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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중국의 수(數), 건축과 음악과 우주를 말하다

by 북드라망 2013. 4. 3.

중국사유와 수, 세번째 이야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때, 사람들은 보통 우주, 자연, 세계 같은 말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이런 용어들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 대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이나 철학들이라는 의미로 우주론, 자연학, 세계관 등등이 유통된다. 근대 서구철학의 구도에서는 이런 지칭들이 존재론이라는 말로 통할된다. 존재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재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하는지 등을 탐구한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창조론에 기반을 두고 존재론을 구성한다. 이 구조에서는 초월적인 신의 세계와 현실 피조물들의 세계 간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은 다의적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를 이야기할 때, 신의 세계를 통해서 말하는 것과 현실 피조물의 세계를 통해서 말하는 것 간에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이런 접근 자체를 문제 삼으며, 그 뒤에 감춰진 편견을 찾아내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들뢰즈 같은 철학자는 존재의 일의성에 기반을 두어서 존재론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의 존재론에서는 신적 세계를 통해서 이야기하든, 현실 피조물을 통해서 이야기하든 존재는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내재하면서, 같은 의미로 이야기된다. 이렇게 되면 비록 경우에 따라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여 말할 수는 있겠으나, 서로 같이 뒤섞여 있게 되면서 서로 분리 불가능한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즉 존재자들이 있는 곳에 존재가 뒤섞여 있고, 혹여 존재들이 있는 곳에도 존재자가 끼어들어가 있게 된다. 마치 종이와 종이 주름이 분리 불가능하듯이 말이다.

나는 동아시아의 사유와 생활이 이런 존재의 일의성에 기반하여 구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예, 악, 건축, 미술 같은 것들이 그런 일의적 존재론이 두드러지게 펼쳐진 장소일 것이다. 이 영역에는 중국 고대인 스스로가 존재자들(자연 사물들, 동식물들, 사람들…) 틈에 존재의 형상(우주의 근본적인 본질)을 심어 놓는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형상화된 존재들로부터 자신들이 중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수’의 강력한 효능성을 통해서 현실화되었다.



중국건축의 기원: 집은 우주다


중국인들이 존재의 일의성을 지켜내고 있는 독특한 현장이 바로 건축이다. 중국 건축은 두 가지 기본적인 요소를 갖는다. 그것은 하늘의 표상인 지붕과 땅의 표상인 지반. 지붕이 원을, 그리고 지반이 정방형을 연상시킬 때, 그 건물은 우주의 모습을 띨 수 있게 된다. 정방형(사각형)의 대지 위에 지어진 둥근 초가지붕의 집.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고대 중국인들은 마치 공간이라는 원고지에 하늘-땅이라는 우주 형상을 써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문자는 건축자재들이고, 집은 문장이다.


푸젠 성의 토루(土樓)_원형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세계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중국인들은 건축물 그 자체를 우주로 구성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건축물을 우주의 형상으로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장구한 세월 동안 ‘수’를 활용한다. 앞서 말했듯이, 지붕은 하늘, 지반은 땅이다. 따라서 지붕의 둘레 길이(원둘레)와 지반의 둘레 길이(사각형둘레)는 우주를 구성하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후대 자료들을 참고하면─마르셀 그라네는 『대대예기』를 참조하고 있다─명당이라고 일컫기 위해서는 지붕 둘레는 216, 대들보는 144, 지붕까지의 높이는 81을 표준치로 해야 한다. 일단 여기서 지붕과 지반의 비율은 3/2[즉 지붕이 3, 지반은 2]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선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사실 초가지붕의 윤곽만을 가지고 추상화시킨다면, 그 형상은 이등변삼각형의 모습을 가진다. 이때 밑변 144를 지반(=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위 양변은 합쳐서 216이 되어야 하고, 따라서 한 변의 길이는 108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등변삼각형의 절반인 직각삼각형을 얻는다. 이 직각삼각형은 밑변이 72(=8 x 9), 높이가 81(=9 x 9), 빗변이 108(=12 x 9)이다. 따라서 이 직각삼각형은 밑변이 8, 높이가 9, 빗변이 12인 직각삼각형의 9배가 된다. 그렇다면 밑변이 144이고 위 양변이 합쳐서 216인 이등변삼각형, 그러니까 하늘-땅이라고 했던 이등변삼각형은 8, 9, 12라는 수로 구성된 직각삼각형으로부터 구축된 셈이다.




