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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새로운 '인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출발점'들 -푸코의 『말과 사물』

by 북드라망 2013. 5. 1.

수많은 푸코들로 가는 기이한 출발
-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1966년 『말과 사물』 출간 후 어떤 인터뷰. 푸코는 사르트르를 “20세기를 사유하려는 19세기 인간”이라고 공격한다. 사르트르는 이에 발끈해서 “부르주아지가 맑스에 대항해 마지막 댐을 건설한다”고 맞받아쳤다. 푸코를 부르주아지의 옹호자로 몰아세운 것이다. 푸코가 맑스주의를 19세기 어항 속 물고기로 환원하여 과소평가하는 장면에서 보자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소리를 들은 푸코는 혀를 차며 한 번 더 빈정거린다. “부르주아지는 참 불쌍하기도 하지. 자신들을 지킬 성채가 고작 내 책뿐이라니!”
 

그렇게 『말과 사물』은 당대 철학자들과 공존하기 힘든 낯설고 당혹스러운 책이었다. 간혹 사람들은 이 책을 ‘우익’서적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이런 오해를 두고 스승 이폴리트는 푸코에게 이 책은 비극적인 책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푸코는 “선생님밖에 그 책을 안 읽었어”라고 푸념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 책은 푸코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책이기도 했다. 푸코는 대중매체인 TV프로에 출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훗날 푸코는 이 문제의 책을 자신의 “진정한”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푸코는 이 책을 그저 어떤 연습이고, 다른 저작들의 흥미나 감응에 비추어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아마 다른 책에서 자신의 긴박하고 핵심적인 주제들이 더 잘 논의되었다고 생각한듯하다. 이처럼 엄청난 대중적 성공과 사람들이 도무지 읽었을 것 같지 않은 오해들이 중첩된 책, 그러나 정작 푸코에게는 주변적이고 그저 연습이었던 책, 『말과 사물』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이 얼마나 논쟁적이고 불가해했던지, 이 책 이후로 푸코는 니체주의자, 하이데거주의자, 칸트주의자(혹은 반-칸트주의자)로 불리며 여러 철학자의 계보에 동시에 거론되거나, 아니면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등등 여러 범주의 학자로 변주되거나, 혹은 반-맑스주의자, 반-실존주의자, 반-인간주의자로 불리며 온갖 곳에서 반역의 사상가로 각인되기도 하고,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던주의자, 신철학자로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의 사상가로 이해되기도 하며, 급기야 “비역사적 역사학자, 반인문학적 인문주의자, 반구조주의적 구조주의자”라고 불려야 타당하다는 오묘한 견해까지 나왔다. 도대체 『말과 사물』이 어떤 사건이었기에 이런 혼란과 오해와 반목이 이 책 주위로 몰려드는 것일까?



인간의 죽음 : ‘나’는 폭발하였다!


한여름 해수욕장 모래사장에서 놀아 본적이 있는가? 찬란한 태양과 그 빛들이 바다 위로 눈부시게 날아다니는 곳. 아버지나 삼촌이 만들어준 모래 웅덩이 속은 우리들만의 왕국인 듯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안락한, 아주 기묘한 감정이 되어서는, 급기야 우리들은 이 웅덩이에서만 놀기를 바라게 되는데, 아버지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는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웅덩이만을 탐닉하게 된다. 웅덩이가 낙원이고, 세계이고, 안락인 셈. 친구들은 웅덩이를 더 깊이, 더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 깊게 파고, 따라서 둘레에 모래성은 더욱 높아지고 많아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반드시 이 웅덩이를 없애버리는 훼방꾼이 나타나는데.....


