한 모습을 보였다.  


그림 3, 이중 슬릿 실험(양자)


과학자들은 이 기가막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실험을 좀 더 정밀하게 고안했다. 전자 총알의 경로를 알기 위해 두 슬릿 근처에 일종의 전자총알 감시카메라를 달았다. 두 슬릿 중 전자총알이 어디를 지나가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랬더니 전자라는 놈들이, 슬릿이 두 개임에도 불구하고, 아까와는 달리 입자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슬릿이 하나면 입자로, 슬릿이 두 개면 파동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물질. 그리고 다시 그 중간에 경로를 알기 위한 실험장치를 추가하자, 파동에서 입자로 모습을 바꾸는 물질. 물리학계는 햄릿의 고뇌에 빠진다. ‘입자냐, 파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간과 자연이 만드는 드라마


물질이란 무엇일까? 도대체 이 세계는, 이 자연은 어떻게 생겨먹을 것일까?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입자이기도하고 파동이기도한 두 모순적인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일까?


롭 곤살베스, <칠판 우주>


그런데 잠깐.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이 질문들 아래에는 어떤 전제가 깔려 있다. 자연은 우리와 분리된 채, 저기 어딘가에 자리한다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연 앞에 서서, 자연을 건드리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자연의 진리를 발견한다는, 그런 생각.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전제다. 그렇기에 처음에 한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가진 혁명성은 이것이다. 양자역학은 자연이 우리와 떨어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자연은 우리의 관계양식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원자세계에 대한 객관적 기술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고전물리과학은 [이런] 신념에서 출발했다. 혹 어떤 이는 환상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인간이 없더라도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런던시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고전물리학은 인간의 주관과 별개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신념을 추상화시킨 바로 그것이다. 객관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코펜하겐 해석은 바로 이와같은 객관성에 대하여 반성의 자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양자론은 과학이며 따라서 순수한 주관주의에 포함되서는 안 된다. 양자론에 물리학자의 주관적 정신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반발일 뿐이다. 그러나 과거와 같이 주관과 객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분리는 과거 과학방법론의 중요한 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물리학에서는 엄격한 분리가 있을 수 없으며, 양쪽의 상호 관계성을 중시하고 있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환상일 수 있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지음, 최종덕 옮김, 『철학과 물리학의 만남』, 한겨레, 1985, 54쪽


여기서 관찰을 포함한 실험이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 형식을 나타낸다. 그렇기에 하나의 실험을 계획한다는 것, 그것은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이다. 이중슬릿 실험을 다시 떠올려보자. 우리는 우선 자연에 ‘슬릿 하나’를 가지고 물었다. 그러자 자연은 입자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슬릿 둘’을 가지고 묻자, 자연은 파동으로 답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경로검출장치라는 질문을 더하자, 자연은 다시 입자라고 답한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질문방식 속에 나타난 자연이다. 물리학에서 우리의 과학적 작업은 자연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질문을 해야 할 것인가를 포함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와 떨어져서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존재의 드라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배우도 되고 관객도 되는 것이다. 자연은 나와 관계될 때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위의 책, 55쪽


자연은 나와 '관계'될 때 드러난다?!



세계의 새로운 표정을 펼치는 실험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16세기 베이컨은 과학계에 새롭게 등장한 실험에 반대했다. 베이컨에게 실험은, 자연을 괴롭혀서 억지로 진실을 캐내는 일종의 고문행위로 여겨졌다. 허나 베이컨의 이런 생각 아래에는 고전적인 자연관이 자리한다. 자연의 진리는 저기 어딘가 신성하게 자리한 것이라는. 그러나 베이컨의 그런 자연은 없다. 인간과의 관계를 떠난 자연은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자연이 보여주는 하나의 상(像)은 이미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효과이다.


자연은 수많은 주름들을 가진 복잡계다. 실험은 그런 자연에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다. 그렇기에 자연의 어떤 주름이 펼쳐질지는, 우리가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과학이 가진 강력한 힘의 비밀은 바로 이 질문의 양식, 요컨대 실험에 있다.


과학은 주어진 질문에 대답하기 이전에 질문자체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관계 양식 속에서 세계의 접혀진 주름들을 펼친다. 그렇게 과학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드라마를 써내려간다. 이런 의미에서 이론 물리학자 역시 실험 물리학자다. 실험 물리학자가 직접 도구들을 가지고 새로운 질문방식을 고민한다면, 이론 물리학자는 사고실험을 통해 그 일을 할 뿐이다.


우리가 과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실험의 결과나 그 정밀도라기보다는 실험 그 자체다. 하나의 실험에 담긴 질문 양식을 배우고, 그것을 도약대로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기. 그렇게 새로운 실험들을 창안할 때마다 이 세계는 자신이 가진 풍부한 주름들을 펼쳐 보여 줄 것이다.


세계가 가진 다채로운 스펙트럼은 곧 우리가 가진 질문의 다채로움이다. 그러니 이 세계가 조금은 빈곤하고 지루해 보인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질문들을 새롭게 해보자. 우리가 새로운 실험을 창안하는 만큼 세계는 접혀 있던 주름들을 펼치며 새로운 표정들을 보여줄테니.




신근영(남산강학원 연구원)

✳ <과학 톡톡>은 매월 둘째주, 넷째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2주 후에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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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나물 2013.08.13 21:25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꺅! 너무 재밌어요~ 응원단장과 파도타기라니욧^^
    이러다 늘그막에 과학에 빠질까봐 두려운걸요!
    근데, 전 글 양을 쫌만 줄였으면 좋겠어요.
    한 번에 쪼금씩만 받아먹고 싶달까요? 워낙 과학무뇌 문외한이라 말입지요ㅠㅠ

    • 북드라망 2013.08.14 10:29 신고 수정/삭제

      그림을 많이 넣다보니 길게 느껴지실 수 있는데요~
      천천히 음미하여주세요. ^^
      글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요. 호호호호;;;

  • 00 2013.08.13 23:56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역쉬!! 실험은 실험적이어야 했어요.
    보통 실험하면, 맥빠진 확인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군요.
    실험은 말그대로 실험정신!!^^ 멋있어요

    • 북드라망 2013.08.14 10:29 신고 수정/삭제

      실험 그 자체, 그 질문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다음 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