분명히 이 수들은 중국 고대인들이 건축과정에 하늘과 땅의 비율 관계(3/2이나 9/6)를 고려하였다는 점을 다시금 알려준다. 그라네가 참고하고 있는 『대대예기』는 수나라 때 작품으로 수학지식이 고도로 발달해 있던 시대의 산물이다. 6세기말 7세기 초라면 이미 자생적인 수이론 뿐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수이론들도 거의 보편화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여전히 하늘과 땅의 관계인 3/2이나 9/6 비율을 상기하고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심상에 이 비율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바로 이 노력, 이 심상이 문제적인 셈이다. 그들은 우주를 마음과 사물에 드리운다.
 
아울러 이 건축-우주를 구성할 때 승수로서 지표 9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알려준다. 그런데 이 수들은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음률을 만들어낼 때도 나왔었다. 그 경우 수열 <8, 9, 12>는 12음률을 관장하는 수열 <9, 6, 8>을 제공한다. 즉 지표 9는 율려의 수 원리를 추적할 때 발견했던 10/8과 9/7라는 비율들과 관련이 있다. 즉 10/8은 8을 승수로 형성된 수열<80, 56, 72, 48, 64>에서 제1음률과 제5음률의 비율(80/64=10/8)이다. 또한 9/7는 지표 9를 승수로 형성된 수열<81,54,72,48,63>에서의 1, 5음률간 비율(81/63=9/7)이다. 여기서 두 번째 음률 54는 원래 108의 절반으로서 의미를 가졌기에 사용된 수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한 <높이 81, 빗변의 합216, 밑변 144> 이등변삼각형은 <높이 81, 빗변 108, 밑변 72> 직각삼각형 혹은 <높이 9, 빗변 12, 밑변 8) 직각삼각형으로 변신하고, 아울러 변 108은 그 절반 54를 염두에 둔다면, 결국 그것은 제1음률(81), 제2음률(54), 제3음률(72)을 말한다. 따라서 음률의 비율과 건축의 비율은 우주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상호 동등한 비율들이다. 집은 음악이고, 우주다.



중국건축의 계보: 어떤 집이든 하나다


그런데 곤혹스러운 게 있다. 회고적으로 고찰해보면 시대마다 그 비율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의 일의성이 그때그때 깨지는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하/은대와 주대는 다른 두 가지의 비율이 통용된다. 주대의 명당 대지는 변이 각각 81(9x9)과 63(9x7)인 직방형으로 양 변을 더하면 144이다. 만일 하늘과 땅의 비율 9/6을 고려한다면, 하늘 216에 비추어 적정한 수이다. 그렇다면 동-서의 길이가 81, 남-북의 길이가 63으로 가로-세로는 81/63 즉 9/7의 비율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주나라가 하늘과 땅은 3/2(혹은 9/6) 비율을, 명당 대지의 가로-세로 비율은 9/7 비율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대대예기』에서 풀고 있는 이 이야기는 『주례』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런데 하대와 은대에서는 주대의 9/7 비율과 달리 5/4(=10/8)이다. 앞에서 우려했던 대로 가로-세로(동서-남북) 비율이 다른 것이다.
 