푸코는 그렇게 나타났다. 푸코가 『말과 사물』을 쓸 무렵 유럽은 ‘구조주의’ 논쟁이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구조주의의 주 공격 대상은 사르트르. 실존주의가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주체가 구성된다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주체란 한낱 사회나 문화 체계의 특수한 효과에 불과하다고 본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철학을 현대의 신화라고 규정하며 그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이런 맥락에서 푸코도 사르트르 휴머니즘에 반대한다. 자신의 과제가 휴머니즘에서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그런 것들은 싸구려이고, 따라서 그런 신비화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존주의를 표방하는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고 주장한다. 실존 내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역으로 인간의 본질, 즉 현재의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도록 징벌 받은 의식’에 기초하는데, 바로 이 의식이 자신을 자유롭게 전개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획득하면서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된다. 여기서 ‘의식’은 ‘무(無)’이다. 이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무가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무이다. 행위를 통해서 이 무가 채워지고, 그래서 그것이 ‘인간 본질’이 된다. 사르트르 대표 저작의 제목, 『존재와 무』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달리, <밀레의 만종의 고고학적 회상>


 그러나 푸코는 이 지점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타격해 들어갔다. ‘무’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도대체 당신들이 전제하고 있는 ‘의식’이 있긴 한 건가?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의식이 자유로운 전개를 토대로 하는 이상, 결국 ‘인간’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혹시 ‘의식’의 전제인 그 ‘인간’이 애당초 없는 것이거나, 곧 사라져버릴 것이라면 당신 말은 허공 위에 세워진 원천무효의 논리 아니냐는 반문이다.

『말과 사물』은 바로 이 질문을 그 실증성의 영역에서 탐색해 들어간 책이다. 여기서 ‘실증성(positivité)'이란 어떤 명제를 참이나 거짓으로 여기게 하고 대상을 구성하는 힘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실증성의 문턱’을 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정한다. 어떤 사람이 광장에 나와 “이 세상의 최소 단위 물질은 ‘K’이다”라고 소리 높여 외친들 그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미친 놈 취급받기 십상이다. 아마 ‘K’가 대상으로서 인정되기 위해서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실험 결과를 갖고 권위 있는 과학자들의 검증을 거쳐야 될 것이다. 진실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바로 그 힘이 실증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은 물질세계의 대상을 구성하고, 그것을 전제로 행동하거나 생각하게 강제하는 우리 시대의 ‘실증적’인 힘이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개인의 의지를 억압하고서 믿게끔 강제하는 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전제이거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런 힘이다.
 
푸코는 이 관점에서 우리들 사이에 ‘인간’이라는 아주 강력한 전제가 숨어 있었다고 폭로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인간’이란 육체를 지니고 노동하고 말하는 삶을 영위하는 근대인이다. 그런데 그 ‘인간’도 19세기에 와서야 실증성의 영역에 솟아난 아주 최근의 일이라고 일갈한다.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인간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오래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마 우리가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이전을 기억해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인간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의 인간상을, 즉 그들이 어떤 배치 속에 위치하여 있었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최근의 일임에도 인간이라는 전제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인 양 여긴다. 인간이 실증성의 조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육체, 인간이 제조하는 물건, 인간이 하는 말에 모든 진실이 들어 있는 듯이 여기며, 사유하는 순간부터 이미 생물이자 생산 수단이며 말을 매개하는 수단이라는 형태로만 ‘인간’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실증성의 존재 형태 속에서 인간을 제쳐놓고는 도저히 사유할 수 없는 공간에 있게 된 셈이다. 모든 인식이 ‘인간’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에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푸코는 자신의 시대에 와서 바로 이 ‘인간’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우리들이 놀고 있던 웅덩이를 덮어버리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폭발해버렸다고까지 선언한다. 즉 모든 인간의 실존 이전에 이미 앎과 체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말을 하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구조들이며 언어의 체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익명의 사유, 주체 없는 인식, 실체 없는 이론.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 실존 이전에 이미 웅크리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바로 구조주의 이론이 알려주는 결론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은 지식의 역사 전체를 밟아 내려와야 하는 지독히도 난해한 작업이지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싶었다. 그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기 위해, 거꾸로 말하면 인간의 탄생이 아주 최근의 일임을 확인하기 위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먼지 가득한 창고 속 문서들을 찾아 나선다.



인간의 탄생 : ‘인간’이 출현하다


1950년 푸코가 교수자격 시험에 낙방했을 때 필기시험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코멘트는 우리들을 웃음 짓게 한다. “주어진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자신의 박학을 과시하는 데 치우쳤음”, 이 말마따나 『말과 사물』은 처음 접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큼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인간과학에 대한 고고학’이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르네상스, 고전시대,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에 대한 지식들 즉 생명, 노동, 언어에 관한 지식들이 어떤 에피스테메 위에서 변환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여기서 ‘에피스테메(épistémè)’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를 말한다. 이 개념에 의거한다면, 하나의 에피스테메 위에서는 그 에피스테메가 용인하는 사유만 가능하다. 인간의 죽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떠받들고 있는 심층부의 세계로서, 바로 이 에피스테메를 선명하게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한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1963년 푸코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을 감상한 것을 계기로 재현의 시대와 인간학의 시대에 대해 통찰하게 되었다고 한다. 푸코는 이를 18페이지에 걸친 긴 글로 풀어내는데, 그것이 『말과 사물』의 1장이다. 1장에서 분석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시대의 인식구조를 분명히 보여준다. 일단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화가로서 드러나는 것은 그리기를 그만두었을 때이다. 만일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왼쪽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다시 말하면 화가는 자신을 없애야만, 즉 ‘화가로서의 주체’를 지워야만 자신의 그림에 드러난다. 만일 그림 자체를 일종의 도표로 생각한다면, 주체는 표 속에 하나의 요소로 편입되면서 그 자신은 소멸된다.


사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위치는 그림의 대상인 모델의 위치이며 그림의 관람객인 우리들의 위치이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벨라스케스와 그림 속의 화가는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구도로 본다면 그림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도표이다. 그림을 그리는 그림 밖의 화가(왼쪽), 그림 밖의 모델인 왕과 왕비(가운데 거울), 그림 밖의 관찰자들(그림 하단 공주와 시녀들). 결국 화가는 ‘왕의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 즉 재현의 주체, 재현의 대상, 재현의 관찰자들을 그대로 그림에 재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사라진다. 아니, 사라져야만 이 재현이 가능하다. 아울러 거울 옆 현관에 이제 막 발을 들여 놓고 있는 사람처럼 세계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재현될 것이다. 현관을 통해 어떤 것이 들어오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재현의 도표는 무한하다. 마치 신의 세계가 무한하듯이.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은 바로 이런 구조로 이루어진다. 주체와 대상을 한 평면 위에 연결시켜서(‘자연의 빛’), 한 점을 중심(‘왕의 자리’=신의 자리)으로 구조화(도표)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 <시녀들>은 ‘고전주의적 재현의 재현’이다. 즉 벨라스케스는 고전주의적 재현 그 자체를 그림으로 다시 재현하여 보여준 셈이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존재들은 모조리 하나의 평면(도표) 위로 환원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체는 소멸한다. 따라서 사유는 주체 위에서가 아니라, 이 가시성의 얇은 면 위에서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사물들을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식별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모든 인식에 확산되었다. 일반문법도, 자연사도, 부의 분석도 일종의 도표 만들기이다. 인간도 『시녀들』의 화가처럼 도표의 한 항목을 차지할 뿐, 그들의 주체성은 반드시 사라진다. 도표에 의해서 설명되기만 하면 그것은 실증성을 확보하고 자연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생각하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가능해졌다. 데카르트는 오로지 이것에 의지해서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신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신이란 것이 없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그동안 인식의 가능근거로 기능했던 재현의 구조가 갑자기 무너진다. 이 갑작스러움을 푸코는 ‘불연속’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흔히 역사가 발전했다고 생각하면서, 고전주의 시대의 인식이 근대의 인식으로 진화하였다고 논한다. 즉 일반문법이 언어학으로, 생물분류학이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발전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푸코는 고전주의 인식과 19세기의 인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단절이 있으며, 결코 연속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 단절의 심연에 떠오른 것이 ‘인간’이다. 이제 모든 인식은 이 ‘인간’과 동행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정치경제학은 경제학적 유한성 즉 희소성의 개념을 확립함으로써 경제학에 경제인(homo economicus)의 개념을 도입하여 인간학적 문제틀을 연결시킨다. 자연사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제 표면적인 특징들, 눈에 보이는 기관보다는 한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기능들이 문제시되고, 도표보다 이 기능들 간의 관계가 중요시된다. 일반문법의 문헌학으로의 변환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어근의 표층적 일반성에서 굴절의 심층적 일반성으로 변환이 발생한다. 이제 언어도 해부학적으로 접근한다. 이제 재현되는 것의 존재 자체는 재현 자체의 바깥으로 떨어진다. 즉 노동, 생명, 언어가 재현 바깥으로 떨어진다. 이런 분리로부터 ‘인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나게 된다. 모래성과 웅덩이가 구분되듯.
 