첫 번째 왕조였던 하대는 가로 105(=5x21), 세로 84(=4x21)인 직방형을 명당 대지로 본다. 즉 가로-세로 비율이 5/4이다. 그런데 두 번째 왕조였던 은대는 가로 70, 세로 56이다. 그렇다면 은대의 면적단위도 하대와 같이 5x4이다. 그런데 후대의 주해가들은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당대 가장 유명한 주해가인 정현은 아주 생뚱맞은 주장을 하는데, 가로가 70이 아니라 72(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현의 주장에 따르면, 은대는 명당을 가로 9척, 세로 7척인 8x8(64)개의 작은 정방형으로 구성했다. 그런데 주대는 명당을 가로 9척, 세로 7척인 9x9(81)개의 연(筵)에 달하는 면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하대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가 앞서 봤듯이, 하대는 가로 105, 즉 5x21이었고, 세로 84, 즉 4x21이었다. 따라서 명백히 가로 5, 세로 4의 면적단위로 만들어야 맞다. 그러나 정현은 여기서 아주 사심 없이 숫자를 ‘조작’한다! 슬쩍 대지의 가로 105를 108로 간주해버린다. 즉 가로 108, 세로 84. 그렇다면 가로는 12x9, 세로는 12x7. 따라서 정현은 105를 슬쩍 108로 바꾸어 계산함으로써, 하대의 면적단위를 9x7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하, 은, 주 전부 9x7 면적단위를 갖는다. 그야말로 조작에 의한 통일성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된다. 하대는 9x7 면적단위로서 12x12로 측정된다. 은대도 똑같이 9x7 면적단위로서 8x8로 측정된다. 마지막 주대도 9x7 면적단위로서 9x9로 측정된다. 정현은 하, 은, 주를 같은 묶음으로 보아야 했다. 따라서 모든 왕조가 가로-세로 9/7 비율의 면적단위를 갖는다. 이는 물론 모든 왕조가 동일한 것을 계승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하, 은, 주 모두에 동일한 우주를 부여해 주기 위한 조작이기도 했다. 즉 하, 은, 주 모든 왕조가 우주의 일의적 형상을 갖는다. 하, 은, 주는 실로 완벽한 통일 속에서 하나의 우주를 품는다. 그것은 9/7 비율의 일의적 우주인 셈이다.
 
그러나, 하, 은, 주는 엄연히 다른 왕조였다. 그래서 이런 것을 고려하여 측정단위를 통해 하대에는 12라는 상징수를, 은대에는 8이라는 상징수를, 주대에는 9라는 상징수를 부여한다. 아마도 이 세 개의 세로 수 <9, 8, 12>는 그 자체만으로 세 왕조의 표상과도 같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앞서서 지붕-지반으로 드러났던 하늘-땅의 비율 3/2을 보장해주었던 이등변삼각형 <9, 8, 12>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데 12는 6과 같다. 그렇다면 이 수열은 제1음률과 제5음률의 비율을 9/7로 고정시켰던 그 수열 <9, 6, 8>이 된다. 이렇게 해서 하, 은, 주는 마치 음률의 순서처럼 자연스럽게 교체되어 흐르는 왕조들로 간주된다. 이것은 역으로 다시 하, 은, 주라는 왕조의 권위에 따라 모든 건축 구성과 생활이 이뤄졌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모든 집은 우주이다. 하지만 그것은 왕조의 권위에 따라 교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었다. 왕조-음률-건축, 이제 이 세 가지 모두 우주-존재가 삽입된 일의적 세계이자 변화가능한 세계로서 우리 앞에 선다.


칸딘스키, <구성 8>



중국 건축의 변신 : 집은 변신한다


고대 중국인들의 끈질김이란 끊임없다. 앞에서 정현은 난데없이 70을 72로 보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조작이다. 그러나 정현이 70을 72로 보겠다는 것 자체가 우주와 왕조의 연속성에 대한 강한 내적 욕망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5/4 비율이나 9/7 비율은 등가 관계를 내포하는 비율이며, 아울러 63, 즉 (70+56)/2와 64, 즉 (72+56)/2가 결국 같은 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욕망은 수 1에 의해서 변주된다.
 
사실 비율을 5/4로 통일시키려고 해도 그리 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주대의 명당 크기만을 바꾸어도 가능할 것이다. 원래 하대의 대지는 가로-세로 105x84로 이미 5/4이다. 그리고 은대도 정현이 바꾸기 전 가로-세로가 70x56으로 똑같이 5/4이다. 그런데 주대는 81x63(9/7비율)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대지의 반둘레 길이가 144가 되기만 하면 근본적인 비율이었던 하늘-땅 비율 3/2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80x64로 바꿀 수 있다. 결국 80+64=144로서 기존의 9/7비율에서의 81+63=144와 같다. 따라서 주대도 그리 큰 고민 없이 5/4비율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인은 두 쌍의 수 81-63과 80-64는 같은 쌍이다.
 