마치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한 움큼 모래를 떠 모래성을 쌓으면 웅덩이(인간)와 모래성(노동, 생명, 언어)의 구분이 생기듯이 이제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구분된다. 이제 모든 인식은 모래성을 배경으로 이 웅덩이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웅덩이와 모래성은 서로의 조건이 되면서, 서로에게 불가피해진다. 정치경제학, 생물학, 문헌학이라는 모래성으로부터 웅덩이의 테두리,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유한성은 명확해지고, 또 그것을 지속시킨다. 인간학은 이렇게 인간을 만들면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이 곧 끝인 탄생이다. 무한(‘신’)을 거부하면서도 끝이 없는 유한성(‘끊임없는 진보’)이기에 그렇다. 푸코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니체의 방식대로 그 질문을 거부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초인’이라는 대답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웅덩이 안에서는 그 자리를 끊임없이 맴돌 뿐 그 질문에 대답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웅덩이는 뒤집혀야 한다.



새로운 인간 : ‘인간’, 자신을 넘어서다


푸코의 국가박사학위 주논문은 『광기의 역사』이다. 프랑스 학계에서는 박사를 취득하려면 부논문을 제출해야 한다. 푸코의 경우는 칸트였다. 푸코는 칸트의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128페이지의 긴 『서설』을 쓴다. 1950년대에 푸코는 니체를 통해 칸트를 다시 읽었고, 이후 하이데거를 통해 칸트와 니체를 다시 읽는다. 사실 1950년대 이래 푸코는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쏟아 ‘철학의 인간화’와 대결하였다. 그 핵심에 칸트가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칸트 독해의 결실 중 하나가 바로 『말과 사물』이었다.
 
‘인간’이 탄생한 실증성의 영역에서 철학적 반성은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관념학파와 비판철학인 선험적 주체철학, 선험적 객관철학 그리고 실증주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험적 주체철학이다. 관념학파는 여전히 재현의 세계를 다루며 모든 과학들의 공통 문법을 이룩하려고 했고, 비판철학은 이제 재현의 세계가 무너지고 경험적 탐구들이 이어지고 있는 자리에서 주관 안에 선험적인 것을 놓고 인식을 설명한다. 아마 칸트의 비판철학이야말로 재현의 구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실증 영역이 솟아올랐다고 승인했던 최초의 철학일 것이다. 내 안에 선험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다! 푸코가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자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말과 사물』은 사르트르를 포함한 모든 주체철학들이 이 구조를 못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맑스도 사르트르도 19세기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앞서서 살펴봤던 ‘인간’은 바로 이 구조 위에서 탄생했다. 그것은 유한성을 가진 채 등장하는데(‘유한성의 분석론’), 동시에 실증성들이 오직 그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선험적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선험적 주체’). 칸트는 명쾌하다. 오로지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 사유는 가능하다. 인간만이 매개항으로서 세계와 신을 사유할 수 있고 아울러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경험적 주체가 받아들인 경험재료를 선험적 주체가 배열해서 인식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의 좁은 틈, 즉 인간의 사유인 경험적 주체과 선험적 주체 사이의 좁은 공간에 현전한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경험적-선험적 이중화’라고 말한 바이다. 결국 앞에서 말했던 웅덩이처럼 ‘인간학’의 구조는 세계의 외부성을 ‘인간의 사유’라는 내부성으로 유폐하고 만다. 주체는 이 각인 위에서 내부와 외부 경계선을 설정하고 그 안쪽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 바로 ‘인간학의 잠’이다. 이 주제는 훗날 『감시와 처벌』에 가서 “내(선험적 주체)가 나(경험적 주체)를 감시한다”는 매우 정치적이고, 전투적인 주제로 발전할 것이다.  


마그리트, <거울을 보는 남자>


『말과 사물』은 여기까지만 말하고 있다. 푸코는 칸트의 선험철학으로부터 인간과 인간학의 출발을 발견하고, 그 탄생 근저에 있는 에피스테메를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그것과 대비하며 때론 폭포같이 쏟아지는 문장으로, 때론 바다같이 넓은 시야로 서술했다. 여기서 칸트는 이 모든 철학의 근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훗날 생애 막바지에 다다른 푸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그러나 지금까지의 것을 모두 포함하는 놀라운 전회를 이룬다. 그리고 바로 이 전회의 한 가운데에 칸트가 다시 복귀한다. 그것을 이끈 것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라는 아주 짧은 칸트의 텍스트. 푸코는 이 텍스트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주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여기서 푸코는 칸트가 계몽을 ‘벗어남’으로 정의하고 있고,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미성숙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만을 말한다고 본다. 그리고 칸트가 미래의 성취나 과거-현재를 총체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어제와의 관계에서 현재에 어떤 차이를 도입하는가를 중심으로만 계몽을 논의한다고 극찬한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현재, 즉 ‘특수한 순간’(moment sigulier)을 다룬 최초의 철학자이다. 이렇게 되면 계몽이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현재 이 순간 ‘성숙’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이성 자체 말고는 목적이 없는 그러한 이성의 사용’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사용은 이 순간 즉시 이루어진다. 즉 “비판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그렇게 이성이 사용되어지는 순간순간이 바로 계몽이자 근대인 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 푸코는 『말과 사물』의 칸트를 뒤집는다. 이성의 정당하지 못한 사용은 망상과 함께 독단주의와 타율을 낳을 것이다. 따라서 계몽의 시대는 이를 넘어서려는 비판의 시대이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려는 비판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푸코는 항상 한계에 서려는 태도, 즉 ‘한계 태도’(attitude limite)를 놀랍게도 자신이 비판하려했던 그 칸트에게서 발견해낸다. 어쩌면 적으로부터 자신의 무기를 탈취한 탈출병과도 같다. 이렇게 되면 푸코의 말대로 “우리는 항상 다시 시작하는 처지에 있다”. 매번 다시 시작하며, 매번 한계를 넘어서려는 태도. 우리가 딛고 선 에피스테메가 테두리지은 그 한계를 매번 위반하려는 그런 태도. 우리를 감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그래서 항상 자의식의 원흉으로 드러났던 선험적 주체가 극적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말과 사물』은 이 새로운 발견으로 다른 길 위로 세워지고 방향 지워진다. 새로운 ‘인간’을 구성하는 새로운 길의 출발점으로서 말이다. 


"서양 문화의 가장 깊은 지층을 파헤치려는 우리의 시도는 바로 잠잠하고 겉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듯한 우리의 밑바탕에 단절, 불안정성, 균열을 되돌려주려는 것인데, 우리의 발아래에서 다시 뒤흔들리는 것은 바로 이 밑바탕이다."


이것은 놀라운 전환이다. 푸코는 자신을 넘어서서 또 다른 푸코를 생산한 셈이었다. 그 후로 푸코가 만들어낸 수많은 푸코들은 이렇게 구성되었다. 푸코가 만들어낸 수많은 푸코들, 그래서 그런 푸코들로 범람하는 푸코의 지적 대륙은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들처럼 수많은 돌파들로 만들어진 길들로 겹겹이 쌓인 하나의 기이한 공간이다. 따라서 『말과 사물』은 자신의 진정한 책이 아니라고 했던 푸코의 말은 진실이다. 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켰고,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자신’의 진정한 책이란 없는 셈이니까. 푸코와 『말과 사물』은 그 자체로 푸코가 서문이 말했던 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수많은 푸코들로 가는 아주 기이한 출발, 매번 새로워지는 출발이다.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말과 사물 - 10점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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