그런데 이를 음률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다.하대의 명당은 가로-세로가 105-84. 따라서 반둘레 길이는 189이다. 따라서 은대의 명당 가로-세로 70-56, 반둘레 126과 비교하면 9/6이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도 이 수들은 사마천의 음률과 깊이 관련된다. 먼저 189는 사마천 음률의 첫 세 음률[45, 63, 81] 총수치와 같다. 아울러 은대의 126은 마지막 두 음률[54, 72]의 총수치와 같다. 따라서 대지 비율은 특정 음계상의 음률을 빌려서 구성했다는 점을 강력하게 추정할 수 있다.
 

오행배속에 따른 음(궁상각치우)과 지지와 12율려


그런데 은대와 주대간의 비율은 사마천의 음률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음률[황종-대려..라는 후대에 성립된 음률]을 가지고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산출된다. 먼저 첫 여섯 음률을 두 단위의 수로 분할하기 위해서 총 수치 360[첫 여섯 음률의 총수]으로부터 출발한다. 360은 15x24인데, 15는 9+6 혹은 8+7로 표현할 수 있으며, 24는 9+8+7, 10+8+6으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9+6과 9+8+7을 이용한 음률 생성. 즉 9와 6을 9, 8, 7로 곱하면 [81(=9x9), 72(=9x8), 63(=9x7) ㅡ 54(=6x9), 48(=6x8), 42(=6x7)]을 얻는다. 앞의 세 수는 양(9)의 음률이고, 뒤 세 수는 음(6)의 음률이다. 두 군의 수비율은 순서대로 81/54=72/48=63/42=9/6이고, 전체적인 비율은 당연히 216/144이다. 그리고 제1음률은 제5음률의 9/7(81/63)에 해당한다.
 
다음 8+7과 10+8+6을 이용한 음률 생성. 즉 8과 7을 10, 8, 6으로 곱하면 [80(=8x10), 64(=8x8), 48(=8x6) ㅡ 70(=7x10), 56(=7x8), 42(=7x6)]을 얻는다. 이 음률들의 경우, 두 군의 수비율은 8/7(=192/168)이다.

자, 이렇게 수들을 나열하고 정리하고 보면, 우리가 앞서서 은대와 주대 명당의 크기를 논하기 위해서 끌어들였던 가로-세로 길이에 해당하는 수들이 여기 다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즉 은대의 70과 56, 주대의 80과 64가 그것이다. [80, 56, 70, 48, 64, (42)]는 여섯 음률 [80, 56, 72, 48, 64, (40)]과 다를 바 없다. 42는 제1음률을 한 옥타브 낮추어 만든 수 40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정현은 72를 70에 동화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건축과 음률을 일치시키고자 한 고대 중국인들의 노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두 쌍의 수 81-63과 80-64는 같은 쌍이다. 결국 (8, 9, 12) 직삼각형에서 (9, 6, 8)로 가기에 앞서, 또 다른 직삼각형 (3, 4, 5 또는 6, 8, 10)을 거쳤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즉 비율 9/6과 비례 9x7을 명백히 했던 (9, 6, 8)에 앞서서 비율 8/7과 비례 10x8을 분명히 해주는 또 다른 직삼각형 (3, 4, 5 또는 6, 8, 10)을 통해서 음률을 최대한 정확히 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변화는 건축과 음률간의 상관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데, 음률의 변화로 결국 건축 비율의 변화를 같이 불러 온 경우이다. 즉 음률의 변모가 음률 뿐 아니라 건축에도, 그리고 해시계의 규칙(천문술)에도 반영되었다. 따라서 수1의 변주는 음률의 변화뿐 아니라, 왕조의 교체이면서, 결과적으로 우주의 변신으로 작용한다. 우주는 왕조라는 존재자들 속에 내재하면서, 변신한다.


중국인들에게 수는 숫자를 세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관을 구성하는 사유의 기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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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중국 고대 사유에서 수는 크기를 표현하는데 그 기능을 두지 않는다. 중국인들에게 수 는 건축, 미술, 음악에 붙어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그곳에서 우리들 심상에 어떤 ‘존재’를─이를테면 우주, 1년, 계절…─ 환기시켰다. 수 자체가 어떤 우주적 산물이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존재자들 틈에서도 일의적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즉 우주가 세상에 내재하게 되는 것이다. 분리불가능한 종이의 주름처럼 존재와 존재자들이 함께 머문다. 그 밖은 없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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